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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244화 (245/379)

244화. 잠행 (1)

설휘는 거처로 돌아왔다. 일전을 대비한 마지막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네요. 언제든 오를 수 있는 거였어.”

마중 나와 있던 천미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설휘의 변화를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

“제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건지 아시겠습니까?”

설휘 역시 궁금했다.

분명 극마에 오르긴 했는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변화가 있었다.

고통 없는 환골탈태도 그랬지만, 멀리 떨어진 곳의 벌레 소리까지 들리던 예민한 청각과 그 외의 다양한 감각적인 고양도 그때보다는 조금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옛사람들은 무공의 쓰임에 따라 경지를 나누는 걸 좋아했어요. 정종무공을 쓰는 무인들은 천지의 기운인 삼화(三化)와 오기(五氣)를 두른 자를 조화경(造化境)이라고 했죠.”

삼화취정과 오기조원.

그것을 입에 담는 천미려였다.

“그때쯤 본교의 사람들도 마공에 경지를 두기 시작했죠. 수법은 같았어요. 하늘의 기운을 두르고 오기를 근원으로 이룬 자. 다만 그 과정에서 마공의 성질, 거칠고 표독스러운 본성이 나타났죠. 나중에는 그 마기를 다스릴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경지를 나누었어요. 그것이 극마의 시초였죠.”

“흠…….”

“당신은 마공의 힘과 정종무공의 힘을 고루 갖추고 있어요. 정종무공을 익힌 자는 화경으로 볼 것이며, 본교의 사람들은 극마로 볼 것이에요.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룬 상태. 설휘 님은 그런 상황이에요.”

화경인 동시에 극마.

그 말에 설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경지를 나누는 것은 인간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 또한 인간. 마공을 쓰면 극마고, 정종무공을 쓰면 화경이다.

“심지어 그 수준도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 극마로 치면 통달이며, 화경으로 치면 기신(氣神). 백맥(百脈)을 유통(流通)시킬 경지예요.”

천미려가 거기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한 계단을 더 나가게 되면 광신(光神)이 될 것이고, 본교의 입장으로서는 극마의 마지막 단계까지 오를 수 있을 거예요.”

“아…….”

설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경지를 단번에 짚어내는 것에 대한 놀람.

또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운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빙정. 수많은 눈송이들이 흐릿하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반짝. 반짝.

‘대체 이 여인은…….’

신비하고 신묘했다.

설휘는 경지가 상승하고서도 그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설휘 님. 천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흠칫!

설휘는 놀랐다.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천마의 존재가 거론된 것이다.

“자연의 조화를 보는 눈을 가지셔야 해요. 극마. 정종무인들이 화경이라 부르는 경지는, 자신의 몸을 천지에 합일시키는 과정을 거치죠. 하지만 탈마, 현경에 해당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자연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쉽게 말해 허공섭물 같은 현상을 나를 중심으로 백 장 이상 조절할 수 있어야…….”

“천미려 님.”

설휘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잠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설명을 이어가던 천미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대체 어디를 보고 계신 겁니까?”

“…….”

“혹 탈마를 경험해 보신 겁니까?”

스륵.

설휘의 말에 천미려는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맞추며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요. 제가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요?”

“천미려 님.”

“그보다…… 설득하셨나요?”

“……네.”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말투에, 설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간 일어났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훌륭하네요.”

천미려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거기엔 거짓이나 부정적인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아름다움과 친밀한 표정만 보일 뿐.

그렇게 잠깐 침묵이 흘렀을 때.

“설휘 님, 저의 존재가 많이 궁금하시죠?”

한걸음 다가오던 천미려가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설휘가 어색해하며 대답하지 못하자.

“미안하지만, 모든 걸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다만, 지금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

“전 설휘 님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도울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곧.”

그리고 한번 웃어 보인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대는 참…… 비밀이 많은 사람이구려.’

설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것이 시스템 안에 있는 일이라면, 그녀의 존재 또한 모두 계산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발언이나 행동들은 왠지 모르게 시스템이란 굴레 속에서도 이질감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런 직감, 혹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설휘는 조용히 예를 차렸다.

지금 당장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는 것도 꺼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화산파의 구종명.’

일단 본인의 무위를 올려놓고 난 뒤, 설휘는 표적 암살에 관한 전략을 세웠다.

처음에는 태황각주의 뒤를 밟아, 틈을 보아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그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었다.

바로 귀환.

‘본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설휘는 원래 태황각의 비객조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시스템의 존재를 겪게 되고, 여지도를 발견해서 곤마에게 건네며 한 조직과 수하들을 받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예전 일이었다.

어쨌든 이번 삶에서, 그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시기상 태황각주는 아직 자신이 관여된 것을 모를 것이고, 태황각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변화를 겪고 어떤 위치에 섰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러니 조용히 작은 임무 하나를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온 척하면 아무도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터.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설휘가 갑자기 사제자 곤마에게 소속되어 극마고수로 나타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태황각 북쪽의 작은 집역소(集役所).

‘이곳이 내가 생활했던 곳이지.’

남루하고 익숙한 건물 앞에 서니 기분이 묘했다. 이곳은 과거 자신이 수하들과 함께 묵었던 곳이다.

끼이익.

한참을 감회에 빠져 있던 설휘 앞에서,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오다가 멈칫했다.

“어? 분대장……님?”

익숙한 얼굴. 각지고 수염이 덥수룩한 녀석의 이름은 주명이었다.

“그래. 잘 있었느냐.”

“어, 정말 분대장님입니까?”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 있더니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그간 어디 가 계셨습니까? 저희가 한참을 찾았는데도 통 보이질 않으시더니…….”

“일이 좀 있었다. 윗분들 뒤치다꺼리하는 데 갑자기 붙잡혀가서…….”

“아이고, 그러셨군요.”

“말도 마라.”

설휘는 천연덕스럽게 한숨을 쉬며 고생한 티를 팍팍 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그래. 한동안 부재중이었는데, 그간 나에 대해서 누가 뭐라 한 적은 없느냐?”

“예? 음…….”

설휘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주명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황각주께서 몇 번 찾으셨지만, 안 계시다고 했더니 그 뒤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 더는 없고?”

“아, 그리고 흑월대장이 몇 번 찾아왔습니다.”

주명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한마디를 더했다.

“분대장님 오시면 바로 데리고 오라고……. 그런데 표정이 좀 좋지 않으셨습니다.”

“아…… 또 깨지겠구만.”

설휘는 낙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별것 아닌 듯 괜스레 투덜거렸다.

“윗분들은 도무지 우리 입장을 봐주질 않으신다니까? 갑자기 불러다가 일 시켜놓고, 중간에 말씀도 해주지 않으시니. 뭐, 보나 마나 인수인계 문제겠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주명이 공감한다는 듯 측은한 얼굴로 보았다.

그가 보기에 설휘는, 자신과 같이 언제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말단. 태황각의 인원이었다.

툭툭.

“그럼 수고해라. 복귀 신고는 내가 태황각주님께 직접 할 테니까. 너까지 올 필요는 없고.”

설휘는 그렇게 주명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뭐, 그러면 저야 좋죠. 고생하십쇼.”

“그래. 흑월대장이…… 아직 적명이지?”

“예. 그렇습니다.”

끄덕하던 주명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너도 고생해라.”

이윽고 몸을 돌리는 설휘. 어째 그 모습이.

‘뭐야. 왜 웃는 거지?’

이상하게 소름이 쫙 끼쳤던 것이다.

***

태황각주의 시선에 약간의 당혹감이 서렸다.

자신을 보러온 자가, 놀랍게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설휘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문 앞에서 예를 갖추는 설휘.

그를 보면서도 태황각주의 미간은 여전히 좁혀져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매우 중요했던 여지도가 사라진 뒤, 그것과 함께 자취를 감췄던 인물이 설휘였다.

그런 그가 지금 왜 나타난 건지에 대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던 중 태황각주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저를 찾고 계시다기에 이리 발문을 했습니다.”

“찾고는 있었지.”

자리에 앉아 있던 태황각주의 시선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설휘는 과거에 그가 지시했던 대로 부복한 채로 조용히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렇게 침묵하던 중, 태황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 어디에 있었느냐?”

“사제자께서 가끔 머무시던 서고 지하에 있었습니다.”

“천일관?”

“예.”

“거긴, 왜?”

“곤마 님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천일관을 맡고 싶어 갔다가, 제 의중을 알아보시곤 도움을 주셨습니다.”

“음.”

그는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미 설휘의 대답에 숨겨진 의미, 그리고 이곳에 온 의도가 드러나고 있었다.

사제자와 여지도, 그리고 천일관.

대놓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거 재밌군.”

드르륵.

태황각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설휘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쯤 설휘는 얼굴을 들어 그런 그를 바라봤다.

과거에는 이렇게 마주치기도 어려운 상대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거의 지척까지 다다르는데도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갑자기 도망간 놈이 나타난 것도 그렇고, 하필이면 사제자 밑으로 간 것도 그렇고.”

얼굴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태황각주.

그런 그를 보면서 설휘는 속으로 궁금해했다.

‘과연 나의 수준을 알아볼까?’

극마에 올라 기를 갈무리하는 걸 넘어, 범인이 볼 수 없는 심연까지 내공을 숨겨놓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것 역시 설휘의 생각일 뿐. 정말 실전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 첩자지?”

‘이런!’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상황을 알아챘단 말인가!

“컥!”

단숨에 그의 손에 목이 붙들린 설휘.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태황각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운을 흘려본다.’

상대가 다른 손으로 가슴 부위의 혈자리를 짚었다.

본래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선 명문혈을 통해 기를 흘려봐야 하지만, 무공을 익혔는지 정도를 알기 위해선 간단한 혈자리로도 측정이 가능했다.

‘상대는 알아채지 못했어.’

설휘는 그 상황에서 빠르게 단전의 흐름을 늦췄다.

모든 경혈 자리를 침범하지 못하게, 임독맥을 뚫지 못한 이류와 일류 사이의 수준으로 보이도록 상대의 기운을 한곳으로 유도한 것이다.

그로 인해 거친 태황각주의 화온마공이 내부를 훑어지나 감에도, 임독맥을 뚫고 지나가지는 못했다.

“뭐, 무공은 익히지 못한 모양이군.”

결국, 태황각주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다.

광활하고도 드넓은 바다를 보지 못하고 겨우 냇가에 흐르는 물줄기만을 더듬은 것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황각주보다 더 거칠게 진입하는 내기라도, 단전을 미로처럼 변화시키거나 철문처럼 변화시켜 접근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었다.

설휘는 이미 그만한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재밌는 일이 떠올랐다.”

그 순간, 태황각주는 피식 웃어 보였다.

“조만간 혜원(惠遠) 지역의 초원에서 정파 연맹의 회합자리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 어떤 인물이 있는지, 지형을 어떠한지를 살핀 후 흑월대에게 정보를 넘겨라.”

“…….”

“어떠냐, 하겠느냐?”

“하……겠습……다.”

투욱.

그 말을 끝으로 태황각주가 손을 놓았고, 설휘는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그는 설휘를 보며 만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그를 통해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보였다.

‘위치가 바뀌었구나.’

설휘는 생각했다.

과거에는 난주 접경지 지역이었다. 이제 보니 회합장소는 다른 곳으로 변경된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설휘는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예를 표했다.

그 말에 태황각주의 눈초리가 매서워졌고.

“저를 흑월대에 넣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시금 묘한 시선으로 변했다.

“왜?”

“그동안 천일관에서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이제는 명예스러운 태황각 출신이 되고 싶습니다.”

“허.”

뜻밖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황각주.

그는 또다시 미묘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내 흔쾌히 수락했다.

“뭐, 그렇게 해라.”

사실, 설휘가 태황각에 접근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일제자 휘하에 있는 태황각. 그곳 출신의 무사가 구종명을 죽인다.

그리 하면 흑마전주를 설득할 수 있는 전리품을 챙기는 동시에, 놈들이 화산파와 완전히 결별하게 만드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적명 놈과 오랜만에 만나겠군.’

오랜 친우처럼 편한 상대도 있으니 즐겁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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