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비밀무사의 조건 (1)
모든 무사가 자리를 뜨자, 방 안엔 적막함이 흘렀다.
설휘는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8대 전주 중에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 그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천마 제자가 찾아올 정도로 본교 내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럼 날 설득시켜 보거라. 내가 왜 사제자 곁으로 가야 하는지, 왜 다른 제자들이 아닌 굳이 사제자여야 하는지.”
사제자란 말에 유독 힘을 주는 구대염의 태도에 설휘는 느꼈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그를 회유하기 어렵다는 걸.
대단히 방어적인 자세였다.
본래 작정하고 판을 깔아주면 상대를 설득하기가 더더욱 힘든 법이다.
냉소적인 자를 웃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설휘는 상대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주도권을 쥐는 것이 설득에 있어 가장 기초.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의 흐름이 아니라, 자신의 흐름대로 따라오게 해야 했다.
“먼저 어르신께선 왜 사제자에게 협력할 수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제가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질문을 질문으로 받겠다?”
구대염은 입꼬리를 올렸다.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 녀석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뭔가 대화를 하면 할수록 호기심이 짙어지게 만드는 것.
굳이 놈의 말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자극하는 녀석은 오랜만이다.
때문에, 한번 어울려 주기로 했다.
“뭐. 그것도 재밌겠군.”
쪼르륵.
구대염은 말과 함께 앞에 있는 잔을 술로 채웠다.
쭈우욱!
그리고 한 번에 들이마신 뒤 말을 이었다.
“우선 사제자는 다른 제자들보다 세력이 약하다.”
따악.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바둑돌을 내려놓는 듯했다.
“세력의 힘을 우습게 보지 마라. 인중룡이라 불렸던 여포조차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당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잡졸들에게 붙잡혀서 나뒹굴었지.”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설휘는 부정하지 않고 끄덕였다.
“그저 세력의 문제만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채워질 겁니다. 사제자께서는 인덕이 있으시니까요. 다른 제자분들의 강퍅함 때문에 더욱 두드러질 겁니다.”
대신에 한마디 추가해서 붙였다.
상대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시점을 흔드는 것이다.
“흥. 설령 네 말대로 그렇게 된다 해도 문제는 여전하지. 쥐새끼 십만 마리를 모은다고 대호를 잡을 수 있을까? 사제자의 휘하에, 어디 내로라하는 극마고수 하나 있던가?”
“그건 그렇지요. 사제자께서는 자리를 잡을 시간이 너무 없었으니까요. 조금만 공정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테지만.”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재가 없다는 상대의 말에, 그건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로 흘려냈다.
“하,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공정함을 따지나? 본교의 길은 패도의 길. 시간이 없어서, 경쟁이 공정하지 못해서. 이런 걸 따질 바에야 정파로 투신하라지.”
물론 흑마전주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사제자는 큰 그림을 그리는 대국적인 시야를 갖추지 못했어. 파멸로 가기 딱 좋은 처지지.”
“그건 저와 생각이 다르시군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본교의 후계자 쟁투는 무력만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그는 배신과 암투에 대한 경험이 없다. 거기다 군사적 지도를 해줄 자도, 이런 싸움을 경험해 본 수하도 없다.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거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줄 인물이 없다는 말이다.”
구대염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니, 본교의 권력투쟁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한두 번 생각한 것이 아닌 듯했다.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인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가. 미래를 향해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웠는가. 이는 곧 성과다. 사제자는 그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반면 다른 제자들은 어떻지?”
주르륵. 벌컥. 따악.
길게 말을 뱉어낸 후, 흑마전주가 다시 바둑돌을 놓듯 잔을 내려놓았다.
“일제자는 이미 강호행 중에 무당파 태상장로의 목을 베었다. 마후의 간악한 꾀는 본교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것이고. 삼제자는? 교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은마원의 은거고수들이 뒤를 봐주고 있지. 그런 와중에 사제자는? 언제 뒈질지도 모르는 천살성 그거 하나만 붙들고 있지 않느냐?”
“…….”
설휘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껏 다른 제자들이 온갖 악독한 짓을 하는 와중에 곤마는 무엇을 보여줬는가?
그저 천일관에 박혀 책을 집필하고, 수하들을 조용히 단속하는 정도에 그쳤다.
시대와 배경이 받쳐줬다면 이 또한 인덕이라 말할 수 있으나, 다른 곳도 아닌 마교에서 저런 정석적인 움직임은 그저 유약하고 우유부단해 보일 뿐.
포악함도 능력이다.
갖추지 못한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다.
“확실히. 그리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설휘가 끄덕이자 구대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 이거 뭐야?’
그의 주군이 사제자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흑마전주 구대염은 곤마에 대해 박하다 못해 모욕적인 언사를 뱉었다.
그런데도 감정의 변화가 없다.
협상의 자리에서, 아무리 본인의 무위가 높다 치더라도, 분노나 수치를 참아내는 마음의 수련은 또 다른 이야기다.
하물며 상대는 많이 봐줘도 이십 대 후반. 설휘가 여러 차례의 전생을 겪은 것을 구대염은 알 방도가 없었다.
“더 있습니까?”
“……음?”
“앞서 말씀하신 부분 말고, 다른 결점 말입니다. 전주께서 지적하신 부분은 분명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도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허, 흐음.”
구대염은 턱을 한번 쓸어내렸다.
보통은 이쯤 되면 분노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혹은 위축되어서 조용히 있을 법한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 발언은 이미 예상 범주 내라는 것인가?’
정신적인 힘겨루기에서 상대를 전혀 흔들지 못한 것이, 구대염은 못마땅한 것이었다.
“뭐. 더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지만, 대충 이 정도지.”
“그럼 이제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구대염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붙였다. 그리고 반개한 눈으로 설휘란 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왜 전주님 같은 분이 사제자이신 곤마 님을 따라야 하는지 말입니다.”
상대의 과한 자신감이 살짝 불쾌했는지, 그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주르륵.
허락이 떨어지자, 설휘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처럼 한잔 입에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세력이 가장 약하다는 말씀, 인정합니다. 하지만 세력이 약할 뿐, 사제자께서 확보한 절대고수의 숫자는 적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런. 아직 어르신께선 자세한 소식을 듣지 못하셨군요. 저희 세력에 이번에 영입된 두 분의 고수가 있으십니다. 한 분은 악비. 전대 구마전주셨고 은퇴를 선언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초아란. 한때 장로셨기도 한, 혈마수로 유명하신 분이시지요.”
“뭐……라?”
흑마전주가 눈을 부릅떴다.
빙월신공의 악비. 혈마수 초아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거론되었다. 그것도 은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절대고수.
흑마전주는 마침 그 둘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둘은 은퇴한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적잖이 안면도 있었던 것이다.
“예, 그리고 한 분이 더 있습니다. 천미려라고…… 이분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와당탕!
그에 구대염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놈.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있느냐? 네 말이 거짓일 경우, 네 목은 당장 없어질 것이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담담한 설휘의 눈빛에 오히려 흑마전주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제자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상대는 사제자가 보낸 사절.
이 자리에서 거짓을 논해 자신을 끌어들여봤자, 나중에 판명되면 몇 배로 곤란해질 것이 당연했다.
“이럴 수가…….”
그걸 알아도 의심될 정도의 사건이었다.
천미려라니.
은거고수 중에서도, 아니 본교에서도 적수를 찾기가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초극고수다.
그런 그녀를 사제자가 영입했다니.
“이분들이 최전선에 나서 주신다면, 저희 세력이 약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겁니다.”
“흐음.”
극마고수 둘. 거기에 천미려. 그리고 천살성 본인.
흑마전주는 사제자 곤마의 세력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소수정예.’
총전력을 서로 부딪히는 전면전이라면 아직 일제자나 이제자에게 비벼보기엔 부족하다. 허나 소수정예에게는 나름 큰 세력이 감당하기 힘든 전장이 있었다.
바로 기습.
극마급 고수들이 마음먹고 기습을 한다면, 상황은 진흙탕 싸움이 된다. 아무리 일제자나 이제자의 세력이 강대해도, 덩치가 큰 만큼 연한 살덩이가 푹푹 베어져 나갈 뿐이다.
‘애초에 다른 진영에 천미려를 이길 수 있는 고수가 있던가?’
흑마전주 구대염이 보기엔 없었다. 그가 듣기로, 천미려는 교주 외에 탈마의 벽을 깰 수 있는, 마교의 두 사람 중 하나라는 말까지 있었으니.
“또한, 전주께선 저희 진영에 싸움을 이끌 군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그런데 이건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르신께 오히려 좋은 게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마침 그런 역량을 지니신 전주께서 저희에게 오시면, 서로서로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 이놈 보게?”
샐쭉.
흑마전주 구대염의 눈매가 휘었다.
털썩.
“계속 말해봐라.”
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으로 설휘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제자, 이제자, 심지어 삼제자까지. 다른 세력에는 책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많습니다. 지존의 옆에 있는 인물들. 유능하고 노회한 이들은 서로 공을 다투느라 견제가 이루어지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내가 몸을 담으면 개국공신, 뭐 이런 게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바로 그겁니다. 이제껏 사제자께 부족한 면을 지적하신 흑마전주시라면, 그걸 모두 채워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곤마께서는 성품이 성품이니, 후계자 쟁투에서 활약하신 흑마전주를 잊지 않으실 터.”
“…….”
설휘의 말에 흑마전주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하. 이놈, 아주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 맞았다. 설휘의 말은 달콤했다. 꿀단지에서 피어오르는 꿀 냄새처럼 진하고 달달한 향기가 났다. 노회한 흑마전주조차 그걸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뭔가?”
여기서 또 내놓을 것이 있단 말인가. 구대염은 적잖이 긴장하며 말을 기다렸다.
보통, 조건이 너무 좋으면 의심해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낚시니까.
특히 지금의 사제자처럼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이들의 제안은 달콤한 것만으로는 조심해야 하는 법.
헌데.
“조금 전 개국공신의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결코 빠지지 않는 뒷이야기, 토사구팽입니다.”
“……!”
토사구팽.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가 삶아진다. 한고조 유방의 개국공신 대장군 한신으로부터 유명해진 고사다.
또한 흑마전주 구대염이 이제까지 어느 세력에도 몸을 담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성과가 높아도, 군주가 더 내어줄 것이 없게 되면 거물일수록 숙청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흑마전주는 이미 충분히 거물이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저어하고 있던 주제를 설휘가 찌른 것이다.
그것도 정면으로.
“언제고 곤마께서 타계하시게 되면, 그 교주직 자리는 흑마전주께서 이으시게 될 테니까요.”
“……!”
당연히, 구대염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건 그로서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잖습니까. 천살성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요. 이 싸움, 곤마께서 교주 자리에 오르는 게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저 승리하는 것이지요.”
그랬다.
이건 곤마의 의중도 담겨 있었다. 이 싸움.
오로지 승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마교 교주가 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구대염은 입을 닫았다.
완전 예측을 벗어나는 대답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그가.
“그건 사제자의 생각인가?”
달라진 말투로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