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정면 대결 (2)
설휘는 이미 진작에 회암전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전각을 지키는 이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 교관들은 총 일곱.
그중에서 특히 셋은 느낌이 만만치 않았다. 들어갔다간 반드시 싸움이 벌어진다.
‘음…….’
단 한 명에게만 발각되어도 즉각 일곱의 공세가 쏟아지게 될 터.
원래 목적대로, 도무지 교관들의 눈을 피해서 검만 빼내 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을 때.
“……?”
화르륵! 화르르륵!
맹렬하다 못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불이 사위를 덮쳤다.
“막아!”
“나무를 베! 최대한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회암전을 지키고 있던 교관들은, 인근 1장 범위의 모든 나무를 베어 거리를 벌렸다.
화다닥! 화라라락!
하지만 기어코 전각이 불타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불은 닿지 않았지만,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열기 때문에, 오래된 전각이 스스로 불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소화검을 회수해야 합니다!”
“안 돼! 무리다! 일단 퇴각해!”
“젠장! 젠장할 새끼들!”
안으로 재진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결국 교관들은 버티지 못하고 화염을 피해 탈출했다.
지지직. 지지지직.
“…….”
납작 엎드려 있던 설휘는 조금 망설였다.
거리가 충분함에도 머리카락과 옷이 저절로 그을릴 정도다.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설휘는 일단 몸을 날렸다.
교관이 사라진 이상, 장애물은 없었다. 보란 듯이 놓여 있는 소화검을 그가 손에 집은 순간.
[소화검을 얻었습니다.]
[화염 계열의 유니크 아이템입니다. 내공이 없어도 강력한 화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화염에 대한 내성과 친화력이 강화됩니다.]
[유니크 아이템 소화검은 화염과 관련된 무공의 능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려 줍니다.]
‘어?’
설휘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에 잠깐 멈칫했다.
근래 들어 보기 어려웠던 정보들.
특히 검의 특성과 가진바 능력은 가히 신검이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불에 대한 내성과 친화력……?’
이게 무슨 뜻인지 처음엔 몰랐지만, 설휘는 이내 어떤 것이지 깨닫게 되었다.
진입할 때 느꼈던 주변의 미친 듯한 열기.
화라락. 화라라락.
그게 누그러졌다. 정확히 말하면 불이 근처에 있어도 열기 자체가 몸을 침투해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허…… 음?”
신검의 성능에 감탄하고 있던 설휘는, 때마침 이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사박. 사박. 사박.
그리고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사방이 불길로 회오리치는 가운데 몸을 낮춰 걸어오는 사람 하나.
“…….”
범인이라면 감히 진입할 시도도 못 할 정도의 화마다. 당장 혈강대 교관들만 해도, 재진입은커녕 버티기도 힘들어 몸만 간신히 내뺀 불지옥.
화라락. 쿠구궁!
불에 타들어간 서까래가 무너진다. 뜨거운 열기와 검은 연기가 시각을 거의 다 가린 가운데, 그 인영은 차분하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귀기?’
설휘는 인상착의만 보자마자 그라는 걸 알고는 인사를 했다.
“허, 또 보는군.”
“…….”
귀기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묘한 눈빛을 띤 채로, 마치 운명을 직감한 듯 설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스윽.
그 시선이 소화검 쪽으로 시선이 이어졌고.
“아, 이거? 쓸 만한 병기가 없었는데 마침 잘 구했지.”
태연하게 설휘가 대답해 주었다.
투욱.
귀기는 바닥에 다시 섰다.
“이거 어쩌나. 내가 먼저 가져가게 생겼네.”
“킥.”
다소 도발적인 설휘의 말에 귀기가 웃더니.
파파팟.
선공을 시도했다. 그 움직임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사아아아-
그 검이 노리는 곳은 설휘의 목.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카아앙!
아슬아슬하게, 설휘의 지척에서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맞부딪혔다. 사람이 휘둘러서 부딪힌 것인데 뭔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터트렸다.
캉! 카카캉!
불길과 연기가 점점 더 강해지는 가운데, 두 남자의 검이 서로 몇 번이나 부딪혔다. 그러기를 한참.
“흡!”
키잉!
설휘가 힘을 실어 날린 강격에, 귀기가 재빠르게 뒤로 몸을 굴리며 물러났다.
타닥. 사르륵.
피해를 주지 못했다. 가볍고 영활한 데다 빠르기가 그지없는 몸놀림과 상황 판단.
마치 언제 검을 어떻게 휘두를지, 한 수 앞서서 보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설휘도 혀를 찼지만, 귀기 또한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상대해 본 적 중에서…… 최강이다.’
귀기는 생각했다.
감각. 반응속도. 내공. 호흡을 고르는 귀식대법까지. 상대는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앞서고 있었다.
상대가 사제자 곤마, 그 유약한 마지막 제자의 수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왔지?’
평소라면 이런 경우 물러서는 게 맞았다.
아무리 귀기가 호리동 출신이라고 해도, 도무지 승산 없는 적을 상대로 무모하게 달려들었다간 개죽음이니까.
하지만 사방이 불. 열기와 연기로 가득 찬 지금은, 역설적으로 귀기에겐 지금이 기회였다.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다.’
호리동에서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죽음과 죽임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특히 많이 겪은 것이 마침 불이었다.
크흡. 후우.
크흡. 후우.
폐가 불타는 듯이 아파왔다. 무시무시한 열기다. 아무리 상대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주변의 환경은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불은 내 편이었지. 항상.’
작열통. 화상의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체질 탓인지, 아니면 호리동의 끝없는 사투를 진행하며 통각을 상실한 것인지. 귀기는 화상에 대한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는 편이었다.
크흡. 후우.
크흡. 후우.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통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제어장치다. 그게 없으면 몸이 망가져도 그런 줄 모르고 죽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사방이 열기로 가득한 싸움터에서는,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축복이나 다름없다.
화르륵! 삐이이이이!
대개는 몸을 살리기 위한 통증 때문에 참지 못하고 움직이니까. 그래서 먼저 죽으니까.
하지만 귀기는, 적어도 죽을 때 죽더라도, 최후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우지직! 우지지직!
불길에 전각이 무너져 내린다. 기둥 하나가 무너지자, 커다란 서까래 하나가 굉음을 울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설휘를 향해서.
‘지금……이……?’
파밧.
순간적으로 달려 나가려던 귀기가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뻘겋게 작열하는 기둥이 바로 옆에 박혀 있는데도, 설휘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빈틈 자체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
“마침 상황이 괜찮다고 생각했지?”
설휘는 담담히 말했다.
화아악. 치지직.
그의 지척에 쑤셔 박힌 서까래는 거대한 숯불 그 자체였다. 벌겋게 빛을 내는 숯불 기둥에, 옷이 늘어 붙는 상황에서도 설휘의 말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늘 그래. 너 같은 녀석들이 생각하는 것들은. 끔찍한 과거가 있고 오직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아왔으니,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이로울 거라 생각하겠지.”
“……!”
귀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상대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기분에 거슬린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네 눈에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 것 같은가.”
“……?”
“세상에 너만큼 끔찍한 과거를 가진 자가 없다고. 다른 사람은 죽지 못해 사는 자가 없다고. 다들 편안하고 안락하게만 살아왔을 거라 생각했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그냥 알려주려고. 네가 이제까지 겪은 경험. 죽음의 위기 따위는 내겐. 그냥 조금 특이한, 그리고 이색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츠츠츠측.
설휘는 옷의 일부를 찢어 그에게 던졌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재밌게도 내게도 지금은 최고의 상황이야. 여기서 너를 죽이면…… 네 위에 있는 마후도 죽음의 이유를 찾기 힘들 거다. 그건 곧 내 상관인 곤마 님께도 좋은 기회가 된다는 거고.”
이죽.
귀기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대의 말투도, 거기다 건방진 행동도 맘에 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어서 빨리 제거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맴돌았다.
“죽여주마.”
사아아악.
그는 찰나간에 살행에 관한 십여 가지의 무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 가장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하나의 무공을 선택했다.
혈림전변(血臨轉變) 환허(幻虛) 초개검(初開劍).
이 특이한 조합 무공은, 두 보법과 하나의 검술이 조합된 귀기의 필살의 일초였다.
이제껏 그를 몇 번이나 죽음에서 구해낸 구명절초. 동시에 일격필살의 절초.
지금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쓸 일격으로 손색이 없었다.
투투툭.
거기에 귀기는 한 가지 안배를 더 했다. 전신의 사혈을 짚어, 가진바 선천진기의 생명력을 모두 내공으로 돌린 것이다.
잠시 후.
“끄르르……륵.”
눈앞이 핏빛으로 변하고, 귀가 위잉 하고 울렸다.
생명력이 급속도로 고갈되어 가는 부작용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번 일격으로 수명이 반절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 여기서 놈을 죽이는 게 더 중요했다.
“크……으으으으!”
감각이 또렷해지고, 기운이 강력하게 치솟았다. 원래 치명적인 일격에, 생명력까지 밀어 넣은 수다.
설령 극마의 고수라도 막지 못할 거라 장담했다. 귀기가 아니라 그의 주인 마후가.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설휘의 표정도 조금 달라졌다.
놈은 노골적으로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원래 그런 낌새였지만, 사혈을 짚어서 공력을 몇 배나 끌어올린 걸 보면 더욱 확실했다.
화르륵! 화라라락!
설휘는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지독한 열기와 연기. 숨을 쉬기는 불가능한 상황. 시야 역시도 검은 연기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콰아아악! 휘르르르륵!
열기가 일으킨 강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불길은 자신뿐만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귀기에게도 거의 덮을 태세였다.
‘체질이 다른 건가? 아님 살이 익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건가?’
설휘는 불구덩이 속에서 놈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 자신이야 소화검의 공능으로 버티고 있다손 쳐도, 상대는 체질인지 뭐인지, 이 끔찍한 열기에서도 버티고 있었다.
가히 화마. 불의 마수라도 된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휘륵!
그러던 중 불덩이 속에서 설휘의 검이 흔들렸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소화검의 영향 때문인지, 불이 가까이 있어도 자신의 신체를 위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과하게 따뜻한 정도.
물론 내공으로 기막을 칠 수 있는 수준이나, 검 자체의 능력이 발휘되는 가운데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사대극마공 화에 어울리는 검이구나.’
예오후검이 상대극마공 풍에 어울리는 병기였다면, 이건 화에 어울리는 검이다. 이 신검이라면 그 마공을 훨씬 더 강력하게 해줄 것 같았다.
거기서 느닷없는 영감이 찾아들었다.
‘시간이 느려진다면 불길의 화마도, 느끼는 고통도 더 작아지겠지.’
문득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다.
주변의 일정 범위를 통제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상대에게 일격을 가하는 무공뿐만 아니라, 이런 불길이 일어나는 중에 고통을 줄여주는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흐읍…….”
설휘가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읽자 거짓말처럼 시간이 느려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흔들리는 불꽃은 느리게, 너무도 느리게 너울너울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