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혈사전주가 내는 시험 (1)
“너도 따라 들어오너라.”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설휘는 시선을 들었다.
앞서 미리 들어간 곤마가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혈사전주를 설득하기 위해, 이번에는 곤마도 직접 몸을 움직였다.
“오셨습니까.”
접견실로 이동한 곤마와 설휘. 두 사람이 문 앞에 다가서자,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서 예를 표했다.
“그래. 혈사전주는 어디에 계신가?”
“혈강대(血强代)의 강의로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한 시진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데…… 혹 지금 불러들일까요?”
“아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왔는데, 그래서는 경우가 아니지. 수하들을 가르치는 일은 중요하니 기다릴 만하다. 교육이 끝나면 내게 알려다오.”
“알겠습니다.”
정중히 고개 숙이는 남자를 돌려보내고, 곤마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설휘가 넌지시 말을 붙였다.
이에 곤마가 피식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주군께서 오시자마자 바로 접견실로 모신 것도 그렇고, 교육 때문에 바로 올 수 없다는 말을 대단히 침착하게 한 것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수하들에게 미리 말해두지 않았다면, 이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설휘는 확신했다.
곤마는 교주의 네 번째 제자다. 혈사전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리 시간을 끄는 것은,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것이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아무리 곤마가 교내에서 대단한 신분일지라도, 지금은 그가 아쉬운 때다.
그걸 노리고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자기 몸값을 더 높이기 위한 수작이었다.
“글쎄,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보아하니 다른 쪽보다 우리가 먼저 온 것 같으니까.”
“…….”
곤마의 느긋한 어조에 설휘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혈사전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도 잘 몰랐다. 애초에 그에 대한 정보 자체가 많이 없었다.
그저 무위가 팔전주 중 제일이라고 알려진 것. 그리고 용담호혈(龍潭虎穴)로 불리는 위험한 곳도 서슴없이 들어가는 용맹한 성미라는 것 정도.
그의 장기는 암살이며, 천라지망을 형성해 상대를 추살하는 데 매우 큰 역량을 보였다.
또 그런 전주의 영향을 받았는지, 혈강대 자체가 끈질기고 집요함으로 유명한 부대였다.
한번 목표를 정하고 나면, 어떤 피해를 입어도 반드시 해결하고 마는 독종 중의 독종이라고.
때문에 곤마와 설휘는 혈사전주를 만나기 위해 무려 한 시진을 기다렸다.
이내 시간이 다 됨을 느낀 곤마가 시선을 들었고.
“저…… 사제자님.”
보고하러 들어온 이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홱!
그때까지 계속 침착했던 곤마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안내자의 뒤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긴가……. 어, 사제?”
놀랍게도 셋째 제자 아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사저.”
곤마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생각도 못 한 자리에서 마주친 천마의 제자들.
아령은 먼저 온 곤마를 보고서 묘한 시선으로 물었다.
“여기서 만났다는 건…… 서로 목적이 같은 건가?”
“그럴 겁니다. 다들 미래에 보탬이 되는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흥.”
그녀는 곤마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풀썩.
그러고는 표독스런 눈빛을 보였다.
“그럼 사제가 우리에게 좀 양보해 줘야겠어. 듣자 하니 흑마전주도 설복시켰다던데, 이번엔 우리 차례이지 않아?”
“죄송합니다만 사저,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혈사전주는 제가 그리는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다가 다쳐. 왜냐하면 난 여기에 많은 걸 걸었거든.”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아령.
여차하면 살수를 펼칠 수도 있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물론 천살성인 곤마를 상대로 직접 나설 생각은 아닐 테지만.
“어, 사매? 사제도 함께 있네?”
드르륵.
이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나타났다.
아령도, 곤마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사형 얼굴 처음 봐?”
이제자 마후.
그 역시 혈사전주를 노렸던 것일까. 어떻게 된 게 딱 이 시간에 이곳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별일 없었어요?”
“잘 계셨습니까, 사형.”
아령과 곤마가 이어서 말하자, 마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터억, 두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치며 말했다.
“잘 못 있었지. 전주급 영입이 잘되지 않아서 말이야.”
“듣기로는 몇 분 영입하신 걸로…….”
“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처억.
원탁 위로 발을 올리는 마후. 그는 아령과 곤마를 번갈아보며 씨익 웃었다.
“이번엔 너희, 그리고 나. 모두 쉽지 않을 거다.”
“예……?”
터억. 드르륵.
의미심장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접객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들 모였군.”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일제자 살마.
놀랍게도 제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대사형, 오랜만입니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스윽.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자리에서 예를 갖췄다. 살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대사형도 혈사전주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마후가 물었다. 역시나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그였다.
이전과 달리 살마는 담담히 말했다.
“뛰어난 사람은 많이 모을수록 좋은 거지. 안 그러냐, 곤마?”
일순, 시선이 곤마 쪽으로 모였다.
설휘는 살마가 곤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것에 약간 섬뜩함을 느꼈다.
이제껏 딱히 의식하지도 않았던 막내가 최근에 영향력을 뻗어가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기 위해 저도 노력 중에 있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보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곤마는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과거의 그와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마도 안정감이 생긴 것이리라.
절대고수와 세력을 모음으로 인해, 여유가 생긴 것.
그 덕에 다른 제자의 도발도 여유롭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혈사전주는 언제 오는 거야?!”
아령이 버럭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만 아니라, 천마 제자들 모두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한 것이었다.
접객을 맡은 자는 얼굴이 흙빛이 되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지, 지금 바로 불러 오겠……”
“오오, 모두 모여 계시는군요?”
드륵.
그때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렸고, 한 사내가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혈사전주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 제관들이 입을 법한 두툼한 남색의복을 입고 있는 그는 제자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둘째 마후입니다.”
“셋째 제자인 아령입니다.”
“사제자 곤마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인사하는 가운데, 일제자 살마만 담담히 말했다.
“우린 일전에 본 적이 있지?”
“예, 당시에 참으로 놀라운 신위를 보이셨지요.”
혈사전주는 다시금 예를 표했다.
투욱.
그는 겨드랑이에 낀 서책들을 원탁이 있는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보는 제자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저 하나를 영입하러 이렇게 오신 겁니까?”
그 태도는 천연덕스러웠다.
그를 보는 아령의 눈빛은 매우 매섭게 변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일부러 기다리게 하여 제자들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 것 같았으니까.
스윽.
마후가 일어나며 기다렸다는 듯 예를 표하며 말했다.
“예. 아시다시피 근래에 몇몇 전주들이 입장을 정한 바, 혈사전주님을 영입하러 왔습니다. 혹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저에게 오시면 그게 뭐든 다 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하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의가 발랐다. 더욱이 목표도 확실했다.
“호오, 제가 뭘 원할지 아시고?”
“금전이든, 직위든, 수하들의 실력을 향상시킬 영약이든. 뭐든 말만 하시죠. 혈사전주께서는 제 능력을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저희 진영이 주도적인 활약을 할 기회가 가장 많다는 것도요.”
거침없이 대답하는 마후.
말 한마디 한마디가, 혈사전주를 포섭하기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듯 보였다.
“마후 님의 수완이라면 잘 알지요. 허나 이번에 다른 전주들을 포섭하는 데 힘을 많이 쓰신 것으로 아는데……?”
“혈사전주와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와주시기만 한다면 최우선으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과감하게 대답하는 마후.
여차하면 먼저 포섭한 다른 전주들을 뒤로하고서라도 그를 영입하겠다는 태도였다.
혈사전주의 눈이 그에게 오래 머물렀다.
“우리 쪽 생각도 들어보셔야지요?”
그 와중에 불쑥 끼어드는 아령.
가만히 있다가는 눈앞에서 놓칠 수 있다는 생각에, 재빠르게 본론부터 말했다.
“저는 혈사전주께서 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알아요. 지형을 이용한 수련법, 천라지망에 유용한 은신법과 신법. 혈강대가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건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호오.”
“거기에 은거하신 전대고수들의 협력까지. 밀도 있게 대원들의 훈련을 도와드릴 예정이며, 그분들의 비기 전수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강력한 패를 쥐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혈사전주의 흥미를 끌었다.
“이거…… 삼제자께서 그 정도로 저희를 보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마후와는 조금 달랐다. 그가 뭐든지 말만 하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면, 아령은 혈사전주라는 인물이 뭘 원할지 정확하게 의표를 짚고 있었다.
“으음, 이건…….”
아직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혈사전주의 마음은 크게 기울었다.
한 세력의 주인이 손수 맞춤형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체면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이만한 대우를 받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교주가 되면, 자네를 부교주로 채용하겠네.”
일제자 살마가 폭탄을 터뜨렸다.
“……!”
“……!”
“……!”
침묵이 흘렀다. 제자들의 당황한 눈빛. 특히 제안을 받은 혈사전주의 표정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천마교주.
그 강력한 직위를 대놓고 거론할 정도로 일제자는 힘과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대사형이라는 자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바로 차기 교주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위치다.
애초에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 자신에게 내줄 것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부교주라니.
“허허, 참…….”
살마의 예상 못 한 선물 보따리에, 혈사전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곤마에게로 향했다.
그쪽은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저는 혈사전주님이 원하는 조건을 듣고 대답하겠습니다.”
곤마의 말은 짧고 담백했다. 앞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초라하고 작아 보일 정도였다.
“흐음.”
혈사전주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자리에 앉은 제자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우선 말씀드리지요. 저는 며칠 전부터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자님들의 손과 발이 되어서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권력 쟁탈의 꿈. 매번 꾸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전에 저는 꼭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건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영광일 겁니다.”
그의 말투는 평범한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많이 이상했다.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권력 쟁탈의 꿈? 그런 말을 해맑게 하는 혈사전주의 눈에는, 기묘한 집착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저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
“……?”
“재질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대단한 인물을 부서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그 한계를 넘는 모습을 볼 때. 저는 온몸을 관통하는 극치감을 느낍니다.”
“……!”
“……?”
“그러니 제가 제안할 것은 이것입니다. 제자님들. 감히 제가 여러분을, 최고 중의 최고인 여러분을 가르칠 기회를 주십시오.”
벌떡!
설휘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미친놈!’
혈사전주. 그는 제자들을 상대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3주간, 혈강대의 집체교육을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직접 나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각 세력에서 최고의 수하들을 추천해 주시면…… 그분들의 점수로 어디를 가야 할지 평가를 매기려 합니다.”
그는 제자들을 다시금 바라보며 말했다.
“응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그것이 그의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