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잠행 (3)
그날 밤.
설휘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화산파 절대고수 구종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 남은 목숨은 백여 개.
몇 번 실패하더라도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여분의 기회가 있었다.
정작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한 진짜 이유는 바로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소령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찌 보면 첫사랑.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이러다 말겠거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일 년 뒤,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던 날.’
그때 그녀가 보인 눈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거기엔 설레는 마음과 기분 좋은 떨림과 포근함이 함께 있었다. 행복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일 테지.
목숨 건 전장에서 잠깐이나마 목을 축일 수 있는 쉼터. 이제껏 계속 반복되는 저주 속에서도 목적을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니까.
태황각이라는 옛 장소에 와서인지, 오늘따라 그녀가 더 보고 싶어졌다.
‘시기상 사령대장이 뽑혔을 거야. 지금은 수련 중일 테고…….’
그가 알기로, 앞으로 1년이 지나면 곤마는 공석이던 사령대장에 사람을 뽑는다.
과거 설휘 본인의 자리였던 그곳을 누군가가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령조장 중 한 명이 사령대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설휘가 나타나기 전에는, 누가 적임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어찌해야 하나.’
설휘는 마음이 복잡했다. 소령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를 바꿀 힘이 없는 상황에서, 괜히 그녀를 보았다간 마음만 심란해질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그녀를 보고 아쉬움을 달래느냐, 아님 감정을 묻어두고 나아가느냐.
어느 것도 쉽게 결정할 수 없던 그때였다.
<‘에피소드’를 보시겠습니까? 승낙/거부>
‘이건!’
갑자기 나타난 글귀에 설휘는 직감했다.
이 현상, 과거에도 본 적이 있었다.
사령대 조장들과 어울리던 그때, 당시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보여준 것.
다른 말로 ‘시스템’이 안배해놓은 얘기라는 것이다.
‘음.’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승낙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겪는 모든 일들도 ‘시스템’에 의한 것일 테니.
사아아아-
그래서 승낙했더니, 이내 어둠이 생기더니 다시금 주변이 밝아졌다.
뜻을 모를 글귀와 함께.
[Part 6. 태황각주의 속내]
밀실로 보이는 곳에는 세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천장에 뚫린 눈으로 한 명, 한 명을 둘러보는 듯한 시야.
설휘에겐 모두 낯익은 인물이었다.
일제자 살마, 그의 옆에는 극마고수 향개.
그리고 맞은편에는 태황각주가 있었다.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살마가 입을 열었다.
처음 운을 뗀 건지, 아님 대화중에 자신이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 아직 일부이긴 하나, 그래도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약속 이행이 느려지면, 이번엔 장로급에서 직접 문제를 제기할 거라고 합니다.”
질문을 받은 자는 태황각주가 아닌 옆에 있던 향개였다.
사면이 꽉 막힌 공간 때문인지, 아니면 주제 때문인지 분위기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본교의 상황이 변했다는 걸 설명해주지 않았나?”
“하였습니다만 잘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간 오랜 적대관계였던 터라. 다만 다행스러운 점은…….”
살마가 슬쩍 시선을 올리자 향개가 말을 이었다.
“구종명은 여전히 우리 편을 들고 있다는 겁니다. 화산파 내 그의 발언권이 강한 이상,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런데 참 특이한 놈이야, 정파 장로답지 않게 야심이 커.”
“일전에 한번 본교를 방문한 것이 좋게 작용한 모양입니다. 서로에게 나쁠 게 없으니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데리고 온 적이 있다고?’
설휘는 귀를 의심했다.
저들의 얘기를 조합해 보면 화산파는 이미 불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구종명은 이미 본교에 들러서 내부 사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갔다.
‘그럼 그때도…….’
설휘는 옛 과거에 그와 마주쳤던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기억에서 지웠다.
본교로 들어왔다 해도 시기상 맞지 않았다. 자신이 본 건 훨씬 더 이후였으니.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쾅!
때마침 태황각주가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그 모습을 보던 살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거기다 대계를 이 정도로 진행시킨 공적이 있으니, 너무 괘념치 말아라.”
설휘에겐 살마의 행동이 조금 놀라웠다.
아마도 여지도 일을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에게 이런 인자한 모습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대책은 세워봤느냐?”
화제가 돌아갔다. 대책이란 말에 태황각주가 즉각 대답했다.
“예. 이번에 정파회합 때 우리 쪽 무사들을 보내려고 합니다.”
“괜찮으냐? 아직 여지도를 가져간 놈을 찾지 못했는데도?”
“그래서 더욱입니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그들에게 성의를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다른 놈들, 아니 곤마의 움직임은?”
살마가 고개를 돌려 향개에게 물었다.
“아직 없습니다.”
“음.”
살마는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의 질문으로 보아, 여지도는 사제자가 가져갔을 거라고 의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미 넘어간 폭탄이 1년 넘게 잠잠하다는 게 더욱 꺼림칙한 것이었다.
“인원은 어느 정도로 정했나?”
살마가 태황각주에게 물었다.
“육십 명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되겠나?
“아직 보는 눈이 많습니다. 너무 많은 숫자는 흔적을 남길 수도 있으니…….”
“하긴. 그렇겠지.”
살마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흑토대와 흑일대를 보낼 생각이지?”
“흑토대와 흑월대로 정했습니다.”
“흑월대? 굳이 그들까지 소모할 필요가 있는가?”
“재미난 놈이 그곳에 들어가서 말입니다.”
“재미난 놈?”
그 말에 태황각주가 잠깐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여지도를 가져갔을 걸로 의심되는 녀석이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천일관에서 사라진 걸 보면 사제자 밑으로 갔을 거라 했던 녀석 말인가.”
“그 녀석이 일 년 만에 나타났습니다.”
“뭐?!”
살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순간적으로 태황각주의 의도를 읽은 것이다.
“그럼 그 아이가 지금 머무르는 곳이?”
“흑월대입니다.”
“묘수로군.”
그 말에 살마가 표정을 풀었다. 밀실 안에서 처음 보는 밝은 표정이었다.
“사제자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인물. 그놈을 이참에 치워버리면, 혹시 모를 변수를 줄일 수도 있고 곤마에 대한 경고도 될 거다.”
“그렇게 구상하고 있습니다.”
“다만, 보조하는 인원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는 건데…….”
“그 부분은 향개 님께 도움을 구하겠습니다.”
살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오래 앓던 이빨이 빠진 그런 모습이었다.
“일을 할 거면 제대로 이행하게. 향개도 적극 지원해 주고. 이번엔 화산파뿐만 아니라 무당파와 소림도 참가하니, 구종명의 기를 확실히 살려두란 말일세.”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다시 어두워졌고, 시야가 밝아졌을 때는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드르륵.
설휘가 따로 문을 열어주진 않았다.
상대가 스스로 방문을 열고 직접 들어왔으니까.
“야. 나와라.”
놈들은 설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한마디 던지고 뒤돌아섰다.
딱 봐도 겁박을 하려는 분위기였다.
저벅저벅.
설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한밤중이라 사위는 어둑어둑했고, 건물을 나가고 얼마 가지 않아 공터가 나왔다.
가운데는 모닥불이 붙여져 있었고, 주변에는 꽤 많은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딱히 도복을 입지 않아도 흑월대원들이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마치 심문을 위해 나온 사람들처럼, 모두의 눈길이 설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서 으르렁거렸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적명이었다. 잔뜩 가시가 돋친 물음이라, 설휘는 반문했다.
“뭐가 말입니까?”
“뭐가 뭐라니! 신비랑 님과 아는 사이냐고 지금 묻는 거잖아.”
옆에 있던 칙산이란 녀석이 끼어들었다.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랑. 아마도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이 보기에는 분란이 일어나서 설휘가 죽거나 초주검이 되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조치도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뭐, 알면 안다고 하는 사이 정도?”
“뭐?! 이 새끼가. 지금 대장님의 말이 우스워 보여?”
칙산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달려 나왔다. 제 딴에는 기습적인 공격이었을지 몰라도, 설휘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퍼억!
설휘의 발이 가볍게 움직였고, 달려온 그는 그대로 몸이 부웅 떠올랐다.
쿵. 데굴데굴.
그리고 몇 바퀴를 구르며 저 멀리 나뒹굴었다.
“방금 뭔가 지나갔나.”
“이 새끼가!”
설휘가 못 본 척을 하자, 또다시 한 명이 뛰어나왔다. 이번엔 칙산과 달리 지근거리에서 곧장 주먹을 날렸다.
퍼억!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슬쩍 옆으로 피한 설휘가 다리를 걸었고, 이어 그대로 자빠진 것이다.
“이놈이!”
“쳐 죽일!”
그 모습에 이번엔 서너 명이 일제히 격분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던 그때.
“그만!”
적명이 소리쳤다.
그는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그러고는 설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설휘.”
“말씀하시지요.”
“너는 어느 쪽이냐?”
“……?”
“어느 줄을 타고 내려온 거냔 말이다. 지난 일 년간, 어디서 누굴 만나고 왔지?”
적명은 신중했다. 나름 대장질을 하는 놈답게.
조금 전 보인 무위와 계속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설휘가 둔 뒷배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스윽.
설휘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흑월대는 다들 진지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느 놈은 적명의 눈에 들기 위해.
어느 놈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하여.
그리고 어떤 놈은 그냥 조직적인 생활 때문에.
예전에는 전혀 살피지 못했던, 자잘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설휘에게 와닿았다.
‘아마도…… 모두 죽겠지.’
이번 삶에서의 갈림길.
그 선택으로 인해 설휘의 미래뿐만 아니라, 이들의 미래까지도 달라졌다.
본래는 죽지 않을 놈들이, 혹은 나중에 죽을 놈들이 이번에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괴롭힘 때문에 몇 명은 죽어도 시원찮았지만, 지금의 설휘에게 그런 감정은 없었다.
적명과 칙산에 대한 울분은 이미 여러 번의 삶을 통해 모두 청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를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어느 줄이냐고 물었습니까?”
설휘는 적명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단언하는데, 황금줄은 아닙니다.”
“……뭐?”
“제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려드리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적명에게, 설휘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오늘내일 중으로 하나의 임무를 하나 맡게 될 겁니다. 본교에서 나가 몇 곳의 지형정보와 주변의 정세를 조사하고 오라는, 듣기에는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일 겁니다. 어떤 사람에겐 마치 휴가처럼 여겨질 겁니다.”
설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 자살 명령입니다. 이번 임무에 동원되는 흑월대는 거기서 모두 죽게 될 테니까.”
“……!”
“……!”
웅성웅성.
갑작스런 설휘의 말에 다들 소란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 하는 이들도 있었고, 갑자기 안색이 확 변하는 것이 설휘의 말에 생존의 촉이 움직인 듯한 자도 있었다.
“너 지금…….”
그중에서도 적명은, 쉽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묘하게도 그간 악연이 많았기 때문일까, 지금 설휘가 하는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태세를 바꿀 수도 없었다.
이 자리는 원래, 흑월대가 다들 모여서 설휘를 두들겨 패려던 자리였으니까.
그렇게 적명이 체면과 직감, 그 두 가지를 사이에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부각주께서 오셨습니다!”
멀리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각주?”
“이 야밤에?”
다들 당황한 얼굴로 변했고, 적명 역시 혼란스러워하자.
“딱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지금 말해.”
설휘의 말이 짧아졌다. 그의 기세가 변했다.
스르륵.
몸에서 스산한 투기를 흘리며, 그는 주변의 모두를 보며 말했다.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