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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248화 (249/379)

248화. 판단의 가치 (2)

“너냐? 네가 알아본 거냐?”

이구명은 설휘에게 관심을 보였다.

갑자기 나타나서 묻는 그에게 흑월대의 당혹스런 시선이 이어졌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누구냐 묻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설휘는 담담히 상대의 말을 돌려주었다.

“쥐새끼…… 크크큭. 그래? 그럼.”

스르릉.

일부러 느긋하게, 검집에서 보란 듯이 검을 꺼내는 이구명.

예광(銳光)이 비치는 검신과 화려하게 수놓아진 검집, 척 봐도 보검이었다. 사내가 뿜어내는 기세는 대원들을 죄다 겁을 집어먹게 했다.

“그거 뽑으면, 처맞는다.”

허나, 설휘는 태도는 전혀 달랐다.

상대가 검을 다 뽑기 전에 경고했다.

“…….”

이구명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눈으로 설휘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입꼬리를 올리면서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캉!

이내 설휘의 검에 움직임이 막혔다.

적명의 목에 칼을 들이민 상태로.

“내가 말했지. 그러다 처맞는다고.”

“……!”

쾅!

설휘의 발길질에 이구명의 몸이 부웅 떴다.

그로 인해 벽이 통째로 뜯어졌고, 거기서도 오 장 이상을 날아가 버렸다.

“아…….”

“방금 무슨…….”

갑작스런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흑월대원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적명 역시 잠깐 넋이 나가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저승길 문턱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적명.”

“…….”

“적명!”

“예? 예! ……어?”

멈칫!

적명이 대답하다 말고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설휘에게 존대를 했다. 그걸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너는 지금 당장 위에 있는 수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라. 이 아래로 쭉 내려가다 보면 주변을 순시하는 놈들이 몇 있을 것이다. 절대 싸우지 말고 피해라. 그들이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려라. 어차피 너희 실력으로는 일격도 버티지 못할 테니까.”

“…….”

“뭐해? 안 가고.”

거듭된 채근에 적명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설휘.

1년간 모습을 감췄다가 나타난 녀석.

그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왜…….”

거기에 더해,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든 적명의 목이 울컥거렸다.

“난 한 번도 너에게 잘해준 적 없는데…….”

목숨을 구함받았다. 지금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지난번부터 그랬다. 언제든 자신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 설휘였다.

그런데 왜?

왜 그간의 시비와 원한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있는 것인가.

“병신 같은 녀석.”

피식.

설휘는 그런 적명을 보고 그저 웃었다.

“내가 널 위해 도와주는 거로 보여? 어차피 너나 나나 위에서 보면 다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야.”

“…….”

“우리 같은 삶은 누구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야지. 살 기회만 보이면 어떻게든 해야 한다. 옛날 일? 어차피 너도 살려고 날 깔아뭉갠 거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솔직히 말할까? 네가 죽든 살든 관심 없다. 다만, 지금 네가 이끌지 않으면 흑월대는 분명히 다 죽을 거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숨었는지 기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법도 잘 모르니까.”

“…….”

적명은 입을 다물었다.

설휘의 말은 사실이었다. 흑월대에서, 그나마 동급 부대원들 중에 쓸 만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도토리 키 재기다

고만고만한 인선 사이에서 적명이 아무리 으스대봤자, 태황각에서는 자신들을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했다.

따로 선별된 소수의 인물들이 아니라면, 언제든 버려질 것이 당연한 삼류로.

그러니 적명이 예전에 저질렀던 패악질 따위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살고 싶어서 몸부림친 놈이 긁은 것 따위, 연연해 봤자 뭐 하겠는가?

‘…….’

말을 알아들은 적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정이 복잡해졌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이내 저편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자.

“알겠다. 그리고…….”

그는 설휘를 보면서 짧게 읊조렸다.

“……이 빚은 꼭 갚겠다.”

그게 녀석의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는 말이었다.

놈은 그러고서는, 창문을 통해 수하들과 함께 재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설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부서진 벽 사이로 걸어 나갔다.

“크으으으.”

밖으로 나온 설휘는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는 이구명을 내려다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과거에는 감당 못 했던 실력자였다. 자신만 아니라 수하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자.

하지만 지금의 설휘에겐 그저 어린아이 수준에 불과했다. 언제든 팔을 비틀 수 있는.

“뭐야, 이거……. 이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충격 먹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구명.

아마도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했다.

“너, 아직도 상천장이란 놈과 어울려 다니냐?”

“뭐라고?”

“태황각주 호위무사. 그놈과 어울려 다니냐고.”

“……!”

가볍게 물어본 말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

“너, 대체 누구냐…….”

경악스런 얼굴, 그걸 어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다 알아. 너의 과거뿐만 아니라, 앞으로 네가 할 일들까지.”

설휘는 칼을 집어 들었다.

흑월대에서 하사한 볼품없는 검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모습에 이구명은 몸을 급히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챙!

검을 세워 막으려 하던 이구명의 검신을 잘라낸 설휘.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너는 쉽게 죽을 수 없다.”

투투툭.

단번에 몸의 혈도를 점해버렸다.

고작 한 수 만에 이구명은 움직일 수도 뭐라 말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구종명의 제자니까.”

풀썩.

몸이 굳은 채 천천히 쓰러지는 이구명.

설휘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놈들을 보낸 아래 방향이었다.

“그럼 흑월대가 잘 내려갈 수 있게…… 분탕질을 좀 쳐볼까?”

설휘는 놈을 건물 안으로 집어넣고 다시 나왔다.

기왕 손을 댄 김에 길을 뚫어줄 생각이었다.

처음 임무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냥 구종명의 목만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사람이 물건처럼 거래되고 소모되는 상황, 그게 기분에 거슬렸다.

과거에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거짓말처럼 멈춰진 어두운 시야.

설휘는 그것이 ‘시스템’의 농간이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Part 7. 정파 수뇌부의 모의]

또다시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이, 설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어둠이 내리깔린 밤. 상현달이 떠 있는 산속 돌담에 세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들 남루한 복장을 입고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중원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소림. 무당. 화산.

장문인을 제외하고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모인 것이었다.

“내 절경을 많이 보았지만, 신장(新疆)의 아름다움은 천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구려.”

운을 띤 노승의 법명은 혜초(慧草).

방장의 명을 받고 먼 길을 온, 소림을 대표하는 장로였다.

“산지와 평원, 소나무와 초원, 하곡과 호수. 모든 것을 품는 천당(天堂)이라 하더이다. 더욱이 세외의 서북지역과 물류교류까지 하니, 그 지역에서 요망한 단체들이 생겨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초로의 노인으로 보이는 이가 말을 받았다.

백발에 턱수염까지 하얗게 센 노인은 무당의 진무관주(眞武觀主). 서열 4위로, 이관 중 하나를 맡고 있는 신분이었다.

“언제고 중원의 발전이 이어지면, 이곳은 그 초석이 될 것입니다. 무지몽매한 이들이 모르는 게 안타깝습니다. 강호의 발전은 교류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그 말을 받은 인물은 구종명이었다.

“교류 좋지요. 그래서 그런 겁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노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소림의 장로가 뜬금없이 따져 묻자, 구종명은 손사래를 쳤다.

“허허.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괜히 시간 쓰지 맙시다. 이미 사정 다 알고 온 사람들인데, 여기까지 와서 가릴 게 있겠습니까?

이에 무당파 진무관주가 끼어들었다.

“근래에 일어난 화산파의 선동적 행동들. 특히 마교와의 교류는 개방이 이미 증명을 해줬습니다.”

다소 위협적인 말이었으나, 구종명은 담담했다.

“허허. 취걸 장로인가요? 아님 분개 장로인가요? 뭐, 개방에서 화산에 이리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본파에서 마교와 접촉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비축된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둘째, 마인들을 포획, 처단함으로써 강호에 퍼진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동기가 되며. 셋째, 그들이 쓰는 마공을 분석하여 놈들에 대한 대처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축된 힘이라는 것도 추측일 뿐, 숨기고 있는 저변의 힘을 알기는 힘들 것이외다. 마인들의 처단은 이제껏 화산파만 했던 일이며, 내놓은 마공서가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 말에 무당의 진문관주가 바로 반박했다.

“……본래 초대 선사께서도 선한 방향으로 소림을 이끌려고 하셨지만, 의도와 달리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 화산이 정조를 잃고 그들과 합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뒤이어 소림도 합세했다. 구종명은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과를 보이고자 여기에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모든 걸 생각해 놓은 사람처럼.

“그저 마교의 처단이라는 공과를 넘어, 놈들이 이곳에 모일 거란 사실을 알려드린 것은 본파이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요는 얼마나 진심이냐는 것이겠지요. 소림과 무당이 협조한다면, 제대로 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크음.”

“흠.”

소림과 무당은 여기서 침음을 삼켰다.

성과와 결과. 사실 이들이 이곳에 발걸음을 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고고한 척하기는.’

구종명의 눈빛은 차가웠다.

소림이고 무당이고, 말은 선인인 척 덕을 쌓는 척 주절거리지만, 실상은 실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다.

개방을 이용해 화산을 샅샅이 뒤진 것도, 이곳에 발걸음 한 것도 모두 자신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뭐, 일단은 네놈들의 행동에 어울려주지.’

구종명은 그런 그들의 태도를 욕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발톱을 감출 때다.

적절히 보상과 이득을 안겨다 주며, 훗날 대화산파의 영광이 올 날을 위해 몸을 사려야 했다.

그때였다.

타다닥.

돌담을 향해 누군가 달려왔는데, 구종명에겐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천라지망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장로님.”

“말해라.”

다급한 얼굴로 달려온 그에게, 구종명이 냉담하게 채근했다.

“갑자기 천라지망에 구멍이 생겼고, 그 틈을 통해 표적들이 다수 빠져나갔습니다.”

“……?!”

그 말에 구종명의 얼굴이 굳었다.

마교인의 목을 기다리던, 소림과 무당의 장로들의 얼굴도 굳었다.

***

팟!

순간적으로 시야가 환해졌다.

그리고 설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정파의 추격이 시작되는 절체절명의 상황.

어찌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하늘을 보니, 달의 위치가 자신이 기억했던 곳과 달라져 있었다.

기존보다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

아직 천라지망을 뚫어내지 않았는데 대원들이 밑으로 향하고 있을, 그런 상황인 것이다.

‘가야 해.’

설휘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는 것인가.

▶ 대원들을 구하러 간다.

- 정파 장로들을 놓치게 되며 수십 명의 흑월대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음.

▷ 정파 수뇌부를 제거하러 간다.

- 정파 장로들과 대결하게 되며 수십 명의 흑월대원의 목숨을 버려야 함.

두 개의 선택지문.

이 두 개의 선택지문은 설휘에게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십 명의 목숨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너는 어떤 가치를 먼저로 따질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 같았다.

마치 과거의 너를 구할 것이냐는 질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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