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판단의 가치 (1)
쏴아아.
처얼썩. 철썩.
너른 강물 위에 수많은 호선이 이어졌다. 사람을 가득 싣고 나루를 건너고 있는 여러 척의 선박들.
지난 닷새간 부단히 강행군을 해 온 이들은, 얼굴에 피로를 가득 담고 있었다.
목적지는 새외의 혜원(惠遠)리 인근.
고산지역의 높은 초원이다. 근처에 그나마 마을 하나가 있어 대충 그 정도로 불렸다.
풍광이 좋고 위치상 청해고원과 이어져 있기도 해서 이곳을 찾는 유람객이 제법 있는, 나름의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하선! 하선! 다들 정신 차려라!”
나루터에 도착하자마자, 통솔자인 부각주 마가횡(魔加橫)이 목청을 높였다.
시각은 야심한 밤. 강가의 습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도 제법 크게 울렸다.
“들어라! 이번 임무는 극비다! 우리들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몰라야 한다! 하여 제군들은 오직 밤에만 활동할 것이고, 이 주변 지리와 정파회합에 참석한 인물 파악만 되면 본교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외침이 계속 이어졌다.
“만약 임무 중! 정파 놈들에게 발각되거나 추적이 붙는다면! 최선을 다해 떨쳐내되 여의치 않으면 자결해라! 다시 말하지만 이번 임무는 극비다! 본교는 이번 일에 관여한 적이 없는 것이고, 임무 중에 우리는 소속이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여건이 열악하다고 혹여 이탈자들이 생기면! 나는 가차 없이 베겠다! 명심해라!”
“…….”
“…….”
강행군으로 심신이 지친 대원들이, 마가횡의 목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살기가 슬슬 피어오르는 것이, 어떤 반문도 받지 않겠다는 투였으니까.
“가자! 임무는 지금 이 순간부터다!”
휘익!
슉. 슈슉.
마가횡이 먼저 몸을 날리고, 곧 누구 할 것 없이 가까운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방법은 각기 달랐다.
바사삭. 바사사삭.
우거진 숲으로 파고든 몇몇은 땅굴을 팠고, 몇몇은 높은 나무 위에 몸을 숨겼다.
사전에 미리 약속한 듯, 조심스레 주변을 탐색하러 나간 이들도 있었다.
인원이 흩어지고 소규모 조직으로 남자, 이번 임무에 대해 불평을 하는 대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장.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흑토대 대원 두 명이 흑토대장 일궐(日闕)에게 말했다.
“뭐가 말이냐?”
“정파회합 자리라면 꽤 고위직들이 직접 온다는 얘긴데……. 우리 수준으로 그들의 소속과 직위를 한 번에 알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지리 조사?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냥 개죽음당하라는 소리 아닙니까.”
“음.”
일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대원들의 말이 상식적으로 맞았다. 임무 투입 시에 받은 정보로는, 이번 정파회합의 참가자들은 최소 장로급들이었다.
자신들보다 무위가 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기감이나 관찰력 또한 대단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목표를 특정하려면 가까이 가야 하는데, 그 가운데 발각될 확률이 극히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발각되면 자결하라니.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건가.
“……할 수 없지. 명령은 명령이니까. 작전은 이미 진행되었고, 우리는 따라야 한다.”
일궐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도 내심 내키지 않았기에, 대원들의 노골적인 불평을 탓하지 않았다.
“좋게 생각하자. 어려운 임무이니, 그만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성공하면 이제껏 우리가 구경도 못하던 초상승의 무공이 하사될 거다.”
“아니, 그것도 살아야…….”
“시끄럽다! 정 못하겠다는 놈은 지금 말해라! 해 보기도 전에 실패하니 개죽음이니 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일궐의 노성에 수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부각주가 이탈자는 척결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이제 와서 못하겠다는 소리는 그냥 죽여 달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임무의 특성상, 많은 사상자가 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그저 천운에 걸고, 그 사상자가 자신이 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사삭. 사삭.
‘저놈들은……?’
한편, 기분 복잡한 일궐의 눈에 기민하게 한데 모인 자들이 보였다.
흑월대. 이미 땅을 파고 몸을 엄폐한 자신들과는 달리, 그들은 그저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심각하게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거 어찌해야 하는 건가?”
“언제 가야 해?”
설휘를 중심으로 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사전에 그가 했던 말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번 임무를 받고 내용을 듣자 혹여나 하던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었다.
이탈자는 죽음. 그러면서 임무는 막중. 애초에 왜 이런 곳에 자신들을 보냈는지, 상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침묵. 아직 근처에 감시자가 있을 거다.”
설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잠깐 둘러보고 올 테니 대기하고 있거라. 혹여 누군가 오면 최대한 몸을 숨기고. 내가 퇴로를 열면 너희들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강호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라.”
“자유…….”
“아!”
그의 말을 들은 대원 몇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보다 높은 경지를 꿈꾸며 인생을 갈아 넣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그저 꿈일 뿐 더 나은 미래 따위는 없다고 현실을 파악한 이들이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우리는 대천마신교의 교인들이다! 본교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설휘의 말에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마성. 눈가에 번들번들한 녹기는, 마교의 율법에 추호도 의심치 않고 충성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설휘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는 놈들이 있군.”
왜 본교에서 마공 적합자를 따로 나누는지 그 이유를 알 만한 상황이다. 머리가 있다면 이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임무라는 걸 알 텐데.
그럼에도 저런 맹목적인 충성이라니. 참으로 써먹기 좋은 패 아닌가. 윗사람들에겐.
“상황? 무슨 상황?”
“지금 우린, 이미 포위되어 있다.”
“뭐?!”
“헉……!”
극한의 긴장과 침묵이 퍼져나갔다.
당황한 사내들 사이로, 저게 무슨 말이냐는 시선이 오고 갔다.
‘흡…….’
특히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적명은, 온몸을 빠짝 땅에 숙일 정도였다.
“이탈하면 베겠다는 부각주의 말은 거짓이다. 우린 이미 낮 시간부터 저들의 경계를 넘어왔다. 나루를 건넜을 때부터는, 더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고.”
“그 무슨……. 천라지망이라도 펼쳤단 말이냐?”
끄덕.
누군가 던진 말에 설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찌 믿어! 윗분들이 우리를 그냥 죽이려고 보냈다는 말이냐! 왜, 그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듣다 못한 적명이 반응해왔다.
스멀스멀.
그의 전신에는 소름이 쫘악 돋아 있었다. 밑바닥에서 구르며 살다 생긴 본능적인 촉이, 설휘의 말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비록 자신들의 지위가 낮다고는 해도 엄연히 본교의 전력이고, 쓸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조직의 속성이다.
몸과 달리, 머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제물이지.”
“……?”
설휘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적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태황각주가 정파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우리를 내주고, 다른 것을 얻기로 거래를 한 거지.”
“……!”
“……!”
“……!”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눈을 부릅뜬 채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그럴 리가…….”
“왜…….”
다들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평생을 교단에 바쳤던 인생이다. 그런데, 노력에 대한 보상은 못 받을지언정.
누군가의 거래 물품으로 죽게 된다니.
“증명할 수 있겠나?”
너무나 억울했다. 적명이 설휘에게 물었다.
여기에 오면서 느꼈던 기묘한 불안감. 이제껏 자신을 여러 번 사지에서 벗어나게 한 촉이, 설휘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강건했던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궁금하면 따라와.”
“직접 보여줄 건가?”
그 말에 적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나름 날쌘 녀석들이 모이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
사박. 사박.
설휘가 숲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소리 없이 걷다가, 가끔 걸음을 멈추고 주먹 꽉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바사삭.
그때마다 조용히 뒤를 따라가던 대원들은 숨까지 참으며 꼼짝없이 몸을 숙였다.
지독한 긴장과 공포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의혹을 제기하는 대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대장. 저 녀석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립니다. 아까는 경황이 없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과합니다.”
“저 새끼를 믿으십니까? 어쩌면 우리를 적들에게 던져주려고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계속 따라가도 괜찮은 겁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좌절감이 그들을 부채질했다. 몸은 설휘를 따라가면서도, 놈들은 계속 적명에게 불안하다면서 지금이라도 빠지는 게 어떠냐고 속삭였다.
물론, 설휘는 그런 움직임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목옥을 향해 있었다.
‘이건.’
묘한 기시감. 뭔가 익숙했다.
과거 이 목옥 앞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여기다. 여기였구나.’
그에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왜 저러는 겁니까?”
“글쎄…….”
설휘가 목옥을 앞에 두고 정지했다. 당연히 적명과 수하들은 영문을 몰랐다.
스윽.
그리고 곧 설휘가 그 목옥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적명이 수하들을 이끌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씨발 것. 죽기밖에 더하겠냐?”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생활했던 흔적은 전혀 없었다.
버려진 지 꽤 오래된 듯한 집.
이상한 점은, 그런 것치고는 먼지가 거의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평소에 정기적으로 사람이 들르는 것처럼.
“어이. 무슨 일이지?”
적명이 설휘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글세……. 그냥 이 건물이 익숙해서.”
“무, 무슨 소리야! 증명하겠다고 했잖아! 설마 너, 여기에 온 이유가……?”
갑자기 적명이 경계하며 파들짝 물러섰다.
그 모습에 설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너 한 명 처리하려고 여기까지 와?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 했다. 여기는…….”
입을 열려던 설휘가 멈췄다.
“……여기는 뭐?”
적명이 되물었다. 설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혹여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던, 지문이 눈앞에 떠올랐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익숙한 글귀. 과거와 비슷한 현상이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은 어디서 튀어나오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종명급은 아닌데…….’
기감에 잡히는,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해 오는 인영.
고수이긴 했다. 하지만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스템이란 녀석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군.’
전혀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상황과 비슷한 것을 겪었다.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 별것 아닌 상대다. 싸움을 건다.
▷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
▷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전력으로 도망친다.
뒤이어 따라오는 선택지문.
“후…….”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에는 그저 당황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랐다.
공포도 불안도 없다. 있는 것은 자신감뿐.
▶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
<‘일단 대화로 풀어보자. 말을 건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거,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밤도 어두운데 얼굴이나 뵙시다.”
실로 뜬금없는 말.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이 돌아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내. 그는 허리에 검을 찬 채 싱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야 원, 이번 건수는 재미있는데?”
얼굴을 확인한 설휘는 상대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구명. 화산파 장로 구종명의 제자.’
과거에 한번 만났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