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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260화 (264/379)

260화. 빈틈을 파고드는 법 (1)

교육이 끝난 후 한 시진 정도 휴식이 주어졌다.

교육 기준에 통과한 대원들은 대부분 운기조식을 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그에 반해 설휘는 멀쩡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몸이었다.

“잠깐 나갔다 오는 게 가능하오?”

“뭐. 돌아오기만 하면 상관없지. 대신 한 시진 안에 돌아오지 못하면 자진 포기하는 걸로 처리된다.”

교관은 좀 갸웃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첫 수업부터 꽤 살벌하게 피 튀기는 경쟁이 있었으니, 그만큼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을 자기 회복에 쓰든지, 아니면 이제껏 생각 못 한 다른 필요 도구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설휘는 그렇게 말하고 혈사전에서 나왔다.

피를 봐서 그런가, 혹은 개성이 강한 인물들을 봐서 그런가. 자꾸만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선명하게 그려지는 여인 때문이기도 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시간이란 건, 매우 신비롭다.

보통은 흐르면 흐를수록 기억은 잊히고 빛이 바래야 할 터인데, 지금은 되레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간 시간을 역행하여 과거의 흐름대로 펼치거나 바꾼 인생이 한둘이 아니건만. 그래서 피맺힌 복수도, 억울해도 머리 숙여야 하는 비굴함도 날이 갈수록 흐릿해지건만.

소령.

유독 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기억의 풍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환생하면 할수록, 시간이 겹쳐지면 겹쳐질수록, 잊히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고 또렷해졌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보는 것도…….’

지금의 현생에서는 소령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설휘는 궁금했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그녀는. 이 시기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혹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도와줄 것은 없는지. 혹 위험하지는 않은지.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아니. 그냥 모든 걸 떠나서.

솔직히 그녀라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

‘은영단 사령대가…….’

스윽. 탁.

주변을 돌아보고 대충 위치를 가늠한 설휘는, 경공을 써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현무관.

은영단원들의 교육을 위해 지어진 건물.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은영단 내부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설휘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몸이다.

어디서 언제쯤 경계가 도는지도 알고 있고,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지금의 그의 무위로는 경비 이목을 속이기가 너무도 쉬웠기 때문이다.

“…….”

좀 더 들어가는 건 좀 그런가?

현무관을 올려다보던 설휘는 잠깐 고민했다.

지금 그의 소속은 분명 사제자 휘하긴 했지만, 괜히 내부로 들어갔다가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지만 그쪽은 초면일 텐데…….”

현무관 2층 창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면, 아직 교육 중인 듯했다.

그냥 한번 둘러보고 가려고 했는데, 직접 와보니 괜히 궁금해진다.

신임 사령대장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신이 했던 일들을 잘 할 수 있을 사람일까.

주변을 조금 서성이며 고민하던 설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이. 거기 누구야?”

덜컥!

한 남자가 문을 열며 말을 걸었다.

그 사내를 본 설휘의 눈이 커졌다.

“너는…….”

그늘진 얼굴이 달빛에 조금 드러나자 설휘는 말끝을 흘렸다.

그는 여전했다.

용진.

다혈질이지만, 한번 믿음을 주면 배신하지 않는 청명한 눈빛을 가진 자.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고 싸웠던, 충직한 사내.

긴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오는 당당한 걸음걸이에도 그만의 멋이 있었다.

“뭐야? 날 알아?”

설휘가 빤히 쳐다보자 용진이 걸음을 멈췄다.

지나치게 빤히 바라보는 것이, 뭔가 목적이 있나 경계하는 것이다.

“…….”

설휘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판단을 내렸다.

지금 이 시점에, 사령조장들과 엮여서 좋을 건 없다.

특히 자신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길을 잘못 든 듯하오.”

“잘못 들었다고? 경계가 이리 삼엄한데?”

설휘는 예를 표하며 말했지만 용진은 눈을 부라리며 계속 따졌다.

“경계하실 것 없소. 나 또한 곤마 님의 수하이니.”

“신분이 어떻게 되는데?”

“비밀무사이고, 별도의 임무를 수행 중이오.”

“……이름은?”

같은 소속이고, 비밀무사라는 말에 용진이 조금 경계를 거두며 물었다.

“설휘요.”

“설휘. 흠.”

용진은 설휘를 위아래로 살피고, 그러고는 조금 생각을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이곳에 얼쩡거리지 마시오. 교육기관도 다르고 신분도 달라 오해받기 쉬우니까.”

“주의하겠소.”

설휘는 그렇게 예를 차리며 뒤돌아섰다.

‘휴.’

동시에 조금 아쉬웠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이들도 보고 싶었다.

우직하고 나이 많은 적송도. 자신을 한 번 배신했지만 그 마음이 짐작 가던 요림도.

여기엔 없지만, 항상 웃음을 주던 음무기와 송화도.

그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었던 그녀…….

“거기 뭐하고 있어?”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설휘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낯이 익었다.

정확히 이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아. 사령대장님.”

‘……사령대장?’

설휘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잘못 안 게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설휘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그늘진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여인.

현무관 아래. 그 모습을 보던 설휘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자신의 생각했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모습과 어쩜 이리 똑같을까 싶을 정도로.

“거기…… 누구시죠?”

전생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리고 현생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던.

죽고 반복되는 삶 속에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여인. 소령이었다.

***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같은 곤마의 수하. 비밀무사의 임무 수행 중.

용진에게 짧게 설명을 듣고 난 후, 그녀가 자신에게 보인 태도는 정중함이었다.

다만 그 정중함은 모르는 사람. 친분 없는 이에게 보이는 딱딱한 태도에서 나온 자세였다.

무얼 기대했던 걸까.

생기 넘치고 발랄했던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없자 설휘는 조금 서운함이 들었다.

“저는…….”

그래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지만, 그중 일부만 풀어도 소령의 경계심은 하늘을 찌를 터였으니까.

그러니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새로 재편되었다는 사령대가 제법 흥미로운 조직이라고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조직? 하긴, 제가 여자의 몸이니 그렇겠군요. 계집 따위가 남자들을 어떻게 지휘하겠냐고.”

소령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제 말은…….”

설휘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왠지 그렇다고 했다간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들었던 말인데,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다.

“곤마께서 흥미를 가지고 계신다고, 그렇게 들어서 말입니다. 꽤 재능 있어 보이는 이들이라고.”

“곤마께서…… 말입니까?”

“예. 잠재력은 있으니, 어떻게 커 나갈지 한번 지켜보고 싶다고. 그렇게 지나가듯 말씀을 하시더군요.”

설휘는 곤마를 끌어다 붙였다.

상관의 이름을 끌어다 붙이는 건 간단한 처세술이었다.

그리고 곤마는 본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마침 이런 경우에 둘러대기 적절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래도 곤마께 별도로 임무를 받지 않는다면 여기 들어오는 건 조심해 주세요. 조직 내에 해당 영역이란 건 엄연히 존재하니까요.”

냉담하게 선을 긋는 말에 설휘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괜한 오해를 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오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도.

“새겨두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아. 예.”

고개 숙여 사과했더니, 오히려 당황하는 소령.

하지만 그녀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

사박. 사박.

“...”

설휘는 속이 답답했다. 기분 같아서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잡으면. 괜히 말을 걸면.

또다시 관계가 지속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이번 생은 자신과 연이 이어져선 안 된다.

자신과 연관되면 될수록 삶은 계속 불행해질 테니까.

“……후우.”

그런 마음으로 설휘의 시선은, 소령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

“이번 시간은 전술훈련이다.”

혈강대 집체교육 세 번째.

교두 주귀선(朱歸善)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계곡이 펼쳐져 있었는데, 수면 위로 머리만 빼곡히 내놓은 대원들이 보였다.

몸이 온전한 이십여 명의 대원들이 모두 5개 조로 편성되어 물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호흡법이다. 은신에 있어 가장 자주 쓰이는 방법이며 이후 배울 인기척을 지우는 계열, 은신 교육에 쓰일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주귀선은 이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혈강대원들은 익히 배웠을 것이다. 전신증강호흡(全身增强呼吸)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해도 물속에서 실신하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

‘전신증강호흡법?’

본래 혈강대원이 아닌 설휘는, 당연히 그 호흡법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굳이 주변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물어본다고 설명해 줄 사람도 없었지만, 사실 설휘 자신도 괜찮은 귀식대법 정도는 이미 익히고 있었다.

“자, 모두 머리를 내려라! 입수!”

교두의 외침과 함께 교관들이 소리쳤다.

“물에 들어가!!”

“어서! 숨 쉬면 실격이다!”

“거기 뭐 하냐!”

무공 훈련이 아닌 계속되는 말초적인 체력 수련.

그것도 물속에서의 훈련은 모든 체력을 다 빼놓아, 들어갔다 하면 거의 반 실신 상태가 된다.

그런 교육에도 대원들은 별말 없이 교두의 명령을 따랐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물속에 머리를 처박은 설휘는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반 시진 정도는 물속에서 죽은 채로 있을 수 있었다.

물론 몸을 완전히 세우고 운기조식하든 정신을 집중하든 할 때에만 가능했다.

문제는 이들이 언제쯤 다시 올라오게 한다는 얘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공포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역시, 이들은 훈련되어 있어.’

슬쩍 돌아본 곳에는 다른 조를 이룬 요수광이 있었다.

그는 이런 수련을 계속 해왔는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주서린도 그랬다. 그녀는 아예 두 손을 모으고 어떤 호흡법을 시전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나를 노리는군.’

이곳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는 사내.

이전에 일격에 쓰러뜨렸던 귀기. 녀석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겠지.’

계속되는 무호흡 시간.

“올라와라!”

이 각쯤에 다시 수중으로 얼굴을 내밀게 했다.

그리고 몇 번 뭐라고 한 뒤 다시금 수중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두 시진 넘게 반복되었고, 이 지옥 같은 과정이 수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올라와!”

“얼굴 내밀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설휘.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느덧 저녁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려갔다 올라왔을 때는 깜깜한 저녁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자들이 생겨난 것은.

“자, 모두 올라와라.”

다행스럽게도 자정이 되기 전, 모든 대원들은 물에서 몸을 뺄 수 있었다.

하지만 교육은 가혹하리만치 이루어졌다.

교관들이 어디서 들고 왔는지,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대원 한 명 한 명에게 걸기 시작했다.

‘무게가…….’

상당했다.

물을 먹어서 그런가, 고작 모래주머니 몇 개인데 온몸에 바위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헐떡이던 숨이 아예 멎어버릴 지경.

“딱 한 번만 말한다. 잘 듣거라.”

대원들이 비척거리고 있는 가운데, 교두가 앞에 나오며 설명했다.

“지금부터 저편에 보이는 숲속으로 몸을 숨겨라. 시작은 일조부터. 그렇게 모든 조가 다 들어간 뒤에…… 교관 한 명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찾아내서 벌점을 먹일 것이고.”

스으윽.

그는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명이라도 은신이 발각되면 그 조는 실격이다. 아침까지 교관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그 조는 합격이다. 여기까지, 질문 사항 있나?”

“…….”

다들 말을 못 했다. 온몸을 떨거나 실신할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루 온종일.

자맥질을 계속해서 체력적인, 정신적인 한계에 다다랐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몸을 숨기는 훈련을 하라니. 해도 너무한다 싶은 것이다.

“몸 상태가 좋을 때 잘 숨는 건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

“물에 빠지고, 적에게 쫓기고, 숨도 쉬기 힘든 그런 천라지망 속에서, 마지막 한 올의 숨을 가지고 몸을 숨기는 것. 그게 진정한 은신이지.”

하지만 교관은 그와 반대의 생각을 하는 듯했다. 듣고 보니 나름 이해가 되긴 했다.

“이번 수업 과제는 조별 협동이다. 단 한 명이라도 발각되면 그 조는 통째로 탈락이다. 그게 싫으면 조원들끼리 협력을 해야 할 터.”

“…….”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너희들이 걸릴 것 같으면, 다른 조를 걸리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고.”

“……!”

대원들의 시선에 빛이 돌아왔다.

본인이나, 본인과 같은 모자란 조원을 감당하기 어렵다면.

더 모자란 다른 조의 조원을 발각되게 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유도할 수 있다.

그거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합격하고 싶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 도망쳐라. 단! 같은 조원, 혹은 다른 조원을 향한 물리적 살상은 절대 금지다. 애초에 은신하는 놈이 피를 보는 건 웃기는 일이지?”

“…….”

“그럼, 시작! 출발해!”

그의 외침에 다들 조원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휘도 뒤늦게 움직였다.

씨익.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귀기의 얼굴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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