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추구하는 목표 (2)
“누군가 이 권력투쟁의 싸움 끝에 승리한다면, 그에겐 무엇이 남겠습니까?”
설휘는 먼저 물음을 던졌다.
왜 싸워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차피 권력을 쟁취하거나 이양받은 자들의 삶은 예전 그대로일 것이며, 주요 수뇌부들의 자리 역시 변하지 않을 겁니다. 늘 그래왔듯이. 전쟁 중 올렸던 공적의 순위에 따라 사람만 바뀔 뿐이지, 과거와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행히 구대염은 설휘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설휘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결국 이 전쟁은 병력을 가진 자, 지체 높으신 인물, 무력을 가진 사람들의 놀이일 뿐. 이겨야 할 명분도, 그리고 권력을 쟁취해야 할 이유도 없는 싸움입니다. 이제까지 흑마전주께서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닙니까?”
“…….”
구대염의 자세가 조금 느슨하게 변했다.
쓸데없는 얘기가 나오면 꾸짖으려 했던 그는, 이제 맞은편 사내의 생각이 궁금해지고 있었다.
“명분. 분명 필요하지요. 지금껏 흑마전주께서는 웬만한 명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제게는 구파 장로의 목쯤은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설휘는 자신의 목소리에 점점 힘을 실었다.
“감히 생각하건대, 전주께서 움직일 만한 명분이란 건, 다른 제자들에게 없는 것이어야 하며 오직 사제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제껏 다른 이들의 제의를 거절한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
눈에서 빛을 쏘는 듯한 구대염의 시선에, 설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금이 제일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여기 죽은 이 적명이란 자. 높으신 분들은 이자의 이름도, 부대도 거의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힘없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대장이었으니까요. 그는 누구보다 살고 싶어 했습니다. 태황각이 파견한 정파회합에서, 천라지망이 있는 걸 알자마자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으니까요.”
“…….”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스스로 목숨을 던졌습니다. 전주께서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순간 미간을 좁힌 구대염.
고민스런 시선을 잠시 내리는가 싶더니,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뭔가?”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당황한 눈빛. 아니, 구대염의 표정을 보면 조금 놀란 반응 쪽에 가까웠다.
이제껏 잊고 있었던 중요한 것을, 급히 생각해낸 사람처럼 말이다.
“바뀌지 않는 미래. 그건 밑바닥 인생에겐 지옥보다 더한 형벌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삶은 고통스런 법이지요.”
“…….”
“죽도록 노력한다면, 적어도 위로 오를 수 있기는 한 가느다란 밧줄 하나. 적어도 그 정도는 내려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권력투쟁의 승리자라면 말입니다.”
사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 오로지 이기는 것이 아닌, 마교를 바꾸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런 대의(大意)가 다른 제자들에게는 없기에, 결국 가장 큰 명분을 가진 것은 사제자 곤마라고.
설휘는 그렇게 말했다.
“흑마전주께 묻겠습니다. 이 적명이란 사내의 목,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자 했던 흑월대장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다른 제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쓸모없는 목을, 흑마전주께선 얼마나 쳐주시겠습니까?”
구대염은 말하지 않았지만 설휘는 느끼고 있었다.
본교를 대표하는 주력 무사들.
그런 그들을 이끄는 상관으로서, 수장으로서의 시선은.
그저 정점에 서서 지시를 내리는 천마 제자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구대염의 약간 짧은 웃음.
설휘는 순간 불안감이 들었다.
저 웃음은 결코 호의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로 값을 매기고 싶지 않군.”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설휘는 이유를 물었다.
“왜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세상은 본래 불공평하다. 누군가에겐 수많은 기회가 주어져도, 어떤 이에겐 주어지지 않는 게 이치지.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누구는 나쁜 짓을 일삼아도 백 살까지 부귀를 누리지. 그게 현실이건만,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 군.”
연륜 있는 자의 반박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부조리가 있지만, 그 부조리함 또한 세상의 일부다. 애초부터 불공평하다.
그걸 부정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다. 그리고 그런 눈뜬장님은 세상의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구대염은 말했다.
“억울한 사람은 어디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상기해야 하지. 본교는 힘의 논리가 가장 우선시되는 곳이다. 강자존. 그것이 본교의 정신이며 우리를 이끄는 힘이다.”
상대가 철벽을 쳤다. 그럼에도 설휘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치 이 정도의 발언은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럼 더더욱 전주께서는 저희 편을 들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뭐?”
“전주께서 강함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면 가장 평판이 낮은 곳에 들어갔을 때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가장 평판이 높은 곳에서가 좋겠습니까.”
“……”
“강함이란 것은 절대적인 수치적 정량을 재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를 했을 때 상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그보다 더 강한 자에 비하면 약한 법. 아무리 약한 자라도, 그보다 더 약한 자에 비하면 강한 법이지요.”
구대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역시나 말상대로는 만만치 않은 자.
한편으로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이번엔 구대염이 다시 입을 뗐다.
“장로의 목이 필요한 이유는 오로지 명분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전주들이 움직이는 최소 조건이다.”
그 말에 설휘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태도가 달라졌다. 적어도 지금 이 표현은 막무가내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꼭 구파의 장로일 필요는 없지만, 나름 명망이 있거나 강호에서 이름 좀 알린 자의 목이 필요하지.”
그 말에 설휘는 입을 열었다.
“화산파 장로 구종명의 제자라면 어떻겠습니까?”
“……?”
“이번에 사로잡은 녀석입니다. 본교의 일제자와 연관되어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호오.”
미묘한 표정을 짓는 구대염.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뒤,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한번 만나보지.”
***
‘성공한 걸까, 실패한 걸까.’
설휘는 아직 뭐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이구명을 쓰러뜨린 후 산 채로 잡아 온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화산파 구종명의 제자.
이 정도 이름이면, 흑마전주가 말한 정도의 수준에 차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
결국 최종 판단은 구대염이 내릴 테고, 그때가 되어봐야 알 수 있었다.
그보다 설휘는 구대염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원래 삶은 불공평한 것이다.’
상대를 설득시키기 위해 머리를 짜내 봤지만, 그가 내세운 대전제를 뭐라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수긍할 수도 없다.
그 불공평함을 그냥 인정하게 되면, 삶의 여러 부분이 부정당한다.
사제자는 원래 일제자를 넘어설 수 없고, 태황각이 하급 마인들을 정파에 팔아넘기든 말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설휘는 기분이 복잡했다.
삶은 불공평하지만, 희망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걸 말로 잘 내뱉지를 못했다.
그래서 답답했다.
구대염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한편으로는 그와 좀 더 대화하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배우고 싶었다.
“다녀오셨나요?”
거처로 돌아온 설휘를 맞이한 여인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방으로 들어오다, 천미려의 아름다움에 잠깐 취해버린 그였다.
“아, 여기 계셨습니까?”
설휘는 어색하게 대답한 후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천미려가 말했다.
“어떻게 되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설휘는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갑자기 후회가 막심했다.
답이 나와 있는 상황. 그냥 구파 장로의 목 하나만 들고 가면 되는 쉬운 선택을 걷어차 버렸다.
거기다 선택지도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걸 선택해버렸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적명에게 과하게 이입했다.
‘괜한 치기로 일을 그르친 건가.’
지금으로선 모르는 일이다.
그저 시스템이 정해주는 선택을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방향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고생하셨어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흑마전주를 설득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천미려.
잠깐 생각하고 있던 설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원하는 걸 안겨다 줬어도, 그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설휘는 그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의아한 듯 물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냥. 기분이 그렇다고 할까요.”
웃으며 넘어가는 말에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나름 자신을 위로하려 해주는 말이라 여겼다. 뭐,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흑마전주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그녀가 더 잘 알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가 중요해요.”
“…….”
“과거와 다르게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야 해요. 그렇게 변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끝은 정해질 뿐이니까요.”
천미려의 말에 설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씀하시는 것이 마치 제 미래를 들여다본 사람 같군요.”
“미래를 몰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도는 알고 있죠.”
“천 소저, 제 삶은 말입니다. 소저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뻔하고 쉬운 게 아닙니다.”
“…….”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는…… 삶과 죽음이 오가는 선택 사이에서, 최고의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설령 그 답이 마음에 안 들면, 비틀어서라도 말입니다.”
설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충고는 그쯤 해두세요.”
솔직히 짜증이 났다.
세상을 굽어보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은거하면서 유유자적 즐기는 삶을 살아온 그녀가, 자신이 어떤 삶을 겪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꽤 이어졌고, 설휘가 그녀를 거처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는 그때.
“플레이어의 삶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까요?”
“……!”
설휘의 몸이 멈췄다.
순간 잘못 들었나 생각할 만한 발언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시스템이 만들어준 삶이 아무리 정교하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정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 사람의 생각을 모두 정의할 수는 없죠.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요.”
“……당신…….”
“그러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허점이 발생하게 되기도 하죠. 누군가가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게 되거나, 혹은 알면서도 숨게 되거나.”
설휘는 눈에 경련이 일어난 듯했다.
세 번째였다.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
그녀는 시스템을 아는 세 번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은 나를 반은 알고 반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설휘 님이 나아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설휘는 말문이 막혔다. 뒤에 이어진 그녀의 말은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러니 조용히 때를 기다려요.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을 뒤흔들 때까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