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255화 (256/379)

255화. 혈사전주가 내는 시험 (3)

사박. 차악.

설휘는 갈아입은 옷을 점검했다.

짙은 남색 의복에, 어깨에는 붉은 자수가 새겨진 혈강대의 복장. 여기 오기 전 적당히 혈강대원 한 녀석을 때려눕힌 뒤 얻은 옷이다.

‘대놓고 먼저 드러낼 필요는 없지.’

설휘는 경쟁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 또한 가급적 노출을 피할 생각이었다.

겨누어진 창보다는 숨겨진 단검이 더 위험한 법.

그리고 혈강대 집체교육은 워낙에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아서, 대충 신분만 확인되면 별문제 없이 참석할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인가.’

설휘는 사전에 미리 도착하여 경쟁자들을 살폈다.

요수광, 주서린, 귀기.

혈사전주를 영입하기 위해, 제자들이 각 세력에서 보낸 으뜸패들.

용모파기를 이미 숙지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들 혈강대원의 복장을 입고 있지 않기도 했고, 특히 주서린은 여인이라 쉽게 눈에 띄었다.

요수광과 귀기, 두 남자의 구분은 손에 든 기이한 병기를 보고 알아차렸다.

오른손에 갈고리를 쥔 녀석이 바로 요수광.

특이한 병기를 잘 다루는 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교두님께서 오신다!”

“훈련자 전원, 오와 열을 맞춰 자리해라!”

한쪽에서 짙은 적색의 장포를 입은 인물 대여섯이 소리쳤다.

아마도 수업을 주관하는 교관들이리라.

처억. 처억. 척.

명령이 떨어지자, 수십 명의 훈련 인원들이 단상 앞에서 부산하게 움직였다.

단번에 좌우 열을 맞추며 모두 자리에 서자, 교관들은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때마침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중년인이 보였다.

두꺼운 한의(寒衣). 가죽으로 된 반소매 외의를 걸쳐 입은 것이 눈에 확 띄었다.

텅. 텅. 텅.

그는 대원들이 보이는 단상에 올라서더니 입을 열었다.

“혈강대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한다!”

그는 모두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높였다.

“내 이름은 심완청이다. 이번 집체교육의 이론 수업을 담당하지. 본 교두가 오늘 가르칠 내용은 즉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실전성이 높다.”

“…….”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수업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집중하지 못하면 바로 도태될 것이며, 당연하게도 이번 집체교육을 이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잠깐 대원들의 표정을 살피는 듯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3주간의 집체교육 중에 이론교육은 총 여섯 번! 장담컨대 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희들에게는 꿈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수업은 모두 생사를 넘나드는 훈련이 될 테니!”

구궁.

그의 섬뜩한 말에도 대원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굳셌다.

그리고 누구 하나 흔들림 없는 자세로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럼 첫 수업을 시작하겠다.”

심완청은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을 보며 말했다.

“배력심보(倍力心步). 근자에 혈사전주께서 창안하신 무공이며, 수체배력심경(收體倍力心經)에 근원을 두었다. 이제부터 그 원리를 쉽게 설명할 테니 잘 듣거라.”

교두는 두 팔을 좌우로 벌리며 말을 이었다.

“수체(收體)라는 뜻은 성질이 다른 두 개의 경력을 몸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 두 기운을 의도적으로 상충시킨다. 당연히 서로 다른 성질에서 오는 반발력이 생길 터. 허면 그 기운을 이용해 새로운 경력을 일으킬 수 있다. 이로써 기존의 위력에서 최소 다섯, 최대 스무 배까지 확장되지. 이제부터 구결을 알려주겠다. 혹 먼저 시범을 보일 사람 있는가?”

“제가 하겠습니다.”

스윽.

기다렸다는 듯 한 무인이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심완청이 말했다.

“오호. 부대장이로군.”

혈강대는 집체교육 때 분대장을 포함한 모든 조장, 그리고 대장의 직위를 내려놓는 전통이 있었다.

기존 서열을 집체교육의 점수에 따라 재편하는 것이다.

혈강대를 이끄는 부대장이라면, 여기 모인 자들 중 최상위에 있는 실력자. 시범을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 구결을 알려주마.”

심완청은 앞으로 나온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한참을 말하고, 또 사내와 몇 마디를 나눈 뒤 교두가 물러섰다.

그러자.

스스스스.

앞으로 나온 사내의 몸에서 희미한 기운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설휘는 그 모습을 정확히 눈에 담았다.

사내의 양팔, 정확히는 두 손바닥에서 기력들이 모이는 것을.

기의 색도 조금 달라 보였다.

아마도 교두가 전해준 구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지이이이잉.

사내는 뭐라고 계속 읊고 있었고, 그로 인해 두 손바닥의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사악.

이후, 사내는 다시 단전 쪽에 손을 내려놓는 시늉을 하더니 눈을 감았고.

이내 눈을 떴을 때는.

파앗.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위다!”

한 대원의 목소리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이미 혈사전 당사 내부의 지붕까지 도약한 그는, 이제는 넓은 공간을 단숨에 돌기 시작했고.

파파파파팟.

순식간에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와……!”

“굉장하다!”

“내가 뭘 본 거야!”

짝짝짝.

감탄과 함께 갈채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대원들의 표정엔 감탄과 경악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만큼 혈강대 부대장의 움직임은 빨랐다.

이미 이런 집체교육을 몇 번 받아본 이들도, 이번에 심완청이 알려준 보법이 자신들의 전력을 몇 배로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가.”

“처음이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교두의 물음에 혈사부대장이 대답했다. 대단한 신법을 보였음에도, 정작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괜찮다. 몇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그 정도면 훌륭했다.”

심완청이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본래 이 보법의 특징은 속력에 있었다.

환영이 생겨날 정도로 빠른 공간이동. 더욱이 가속 또한 엄청났다.

그 전모를 확인한 심완청은 나름 만족했다.

“이번 시간은 구결을 익히는 데 집중해라. 어렵다느니, 몸에 안 맞는다느니 하고 우는소리는 내지 말도록. 구결의 전수만 해도 큰 혜택이며, 이걸 익히지 못하면…… 너희들 손해지. 이후 수업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

교육생들의 표정이 변했다.

교두의 말은, 지금 받는 수업이 결국 다음 수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아마 다른 모든 수업도 그렇게 연계가 되어 있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때문에 다들 두 눈에 불을 켜고서 심완청이 언급할 구결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배력심보라…….’

설휘는 그가 제시한 보법에 대해 분석하고 있었다.

구결을 직접 듣기 전에도,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성질이 다른 두 기운을 충돌시켜 그 반발력으로 새로운 힘을 얻어낸다. 이는 마침 이제까지 설휘가 쌓아온 내공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화온마공과 빙공극저하를 충돌시키고, 마교의 마공과 정도 무당파의 태극심법을 뒤섞어본, 이런 류에 대해서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발상은 좋지만 완성도가 조금 떨어진다.’

그런 설휘의 눈으로 보기엔, 교관의 설명과 실제 움직이는 내력의 성격은 달랐다.

서로 다른 경력을 끌어들여 충돌시킨다는데, 그가 보기에는 본인의 내공에 기반한 축기(蓄氣)를 외공과 합일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달리 말해, 외공을 바탕으로 일시적으로 신체 잠력을 끌어쓰는 방법이다.

이런 류의 심법은 효율이 별로 좋지 못하다.

한 번에 체력과 내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기에 쉽게 지치는 데다, 갑자기 과한 힘을 쓰는 보법이라 그걸 감당하는 관절이나 인대에 부상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초단기전에서는 쓸 만하겠군. 주로 기습, 일격필살에 잘 맞는 보법이다. 이런 걸 스스로 창안할 정도라니……’

혈사전주란 인물.

당시에는 극마의 고수 정도쯤으로 치부했지만, 무공을 이런 식으로 창안해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도 비상한 듯 보였다.

“자. 그럼 구결을 말하겠다.”

설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교두가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교육생들은 재빨리 암기에 들어갔다.

분명 두 번의 설명은 없을 터이기에.

어떤 이는 머리를 싸맸고, 어떤 이는 급하게 옷에다 북북 손톱으로 그으며 요결을 간추렸다.

‘저들은 여유가 있구나.’

설휘는 시선을 돌려 천마 제자들이 선발한 이들을 살폈다.

우선 요수광.

그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기에 속내를 알기가 힘들었다.

다음으로 주서린.

그녀의 얼굴은 밝았다. 머리가 좋다고 듣긴 했는데, 딱 한 번 들은 것만으로 구결을 완전히 외운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귀기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데다, 긴 앞머리로 인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다.”

구결이 끝나자 당황한 대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 다시 한번…….”

“아. 중간에 놓쳤어.”

혈강대 집체교육에 올 정도니 다들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지만, 교두가 알려준 구결을 한 번에 다 기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생소한 신체의 혈자리, 중간중간 알기 힘든 용어들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내용이 길었다.

“그럼 이만. 다음 수업 때 보지. 참고로 복합훈련 수업은 당사 밖에서 진행한다더군.”

그렇게 딱 한 번, 구결 전달만 한 후 교두가 나갔다. 남은 시간은 알아서 자습하라는 것이다.

웅성웅성.

덕분에 주변은 시장통이 되었다. 구결을 들은 이들은 중얼중얼 필사적으로 암송했다. 사람의 기억은 가면 갈수록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이봐. 그…… 두 줄째 내용이 뭐였어?”

“아, 씨. 저리 가! 나까지 헷갈리잖아!”

급하게 다른 사람에게 묻는 이도 있었고, 집중에 방해가 되어 신경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개중에는 구결을 완전히 외우고 그대로 따라 빠르게 구현해 보는 이도 있었다.

스윽.

설휘의 시선은 경쟁자들 쪽으로 향해 있었다.

특히 요수광으로 짐작되는 체구가 큰 깡마른 사내에게로.

스윽. 스윽.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팔도 움직였다. 준비운동을 하는 걸로 보였다.

‘한 번에 익혔을까?’

설휘는 궁금했다. 구결은 꽤나 복잡했고, 중간중간 난해한 주석도 있었다.

앞서 불려나갔던 녀석이 몇 번을 반문할 정도로 애매한 지점 역시 있지 않았던가.

과연 녀석은 그걸 어떻게 이해했을까 생각한 것이다.

파파팟.

순간적으로 뛰어나가는 움직임.

또한 거짓말처럼 뒤로 밀려 나가는 듯한 동작.

앞뒤로 움직이며 요수광은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오! 익힌 자가 있었어!”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배력심보를 펼쳐 보인 그는 무심하게 ‘흠.’이란 말로 신음하고는 그대로 당사를 나가버렸다.

‘귀기는…….’

파팟.

설휘가 궁금하기도 전에 이미 귀기란 자도 움직였다.

그 역시 당사를 빠져나가며 보법을 펼쳤다.

그 모습에 보법을 익히려던 교육생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하긴, 천마 제자들이 선별한 자들인데……. 저 정도는 당연한 거지.’

설휘는 새삼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나가려고 했다. 그때.

“어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쪽이 천마 제자분들이 보낸 요원인가?”

“꽤 곱잖아?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한번 대화나 나눠보지.”

‘주서린은…….’

설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움직였다.

어디에나 발정 난 개는 있는 법.

대체 여기에 온 이유가 뭐였는지, 곱상하게 생긴 그녀에게 혈강대원 둘이 다가와 치근덕거렸다.

“혹시 뭐 어려운 거 없어? 도와줄까?”

“방금 구결 다 외웠다고. 알고 싶지 않아?”

터억.

손을 올리며 더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혈강대원.

그 행동에 주서린의 걸음이 멈췄다.

보통은 인상을 찌푸리기 마련인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괜찮을 것 같네.”

“오. 그렇지?”

“그래. 우리에게 배우면…….”

시시덕거리던 사내들의 말이 끊겼다.

파아아아앗.

머리 두 개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곧 바닥에 떨어지며 잘려나간 목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우왓!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모습에 교육생들은 당황했다.

설마하니 혈강대 집체교육에 와서, 가차 없이 살수를 펼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왜, 교육생끼리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건 없잖아?”

주서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피가 묻은 검신을 혀로 핥았다.

마치 당황하는 대원들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이미 익혔군.’

설휘는 보았다.

조금 전 두 사내를 제거할 때 펼친 건, 분명 방금 배운 배력심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다른 부대에서 집체교육을 받기 위해 왔다더니…… 감히 살수를 써?”

“이 개 같은 년. 넌 오늘 죽는다.”

동료의 죽음 때문일까. 주변에 있던 혈강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설휘의 눈에는 동료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닌 규율에 따른 행동처럼 보였다.

그만큼 그녀의 살수는 지나침이 있었다.

“덤벼. 사내새끼들 다 죽여도 수업에는 지장 없어. 어차피 이 집체교육에 그런 규칙은 없거든.”

주서린은 자신만만하게 녀석들을 쳐다보았다.

처억. 처억.

병기를 꺼내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퍼런 살기가 흐르는 가운데.

모두의 이목을 끄는 자가 있었다.

“호오. 대원들이 죽었군?”

스륵.

갑자기 주서린 옆에 나타나 시체를 바라보는 자.

그는 이런 상황이 재밌는지 씨익 웃고 있었다.

‘고수다. 엄청난…….’

설휘는 곧장 그 존재를 알아봤다.

남루한 옷을 입고 나타난 장년인을.

“제가 뭐 잘못했나요?”

주서린도 알아차린 듯했다. 다른 놈들에게 하던 것과 달리 예의를 차리며 물을 정도였으니까.

“안 될 게 뭐 있나. 본교의 규율은 강자존. 약하면 뒈지는 게 당연하지.”

그는 자리에 섰다. 그리고 모두가 들리게 말했다.

“당사 밖으로 모두 나와라. 두 번째 수업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금 죽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어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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