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240화 (241/379)

240화. 논검 (1)

“사제자께서 보내신 사절이오.”

복면을 쓰고 흑마전 앞에 선 설휘가 신분을 밝혔다.

보초를 서던 무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얼굴에 관록이 좀 있어 보이는 장년인을 데리고 나왔다.

“돌아가라. 흑마전주께서는 제자분들의 내홍에 끼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장년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단은 중립을 표명한 흑마전주. 그의 입장 그대로였다.

“흠. 안 그래도 사제자께서 말씀하시길, 혹여 만나 주지 않겠다고 하면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소.”

쉽게 만나주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설휘는 오면서 꾸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겁이 많아 정국을 논하는 게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지체 없이 발길을 돌리라고.”

“……지금 우릴 모욕하는 건가?”

장년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설휘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들은 대로 전할 뿐이오. 그리고 또 이 말씀도 있었소.”

“…….”

“권력투쟁에 승리해 교주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목을 칠 자는, 중립을 표방하는 간덩이 부은 놈들이라고.”

“……!”

장년인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흑마전주는 그의 상관이다.

말이 중립이지, 줄을 잘못 잡을까 봐 몸을 사리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쪽의 손도 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건 흑마전주의 입장이지 천마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 만에 하나, 사제자가 교주가 된다면?

그 뒷감당을, 본인이 전부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자신이 그럴 만한 위치인가?

“나는 말을 전했소. 그러니 이만.”

“자, 잠시 기다리시게.”

결국 그는 설휘를 붙잡고 기다리게 했다. 그가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뒤.

“들어오게. 전주께서 보자고 하시네.”

나온 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다행이구나.’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걸으며 설휘는 한숨을 돌렸다.

문전박대만큼은 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겁박을 했다. 덕분에 만날 수는 있게 되었지만, 상대의 기분은 당연히 극도로 나빠져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흑마전주의 불쾌감을 해소하고, 사제자와의 협력을 유도해야 했다.

‘쉽지 않겠지.’

다른 명망 있는 제자들과의 만남도 거부한 그가, 가장 수세에 몰려있는 사제자의 수하를 자청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설휘는 마음을 다잡았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위기는 ‘시스템’이라는 녀석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비밀무사의 주된 임무는 강호의 요인 암살. 혹은 이처럼 협력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일은 비밀무사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며, 매번 해나가야 하는 일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다?’

설휘는 정원을 걸으며 그를 어떻게 설득시킬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거대하게 들어선 회랑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잠시 여기 있게.”

장년인의 말에 설휘는 문밖에서 잠깐 기다렸다. 이내 얼마 후 승낙이 떨어졌는지, 문이 열리며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설휘는 당당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

북향으로 줄지어 앉은 사람들.

복도식 건물이라 정자처럼 좌우는 활짝 열려 있었다. 저마다 기광이 서린 눈빛들이 쏘아지는 가운데.

“네놈이 사제자의 가신이라고?”

가장 끝에 앉아 있던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척 봐도 실로 엄청난 기개가 느껴지는 체구와 인상.

흑마전주인 구대염일 터였다.

“그렇습니다.”

설휘는 예를 갖췄다.

“겁쟁이에 간이 부은 놈이라……. 묻겠다. 사제자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냐?”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에 노여움이 들끓고 있었다.

겁박에 굴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패 죽이려고 부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꾸벅.

거기서 설휘는 크게 허리를 숙였다.

“실은 아닙니다. 제가 흑마전주를 뵙기 위해 꾸민 말입니다.”

“……뭐?!”

“사제자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흑마전주와 안면을 트라 하셨습니다. 하여, 명령을 받은 소인이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고자 벌인 일입니다.”

“허…….”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대염의 얼굴에 강한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다.

“맹랑한 놈이로군. 감히 세 치 혀로 나를 농락할 생각을 다 하다니.”

그리고 허탈한 신음.

사제자에 대해 품었던 악감정과 경계심이 절로 내려지는 모습이었다.

그에 설휘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송구하지만, 제가 뱉은 말은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일 중의 하나라 봅니다.”

“이놈이 또?”

“사실이지 않습니까. 훗날 천마 제자 중 반드시 한 명은 교주가 될 것이고, 그는 본교의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지금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허나, 그게 사실이라 해도 네놈이 나를 조롱한 게 거짓이 되진 않지. 네놈의 목을 언제든 칠 수 있음은 알아야 할 터.”

흑마전주가 으르렁거리자 설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하시면 흑마전주께서는 큰 손해를 보게 되실 겁니다.”

“손해?”

“예. 저에게 과도할 정도로 셈을 쳐주시는 게 되니까요. 다른 제자의 제의를 거절했던 흑마전주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께서 제 목을 치신다면.”

설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사제자께 빚을 지게 되는 일. 제 목숨 하나로 흑마전주라는 대마를 끌어들이게 되면, 심히 나쁘지 않은 장사를 한 셈인 게지요.”

“……이놈 봐라?”

구대염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렸다.

도발과 건방진 언사만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지게 한다.

그냥 목을 베어버려도 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가?”

승부사. 혹은 도박꾼.

그런 냄새를 맡은 흑마전주는 일단 말 정도는 들어 보기로 했다.

“장차 대계를 꾸려가기 위한 사제자님의 복안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사제자님의 복안이라…….”

구대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손짓했다.

“이리 앞으로 오너라.”

그 말에 설휘가 움직였다.

본인들을 지나칠 때마다 기쁜 나쁜 표정으로 노려보는 눈길들.

형형한 기운이 스며 나올 정도로 이곳에 모인 자들은 다들 상당한 경지를 자랑했다.

스르륵.

그렇게 흑마전주 근처까지 다가서자, 부단주가 일어났다. 그 역시 사나운 눈으로 설휘를 노려보더니 이내 자신의 자리를 빼주었다.

“자, 한잔 받게.”

그렇게 자리에 앉자 구대염이 술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잔에서는 기분 좋은 꽃내음이 났다. 설휘는 거부하지 않고 한잔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구대염은 입꼬리를 올리며.

“이왕 왔으니 딱딱한 소리 하지 말고…….”

그는 고개를 들더니 한 사내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재미있는 구경이나 하고 가게나. 시작하거라!”

“옙!”

구대염의 말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사내들이 묵례를 해 보였다.

드르륵!

그리고 활짝 열린 문으로 이동하더니, 이내 다시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뭐지?’

설휘는 그제야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완벽히 밀봉된 천으로 둘러싸인 한 인영.

찌이익!

한 명이 칼로 천을 잘라버리자, 생김새가 멀끔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인상착의가 척 보기에도 본교 출신의 사람은 아니었다.

툭. 투투툭.

점혈을 해 놓았는지 사내의 혈자리를 짚는 흑마전의 무사.

이후, 눈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러자 힘이 쭉 빠졌는지 강호인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어어어!”

때마침 반대쪽에 있던 사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무에 묶인 밧줄을 제거하고 혈도를 짚자, 강호인과 달리 곧장 정신을 차린 것이다.

“저기 강호인으로 보이는 놈은 무당파 일대제자라고 하더군. 우리 수하 하나가 본교로 돌아오는 길에 납치해 왔지.”

흑마전주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은 우리 부대에 있던 녀석인데, 상관을 살해했다고 하더군. 위아래도 구별하지 못하는 탓에 뇌옥에 잠시 보냈던 거고.”

확실히 두 명 다 보통이 넘는 실력자들.

설휘는 흑마전주의 설명을 들으며 두 사내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무공을 익혔는지는 태양혈을 보면 되지만, 그 실력을 알려면 눈을 봐야 한다.

눈은 마음의 창구라, 어느 정도 수행했는지 척도를 잴 수 있기 때문이다.

‘거구가 더 위다.’

두 사내를 면밀히 보고서 내린 판단이었다.

거구는 초절정. 아니,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눈에 보이는 투기의 빛. 싸움의 경험이 월등히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압!”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거구는 청년을 보자마자 달려들었고, 청년은 때마침 정신을 차렸는지 민첩하게 뒤로 물러섰다.

부웅! 부웅!

계속된 상대의 공격을 피해 몇 번인가 횡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거구의 움직임이 마치 가속이 되는 것처럼 더욱더 빨라지고 예리해졌기 때문이다.

쩌어엉.

거기다 기공까지 펼쳐내자 사내는 일격을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사이 빠르게 접근한 거구의 내려찍기가 이어졌는데, 사내는 정말 아슬하게 피해내며 다시금 일어섰다.

퍼퍼퍼퍽!

뒤이어 거구의 발차기가 이어졌다. 사내는 몸을 튕기듯 급소를 피하며 회피로 대응했다.

퍼엉!

거구가 다시 장법을 펼치자 이번엔 사내가 같은 동작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공방이 잠깐 이어지더니 이내 사내가 쭉 물러났고, 다시금 스스로 달려나갔다.

몇 번의 공수를 주고받다가 날린 기습적인 일격이었다.

쩌엉!

강력한 일격을 맞았음에도 거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사내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표정에 당혹감이 서린 게 보였다.

“크윽.”

퍼억!

그리고 거구에게 주먹을 맞고 사내가 다시 몸이 뒤집어졌다.

그때부터였다.

일방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은.

퍽! 퍽! 퍽!

일방적이었다. 도중에 몇 번 정도 사내가 반격을 했지만, 거구는 타격을 입지 않고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어느새 사내의 얼굴에는 피가 흥건했고. 서 있는 것도 불안정해 보였다.

“자, 우리 여기서 내기 한번 할까?”

설휘는 흠칫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구대염의 눈이 가늘어졌기 때문이다.

“누가 이길지 말일세.”

눈앞의 두 사람.

누가 봐도 승패는 뻔히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구대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휘를 향해 물었다.

“자넨 어느 쪽에 걸겠나?”

“…….”

“왜 대답이 없는가?”

설휘는 그를 보면서 침묵하고 있었다.

질문의 의도가 너무 뻔했으니까.

“왜, 너무 뻔하다고 보는가?”

설휘는 두 사내의 싸움에서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이들의 싸움은 천마 제자들의 관계와 같았다.

수세에 몰린 사제자.

그리고 압도적으로 그를 밀어붙이는 다른 제자들.

그럼에도 설휘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건, 그걸 인정하는 순간 그걸 구실로 잡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뻔하다는 얘기는, 이미 승패가 갈린 거라는 말이니까.

“전주께서는 내기에 무얼 거시겠습니까?”

“허?”

하여 설휘는 궤를 달리하여 물었고, 구대염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침작을 되찾은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긴, 내기엔 거는 게 있어야지.”

그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네가 이기면 너의 무례를 용서하는 건 물론이고, 너와 진지하게 얘길 나누어 보겠다.”

“…….”

“왜, 내기의 대가가 너무 작아 보이는가?”

“아닙니다. 충분하지요.”

“그래? 그럼…….”

꿀꺽.

그는 술을 한잔 크게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기면 네놈 팔다리 중 한 짝을 내놓거라.”

“……!”

역시나 강한 요구가 나왔다.

이 정도면 거의 노골적이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했던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오?”

하지만 설휘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나왔다.

“거기에 제 목도 함께 얹어드리지요.”

“허? 아주 자신만만해 보이는군.”

“자신이 있다기보다, 그 정도는 드려야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제 무례를 덮어주시는 전주님의 그릇에 말입니다.”

“공정…… 좋은 말이군. 좋다, 이제 말하거라. 너는 어느 쪽에 걸 것이냐?”

구대염의 눈에 흥미가 감돌았다.

“저는 저 강호의 사내에게 걸겠습니다.”

“호오.”

나름 짐작은 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리 나오니 조금은 놀란 모양이었다.

“억울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는 다시금 물었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선택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설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에 구대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런 말이 안 나오나 했지. 무어냐?”

“싸움을 일단 멈추게 해주시지요.”

“……?”

의아한 요구. 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왜?”

“이리 귀한 술을 주셨는데, 흥취를 즐기기도 전에 결판이 나면 좀 아쉽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허허허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기 때문일까.

구대염은 장내가 떠나갈 듯 웃었다.

“좋다. 여봐라.”

설휘의 요구는 금방 실현이 되었다. 구대염의 지시로 한창 싸우고 있던 사내들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뭔가?”

“뻔한 싸움. 굳이 이렇게 지켜보는 건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구대염. 그가 빤히 바라보자 설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싸움, 논검으로 하시지요.”

“……!”

논검(論劍).

칼이 아닌 말로 싸우는 것.

허나, 말이라 할지라도 싸움을 구현하는 것이라 무학에 대한 높은 이해가 있어야 했다.

특히 지금은 두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논검이라, 상대의 실력뿐만 아니라 무공에 대한 이해, 무학의 지식을 총동원해야 하는 매우 수준 높은 싸움이었다.

설휘가 제안한 것은 그런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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