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정면 대결 (3)
솨아아아-
흐름이 변했다.
시간을 얼려서 결박시켰던 과거와 달리, 극도로 느려진 너울거림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자신을 보고 있어야 할 귀기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특이한 무공이다.’
잠깐 상념에 잠겼다지만, 그럼에도 설휘가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의 보법이다.
다시금 기감을 집중한 설휘의 귀로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대놓고 자신을 숨기지 않는 거친 발걸음이었다.
스슥. 스슥. 스슥.
‘……뭐지?’
귀기가 포착되었다. 하지만 모두 세 방향에서 각기 다른 움직임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보법으로 만들어 낸 환영.
만약 시간을 강제로 느려지게 만들지 못했다면, 소리와 환영의 부자연스러움을 나중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사박.
거기에 설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환영이 다가 아니다.’
세 개의 발소리. 셋으로 늘어난 귀기의 환영.
하지만 더 많이 생성된 검영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귀기, 그가 그려낸 환상(幻想)이었다. 아마도 상당히 고위급의 보법이리라.
파아아아아앗.
파고드는 환영이 있었지만, 설휘는 피하지 않았다.
뒤이어 정면과 후면, 그리고 사선 방향에서 날아드는 검기를 보고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쉬각!
그렇게 하나씩 날아든 검기가, 이윽고 설휘의 목을 베고 지나가는 순간.
“이겼…….”
밝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귀기가, 곧바로 안면을 경직시켰다.
퓨욱!
분명히 완벽히 그어진 검선에 의해 잘려나갔을 상대의 목에서 피가 튀지 않았다.
“……환영?”
그로 인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도 도중에 힘을 잃었다.
슈슉.
“환영은 너만 쓰는 게 아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나타난 설휘.
“……!”
상대의 존재감에 귀기는 온몸이 굳었다.
그는 상대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신법, 이름은?”
목이 날아갈 순간에도 그는 듣고 싶었다.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환영이라 하기엔 너무도 생생하고 실체에 가까웠던 상대의 보법. 마지막 순간에 무인의 욕심이 일어난 것이다.
설휘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답해 주었다.
“천마군림보.”
“……뭐?! 그건…….”
경악으로 물든 얼굴. 하지만 그다음 이어질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쉬익!
소화검에 목이 날아간 그의 신체는 완벽하게 이등분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구구구구궁.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화마와 불타오르는 건물의 잔해가 1층의 공간을 완벽하게 덮어버리며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사아아-----
설휘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이 다시금 느려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시야 쪽에 있는 것만 아니라, 저편의 거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것이다.
휘리릭. 휘릭!
설휘는 그런 시간선 안에서, 1층을 느긋하게 만끽하며 걸어 나왔다.
이는 극마의 초입과 통달, 그 이상을 넘어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했다는 증표였다.
***
주서린은 다른 조원들과 함께 불에 휩싸인 전각을 보고 있었다.
화르륵. 화르륵.
사방으로 연기가 자욱하고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뒤덮고 있지만.
그녀는 분명 저 안에 있는 보검을 누군가는 들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귀기일까? 아니면…….’
요수광의 죽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직감적으로 사제자의 수하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분명 정황상 귀기가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데, 촉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혹은 터무니없는 것을 볼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든 것이다.
쿠웅! 우지직!
불에 휩싸인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두 눈 바짝 뜨고 바라보던 그녀의 시야에,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한 인영이 잡혔다.
‘저건.’
녀석이었다. 설휘.
사제자의 수하로 이곳에 투입된 인물.
‘어떻게 불타서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태연하게…….’
잔뜩 찌푸리고 있던 주서린의 눈이 커졌다.
분명히 은신하고 있었음에도 녀석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볼일 있나?”
“…….”
주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휘의 손에 들려 있는 보검, 그것이 이번 임무의 표적인 소화검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
뱀 앞에서 몸이 굳은 개구리처럼,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없나 보군.”
스윽.
그렇게 그는 지나갔다.
주서린은 그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주저앉았다.
풀썩!
‘저, 절대자…….’
잠깐이지만 상대의 몸에서 자신이 모시는 주군, 아령보다 한 단계 높은 기운을 느꼈다.
그것이 그녀가 발을 떼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
“흐음.”
보고서를 읽고 있던 혈사전주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번 수업에도 우려하던 살인이 일어났고, 그것이 그가 아끼던 혈사비 출신 교관이 대상이었단 점에서 더 충격을 받았다.
“이건 좀……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총교두 소천괴가 우려스런 얼굴로 말했다.
이번 사건은 비단 교관의 죽음만 걸려 있는 게 아니었다. 교육생 중에서 죽은 이가 하필, 일제자와 이제자의 수하인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래 보이는군.”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혈사전주의 모습에 소천괴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외부로 알릴 경우, 혈강대의 집체교육은 원만히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흠.”
혈사전주가 침음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다른 놈들도 아닌 천마 제자들이 직접 뽑은 수하들이 교육 과정 중에 목숨을 잃었다.
당연히 진상조사를 요구해 올 것이다. 뭐, 그거야 요구에 따라주면 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이런 사건에서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집체교육은 언제 끝나는가?”
꽤 고심하던 혈사전주가 입을 열었다.
“보름 뒤입니다.”
“그럼 그때까지 보류하게.”
“예?”
소천괴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사건은 일어난 즉시 빠르게 윗선에 보고하는 게 낫다. 시간을 끌다 보면 괜한 오해가 생기거나, 감정싸움으로 변질되어 정확한 진상 규명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무엇보다 사건에 연루된 자가 천마 제자들이 아닌가.
“이 시점에서 알렸다간, 집체교육 자체가 방해받는다. 이번 기수의 혈강대 교육은 거기서 멈춰버리게 되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중에 사건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혈사전주의 말에 소천괴가 다시 우려를 표했다.
다른 세력이 혈강대의 행사에 손을 뻗는 것은, 그도 분명히 불쾌했다. 하지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보고를 누락할 경우, 상대는 분명히 트집을 잡을 것이다.
시신에 남은 무공의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 마련이다.
당연히 일제자와 이제자는 격하게 불만을 표할 것이고, 여차하면 삼제자 및 사제자와 사전에 내통한 것이 아니냐고 윽박지르며 강압적으로 취조해 올 수도 있을 터.
‘아니, 취조 정도라면 다행이지.’
아예 미래의 적으로 생각하고 혈강대 전체를 공략하려 들 수도 있다.
“뭘 걱정하는지 아네. 하지만 그건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하지만 소천괴의 우려와 달리, 혈사전주는 담담했다. 분명, 이번에 직속 인원을 잃게 된 천마 제자들의 불쾌감은 극에 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사전에 이미 예고했지 않은가. 혈강대 집체 교육은, 언제 어떻게 죽을 위기를 겪을지 모른다고.
아무리 정치적인 일이 되었다 한들, 아니 오히려 정치적인 일이기에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이번 기수에 살아남은 자들. 집체교육에 통과한 자들은 혈사전을 대표하는 정예가 될 것이다.”
“그건 그럴 겁니다. 허나…….”
“그걸로 된 거야. 가려 뽑은 자가 죽어나갔다면, 그건 그를 뽑은 자의 눈이나 역량이 부족한 거지. 기존에 합의한 사항까지 뒤집는 것은 결코 용납 못 해.”
상대의 세력이 강하다고 해서 알아서 굽신거리는 것은, 이제까지 혈사전주가 해 온 바가 아니다.
“승자는 승자, 패자는 패자다. 자네는 교육만 생각하게. 나머지는 다른 이들이 알아서 움직일 테니.”
“…….”
왠지 모르게, 혈사전주가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소천괴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홰홰 머리를 내저었다.
일단은,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될 일이다.
***
하루가 끝이 났다. 임시 막사로 둘러쳐진 곳으로 돌아온 설휘는 조용히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후우, 훅…….”
갑자기 모든 게 생경해졌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짐을 알았을 때, 설휘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을 엿보았다.
‘그에겐 환영이 아니었겠구나.’
귀기와의 싸움에 펼쳤던 천마군림보.
생각해 보면 그때에도 시간의 흐름이 지극히 느려지고 있을 때였다.
천마군림보는 본래도 환영이 실체로 나타나는 극강의 경공술.
그런 상황에서 펼친 자신의 움직임을 보던 귀기는 과연 무슨 느낌을 받았을지도 궁금해졌다.
‘일단은 혈사전주를 설득시키는 것인데……. 그 뒤에는 더 어려운 과제가 남을 텐데.’
설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은 어느새 극마의 끝에 다다랐고, 탈마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마교에 기인이사가 많다 한들, 지금의 자신을 상대할 적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번 삶은 난이도라는 게 높아져서, 모든 능력이 전반적으로 올라간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탈마까지 가야겠지?’
AI는 이미 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이 지옥을 탈출하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이번 생애에는 생각지도 못한 강한 적들이 나타날 거라는 얘기였다.
‘절대극마공이라는 거, 한번 보고 싶기도 하구나.’
소화검을 얻었기 때문일까.
문득 사대극마공의 총합이라는 절대극마공을 보고 싶어졌다. 얻기까지 하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그저 한 번 보기만 해도 견문이 넓어질 것 같았기에.
‘그러려면 마지막 흔적을 찾아야 하는데…….’
찢어진 교서의 마지막 지도.
그것을 찾으면 절대극마공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 AI에게 듣기로, 지금 난이도로 가다 보면 관련된 실마리가 나온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어?’
취침시간이 주어져 잠깐 눈을 붙일까 하던 설휘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기감에 걸린 인기척.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사박사박.
설휘는 침소에서 나갔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깔린 저편의 풀숲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자극한 인물이 나타났다.
“역시 너지?”
주서린. 면식도 별로 없는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밑도 끝도 없이 뜬금없이.
“갑자기 무슨 소리지?”
“요수광, 귀기.”
“…….”
설휘의 표정이 묘해졌다.
떠보는 것일까, 아니면 알고 묻는 것일까.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이미 극마를 완전히 넘어선 이상, 이제는 굳이 거짓말을 하며 자신을 숨겨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래서 물었더니.
“기회를 주려고 왔다.”
“무슨 기회?”
“내게 협력하면, 나중에 크게 보상하지.”
피식.
설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서린의 제안은, 그에게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참고로 나는 다른 자들과 다를 거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싸울 생각이 없거든.”
“……재밌는 녀석이군.”
그래서 설휘는 담담히 웃었다.
상대가 어떻게 짖어대든, 수준 떨어지는 녀석들을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저 멀리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시하려고 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만약, 사령대장 소령이 죽는다면?”
“…….”
순간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는 설휘를 보며.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주서린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