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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뮬레이션-249화 (250/379)

249화. 판단의 가치 (3)

두 선택지문 앞에 놓인 설휘는 여러모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흑마전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구파 장로의 목이 필요했다. 후자의 선택이 필연적이었다.

또한 이게 쉬운 일도 아닌 게, 세 명의 절대고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산파 구종명은 화경의 고수.

무당과 소림의 경우도 그에 못지않을 거다.

3대 1의 불리한 상황에서 적장들의 목을 날릴 수 있는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전자를 택해야 하는가.

‘아냐, 이건 그냥 날 시험하는 거야.’

설휘는 생각을 돌렸다.

그간의 경험상 이런 선택 유형의 의미를 그는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아니 사실은 이 상황에 필요 없어 보이는 선택지가 나왔다는 건.

다른 말로 분명 의미하는 바가 있다는 것.

대원들을 구하는 선택지문이 나왔다는 건, 곧 일어날 미래에 어쩌면 반드시 이와 관련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대원들을 구하러 간다.

▷ 정파 수뇌부를 제거하러 간다.

별 볼 일 없는 수십 명의 목숨이냐.

대의를 위한 한 사람의 마음이냐.

설휘는 왠지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이 선택의 최종 목적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가치를 물어보는 게 아닐까?’

너는 이 두 개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을 묻고 있는 듯했다.

둘 중 하나를 함으로써, 앞으로 마주해야 할 상황들이 달라질 거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했던 선택들. 이전에도 많이 했었지.’

설휘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저항한 적이 있었다. 바로 송화 구출 임무.

후에 그 녀석은 자신에게 많은 걸 알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 세계에 관해서도.

<‘대원들을 구하러 간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잠깐 고민하던 설휘는 더는 어느 선택이 옳은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잘못된 길이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현재 목숨의 여분이 지금 백 개가 넘지 않는가.

<대원들의 위치와 상황을 보여드립니다.>

선택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한데 엉킨 수하들이었다.

“크헉!”

“억!”

천라지망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설휘는 문구가 뜨자마자, 곧장 달려 나갔다.

이제껏 대원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환영이 이어지는…… 최상승 경공술이었다.

***

“크으으…….”

적명은 복부를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카악! 카악!

도처에는 비명이 이어지고 있었고, 몇 명은 목이 날아간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망할.’

시작은 좋았다.

적들이 쳐놓은 천라지망.

하지만 설휘의 말대로 순번을 정해 순시하는 놈들의 경계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기회를 잘 노린다면 전선은 충분히 뚫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문제는 수하들의 경공술이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박차고 이동했어야 하는데, 한 녀석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로 인해 상당히 큰 신음 소리를 냈다.

적들은 여기에 반응하여 순간적으로 강력한 경계태세로 임했고, 그러다가 나무 위에 있는 자신들까지 죄다 발각되었다.

“선발대!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

가장 뒤쪽에 위치했던 적명은, 앞쪽에 있는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적 숫자도 그렇고, 마침 경사가 가파른 탓에. 대원들 일부는 그들의 봉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중간부터였다.

“크윽!”

“컥!”

적지 않은 숫자가 몰려왔는데, 놀랍게도 그들 하나하나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기공 발현, 검풍 같은 현상을 넘어 검기를 쏘아내는 것을 봤을 때는 정말 기함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흑월대가 한 명씩 죽어가는 와중에도 적명은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제기랄.’

자신 따위는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사들.

힘의 격차가 어떤 건지,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 우물 안 개구리인지를 새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뭐야? 마인들이라더니…… 별 볼 일 없잖아.”

일행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청년.

그는 젊었다. 그럼에도 척 봐도 비범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씨발…… 좆같네.”

적명은 덜덜 떨리는 손발을 내려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상대에 비해 너무 나약한 자신을 보며 내뱉은 자조 섞인 한탄이었다.

“네가 대장이냐?”

컥!

크억!

비명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청년.

‘개같은…… 개같은……!’

적명은 속으로 흐느꼈다.

자신들에겐 생사를 거는 도전이었지만, 이들에겐 그저 사냥 놀이였다.

당장 칙산. 이제껏 자신을 따르던 무사는, 청년이 말을 걸어오는 사이에 정권 한 방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챙그랑!

“사, 살려주십쇼.”

적명은 검을 던지고 비굴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의 머릿속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수치와 굴욕? 그런 감정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한 상황에서야 드는 것이다.

너무도 까마득한 실력 차이에, 분노고 뭐고 없었다. 그저 살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살고 싶습니다. 살려 보내주시면 다시는 그대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적명은 빌었다.

살고 싶은 생각이 이처럼 강렬했던 건.

사실 억울했기 때문이다.

평생 강해지기 위해 수련했던, 그리고 명을 충실히 따랐던 자신의 삶을 이대로 마감하기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헌데.

“하. 마인들은 다들 이런가.”

“…….”

적명은 충혈된 두 눈을 들어 보였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청년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마기라고, 스치기만 해도 시신이 부패하는 절독으로 연마한 공포의 집단이라더니. 다 개소리였군. 이름도 없는 중소문파보다 못해.”

“…….”

“기생충 같은 놈. 애초에 하등한 존재로 태어난 놈이니 마교에 들어가겠지. 근데 말이야.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야.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에서 못 벗어나지.”

버러지.

대놓고 모욕을 주는 말도 적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고 싶다, 이대로는 억울하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할 뿐.

“난 말이야. 해로운 벌레는 꼭 죽이는 습관이 있거든. 갔던 길도 되돌아가 죽이는 정성을 보이는 사람이지. 이번에도 같아.”

무사는 전혀 듣지 않았고, 검을 세웠다.

그걸 보던 적명은 온몸을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커억!”

적명의 눈이 커졌다.

풀썩.

칼을 들고 살기를 뿜어내던 청년이 천천히 쓰러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익숙한 사내가 서 있었다.

“괜찮냐.”

설휘였다.

“…….”

상황을 보니, 그가 자신을 구한 듯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큭, 흐흐흐흑.”

적명이 울기 시작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온몸을 떨며 울어대고 있었다.

자신의 무능력을 보였다는, 처절하게 민낯이 드러나고 만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슬픔이었다.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다. 너 역시 더 좋은 기회가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 거니까.”

“흐흐흐흑…….”

머리를 처박고 그렇게 울어대던 적명은, 한순간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더니 머리를 처박은 채 말했다.

“편히 살 수 있을까?”

“…….”

“우리 같은…… 실패한 마인들이 중원에 가서 속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실패한 마인.

마공을 익혔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해, 본교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무인들.

적명은 다른 이들에게 주먹다짐을 할 위치까지 올라봤으나, 그건 고작 그들만의 세상일 뿐이었다.

중원에 가면 다들 죽여야 할 적이며, 강호를 좀 먹는 삼류 무사일 뿐이다.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설휘는 짧게 말했다.

사실 속에도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에게 작은 위로라도 할까 싶었다.

“미안한데……. 설휘, 난 자신 없다.”

“……?”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는 적명.

그의 얼굴에는 희열과 체념이라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너에게 진 빚은 지금 갚겠다. 다만 내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

“너라도 반드시 강해져서…… 힘없는 놈들. 애초에 실패한 인생을 사는 놈들에게 기회를 줬으면 한다. 아무런 저항도 못 하는 비참한 인생이…… 정말이지 그게 버티기가 힘들었다.”

“뭐?”

처억.

설휘가 반문을 하기도 전에 적명은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짧은 소회를 밝혔다.

“강해져라, 설휘.”

“아……?!”

촤아아악.

그것이 끝이었다.

적명 스스로 내리친 목은 휑한 바닥에 몇 번이나 구르며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

설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살고 싶어 했던 적명인데.

그런데 자신을 보고 죽음을 택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정말로 그가 겁냈던 건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사라져버린 희망이었을까.

분명 전생에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놈의 삶도, 다른 곳에서 보면 비참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 태황각이라는 좁은 세상에서 아득바득 구르고 있었을 뿐이니까.

“……?”

투욱.

적명의 베어진 목을 바라보던 설휘의 시선이 올라갔다.

누군가 그것을 집어든 걸 본 것이다.

“여긴 한 놈이 다냐?”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인상착의가 이 근처에 있던 무사들과 조금 달라 보았다.

뒤에 있는 십여 명의 무사들 복장도 그랬다.

훈련복처럼 보이는 갈색 도복을 입은 이들이 주인인 양 행색을 하고 있었다.

“이놈이 이리 소란을 피운 건가?”

타타타탓.

그리고 또다시 우측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십여 명.

이들은 척 봐도 어느 출신인지 알 수 있었다.

장삼을 입었다는 건 소림파란 뜻일 테니.

“어이, 현강(玄强). 마교놈 몇몇이 도망쳤다는데? 이거 어쩌자는 거야? 책임 어쩔 거냐고.”

갈색도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나와 말을 걸자, 장삼을 입은 녀석 중 한 명이 나와 답했다.

“그게 우리 책임인가? 오히려 순번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당파 때문이지.”

“순번을 못 지킨 게 아니라, 이쪽 경계를 게을리 한 너희들 책임 아냐?”

“어디 책임을 우리 쪽으로 넘겨?”

둘은 일면식이 있는 듯했다.

앞서 빠져나간 흑월대원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걸 보면.

“어? 모두 왜 여기 모여 있는 거야?”

설휘가 있는 그곳에 또다시 다른 일행이 나타났다.

남루한 도복이지만, 끝에 매화 모양이 수실로 된 모습은 척 봐도 화산파였다.

“이수(李秀). 저 녀석들이 공간을 줘서, 마교 녀석들 일부를 놓쳤다.”

“뭐라는 거야. 이수! 저 녀석들 때문이야. 순번 교체 때 방심해서 놓친 거라고!”

놈들은 항변하자, 이수란 불리는 녀석은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그만해. 알겠으니 그건 나중에 차차 처리하기로 하자고. 우선.”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아마도 각 파의 자존심 같은 힘겨루기를 넘어서는 서열이거나. 명망이 있는 듯 보였다.

“이놈은 누군데?”

그리고 그제야 설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장으로 보이는데?”

“마교놈?”

“그래.”

“다행이군. 우두머리 목은 귀하니까.”

갈등상황의 분위기가 정리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설휘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이수가 말했다.

“네 녀석이 수장인가 보군.”

설휘는 별 대답이 없었다.

이들이 떠들 때도. 누구의 책임인지 말할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시선은 이미 죽어버린 적명에게 향해 있었다.

‘적명. 결국, 힘이 없으면 어디서나 잡아먹히는 건 매한가지다.’

설휘는 그의 죽음을 통해 이 한 가지를 알았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

한때는 기연이라 생각했고, 또 한때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적명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한 번 더 깨달았다.

과거를 돌릴 수 있는 건 기회다.

그곳이 반복되는 지옥일지라도. 그게 기회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희망.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명에겐 그것이 없었다. 그러니 살고 싶다가도, 죽고 싶었던 것일 테니.

“이봐. 말하고 있잖아?”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거 아냐?”

“너무 쫄아서 그런 건가 보지. 크크크. 하하하.”

옆에서 떠드는 목소리에 설휘는 그제야 눈을 돌렸다.

세 명의 사내.

그리고 주변의 수십의 동료들.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이,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즐거운 듯 보였다.

“다 떠들었나?”

그럼 이제 가르쳐 줄 때다.

삶은. 강한 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그럼. 이제 시작하지.”

더 강한 자들을 만나면 얼마나 덧없는 건지도 함께 알려주니까.

“나약하다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 건지 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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