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비밀무사의 조건 (2)
“그럴 것 같습니다.”
“……뭐라?”
설휘의 대답에 구대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말장난을 할 생각이라면, 크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냐하면 이건 다들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곤마께서 직접 나서실 것이고, 그리되면 목숨을 잃게 되실 겁니다.”
“……그래서?”
“극마고수들은 은퇴하신 분들이라 권좌에 관심이 없으실 테고, 장로급 역시 직책을 맡지 않으실 터. 그리되면 결국 사제자의 세력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흑마전주께 권력이 이양될 겁니다.”
“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곤마가 죽게 되면 그 세력의 승계는, 가장 힘이 세거나 세력이 많은 수하에게 돌아갈 터.
구대염이라면 그 수혜를 받게 될 것이다.
“허나, 목숨을 보전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오히려 더 홀가분해지실 겁니다.”
“무슨 뜻이냐?”
“전주께서도 아시다시피, 곤마께서는 본교의 사람이 아닙니다. 교주의 눈에 들어 본교에 오신 분이지요. 그간의 사제자의 행보를 보시면 권력 싸움에도 큰 관심이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으흠.”
“그러니 설령 권력을 원해도, 교주로서 실권을 잡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르실 겁니다.”
구대염은 반박하지 않았다.
천살성이라는 특수한 신체의 소유자. 한 번은 무조건 이길 테지만, 힘을 쓰는 순간 반드시 죽는 자. 그런 자가 교주가 된다면 반발이 매우 심할 것이다.
강한 인물이 마교를 오래도록 이끌기를 바라는 건 모든 교인들이 한마음일 터. 그러니 설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흠.”
그럼에도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살성이라는 특수성이 되레 호재로 작용하는 것이 그랬고, 스스로 쟁취하지 않은 감투를 자신이 받는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뭔가?”
“…….”
“굳이 내게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냐.”
상대의 제안은 매력적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불신하고 있었다. 이제껏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거늘 굳이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설휘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흑마전주가 팔대 전주 중 가장 세력이 많다곤 하나, 그렇다고 다른 전주들을 압도할 정도의 실력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팔전 한 곳 한 곳이 본교를 대표하는 전력이기에.
특히나 교주직을 넘겨준다는 건 행운인 동시에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이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그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생각이 많아지는 설휘에게 빈 잔이 눈에 들어왔다.
쪼로록.
설휘는 말없이 잔에 술을 반쯤 따른 후, 물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까.”
“말하거라.”
“어르신께선 이 잔에 술을 더 따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보십니까?”
흑마전주의 눈썹이 꿈틀댔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질문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다.
설휘는 그런 그의 의지를 읽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전주께서는 열여섯에 강호행을 나가셨고, 목숨을 건 싸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중 서른 중반 때의 강호행에서, 정파 놈들이 쳐놓은 천라지망을 뚫고 탈출한 건 본교의 모든 무인들에게 회자가 되기도 했지요.”
“…….”
“항상 사선을 넘어 살아 돌아오면서 승승장구하셨습니다. 그러다 팔대 전주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게 되셨고요.”
“이놈. 하고 싶은 말만 하거라.”
구대염이 대놓고 짜증을 내자, 설휘는 그와 눈을 맞췄다.
“전주께서 생각하셨던 낭만은 무엇이었습니까?”
“……낭만?”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손쉬운 승리를 하는 거였습니까? 기회를 잡아 권좌에 오르는 것입니까? 그래서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하지 않으셔도 이해하겠습니다.”
설휘는 술잔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이 잔에 술이 부족하다고, 그렇다고 많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부족하면 채우면 될 것이고, 채우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비워 두면 될 것이지요.”
“…….”
“가진 것 없는 사제자가 이 권력투쟁에서 유력한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승리하는 것. 신세 탓, 환경 탓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경을 이겨내는 것. 그런 낭만이 곤마께는 있습니다.”
설휘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었다.
“자신이 교주가 되지 않더라도 수하들에게는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는 낭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후대에게 자신보다 쉬운 길을 만들어주는 낭만. 자신이 죽음으로서 수하들의 미래를 밝혀주는 낭만.”
“…….”
“전주께서는 어떤 낭만이 있으십니까?”
구대염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휘가 말한 뜻이 온전히 전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내리던 그는.
“이제 보니 뜬구름 잡는 몽상가들이 모인 집단이었구만.”
창가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
‘실패한 건가.’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곳에 오기 전 흑마전주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지만, 역시나 직접 마주한 그는 달랐다.
스륵.
구대염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적이 있긴 했지.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던 어린 시절이.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 막연한 이상을 좇기엔.”
“…….”
“강호의 장로급 인사의 목을 가져오너라.”
“……!”
설휘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그의 대답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 날의 객기라 할지라도 비빌 언덕을 보고 눕는 법이다. 네가 말한 낭만도 명분이 중요한 법.”
“…….”
“언제고 다른 이들이 왜 사제자와 손을 잡았는지 물어보면, 낭만 때문이라는 이런 말로는 납득해 주지 않을 게야. 날 원한다면 내 체면도 세워 줘야지.”
“……어르신.”
순간 설휘는 가슴이 뛰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역시 낭만이란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글귀.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겠습니까?>
▶ 화산파 구종명
▷ 무당파 장로
▷ 소림사 장로
“……!”
설휘는 느꼈다.
왜 비밀무사의 내용에 강호의 고수 암살이 있었는지. 흑마전주를 설득하는 데 왜 그런 게 필요했는지.
그것은 명분이자 힘이었다.
한 세력을 영입하기 위해선, 그만한 명분과 실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화산파 구종명.’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름.
이번 생에도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이렇게?
설휘는 더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화산파 구종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차피 그와의 악연은 이제 끊어내야 했다. 자신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선택하자.
“구종명? 화산파 장로?”
구대염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명실공히 정파의 위험수위 1급의 인물. 그런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예. 맞습니다. 일제자와 협력 관계에 있는 화산파 장로이지요.”
“일제자?”
무슨 뜻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설휘는 화산파와 관련된 얘기를 털어놓았다.
태황각주와 연계되어 있고, 그와 협력하여 차후 일제자가 중원 침공의 구실로 삼을 거라는 것.
물론 실패했을 때는 자신의 치적을 더 넓힐 도구로 활용한다는 것까지.
“이거…… 생각보다 많이 준비하셨나 보구나.”
구대염은 흥미를 보였다.
사제자의 준비성도 그렇지만, 일제자의 판세를 읽는 행동. 권력투쟁이 생각보다 심화되고 있다는 걸 감지한 듯 보였다.
“좋다. 그렇다면 구종명의 목을 가져오게나. 나는 그날로 사제자 지지를 천명하겠다.”
그의 승낙이 떨어지자 설휘는 예를 표했다.
이제 남겨진 마지막 산.
구종명의 목숨에 설휘, 그리고 사제자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
“들어오너라.”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설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곤마는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사이 상당히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느냐?”
설휘는 곧장 대답했다.
“조건부로 승낙하셨습니다.”
“조건부?”
미묘하게 얼굴이 굳어지는 곤마.
역시나 조건부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예. 화산파 장로인 구종명의 목을 치면 우리 쪽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구종명이라면…… 네가 말한, 화산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곤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구종명은 실로 제압하기 어려운 화경의 고수다.
더욱이 그를 위시하는 화산파 장로급 인물들 역시 한두 명이 아닐 터.
설휘의 능력으로 가능할지 걱정이 앞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설휘의 말에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에겐 설휘뿐만 아니라 은거고수들도 있다.
특히 천미려가 간다면 그보다 더 위험한 인물들의 목도 베어 올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승낙할지 미지수지만, 이미 도움을 주기로 한 이상 뒷짐 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설휘의 말에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대를 통해 태황각주의 뒤를 밟는 건 자제해 주십시오.”
“그걸 어떻게……?!”
곤마는 당황했다.
자신이 계획하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냥 주군의 생각을 한번 예상해 봤습니다. 여지도를 가지고 있던 태황각주이니, 그의 뒤를 밟아 화산파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 않으실까 하고…….”
“네 말이 맞다. 그럴 생각이었다.”
곤마는 순순히 인정했지만, 설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을 기준으로 대략 일 년 반쯤.
추격대를 이용해 태황각주 뒤를 밟게 된다.
그러다 발각되어 화골산으로 흔적을 숨기지만, 그로 인해 태황각주가 이곳을 찾아오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태황각주의 뒤는 제가 밟겠습니다. 마침 그가 움직일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설휘는 자신이 직접 태황각주의 뒤를 밟고, 그와 만날 구종명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되면 한 번에 현장을 덮칠 수 있을 터.
“알겠다. 그리하지.”
곤마가 승낙하자 설휘는 예를 표하고 뒤돌아섰다.
목적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고맙다.”
“…….”
“정말 고맙다, 설휘.”
뒤돌아선 그에게로 들려오는 곤마의 목소리.
설휘는 그의 진심이 느껴져 다시금 뒤돌아 예를 표했다.
곤마와 자신이 사는 길.
바로 구종명의 목에 달려 있었다.
***
설휘는 거처로 돌아가지 않았다. 천미려를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굳이 그리하지는 않았다.
이 싸움.
천미려의 개입 없이 할 생각이었다.
분명 그녀는 강한 전력이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꼭 좋게 흘러갈 거라 장담을 하긴 힘들었다.
‘이 건은 내 힘으로 해결한다.’
설휘는 한적한 공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구종명을 상대하기 위해선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극마에 오르는 일.
하단전과 중단전을 순환하여, 개안한 상단전으로 합일시키는 일만 남았다.
‘마공이 될지, 아님 정종무공이 될지.’
이제껏 시간을 늦췄던 설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이 자연에 감화하는 방법이라면 화공이든 빙공이든, 아님 마공이든 무엇이든 좋았다.
그간의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 녹여질지는 자신도 몰랐으니까.
쉬이이이.
조용히 서있던 설휘의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큰 고통은 없었고, 그저 백회혈에 새하얗게 빛이 일렁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깨달음의 벽을 뚫었음에도 이전과 다른 형태의 변화가 일어났다.
신체가 조금 커졌음에도 아무런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환골탈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