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정면 대결 (4)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혹감과 놀라움 때문이다.
소령. 그 이름이 갑자기 주서린에게서 언급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어쨌다는 거지?”
“하, 덤덤한 척이 어설프군.”
잠시 발뺌을 해 보았지만, 주서린은 킬킬거렸다.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듯.
“왜,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그럼 약속해 주겠어? 우리가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
설휘의 눈에 냉기가 감돌았다.
그게 긍정의 몸짓이라는 걸 알아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알고 있다.’
주서린은 아예 작정하고 물어뜯으려는 태세였다. 여기서 어설픈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설휘는 혈사전에 오고 난 뒤의 모든 행보를 되짚어 보았다.
거기서 뭔가 하나가 툭 하고 걸렸다.
사령대 방문.
딱 한 번, 집체교육 도중에 혈사전을 빠져나와 찾아갔던 때가 있었다. 하필 그때 뒤를 밟혔던 것이리라. 설휘는 그렇게 추측했다.
“의아하군. 그저 한 번 만난 것에 그 정도로 의미를 부여할 줄은 몰랐는데…….”
“하. 본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는 의미가 있기 마련이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 내심이 드러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그녀는 재밌다는 듯 씨익 웃었다.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 때라면, 오히려 사리겠지. 하지만 무상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감상적인 인물들은 그 본심을 보이는 법.”
“내가 감상적인 인물로 보이나?”
“애초에 사제자의 휘하니까.”
“…….”
“우리는 네가 만난 인물들 중 소령에 집중했다. 보아하니, 틀리지 않은 모양이야.”
‘우리라…….’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설휘에게는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주서린은 함께 움직이는 조직이 있다.
그러니 짧은 시간, 부족한 정보로도 충분히 설휘를 파악할 수 있었고, 또한 이 정도로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라는 걸 은연중에 피력하고 있었다.
그게 꽤 불쾌했다.
“그래? 그럼 널 죽이면…… 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되겠군.”
설휘는 그들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었다. 이럴 땐 복잡한 길보다 쉽게 가는 게 더 편하다.
대놓고 살기를 뿜자 주서린은 비아냥거렸다.
“그랬다간 혈사전주를 설득하지 못하겠지. 난 흔적을 많이 남기는 편이거든?”
“그 정도는 숨길 수 있어.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거기엔 사령대장의 목숨도 있지. 물론 네가 직접 나선다면 어떻게든 지킬지 모를 터. 그런데 집체교육 중에 몸을 뺄 수는 있어?”
이번엔 실질적인 겁박이다.
집체교육을 다 받지 못하면, 혈사전주를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을 들이밀었다.
확실히 영악한 년이다.
더욱이 어떻게 사령대장인 소령을 죽이려는지 방법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후후. 하하하. 푸하하하하.”
설휘가 갑자기 웃어 보였다.
굳어진 건, 바로 주서린이었다.
“왜 그리 웃지?”
“그냥. 재밌어서.”
“……지금 내가 뭘 얘기하는지 몰라?”
“잘 알아. 그래서 알려주려고 말이다.”
슬쩍.
설휘가 한 발을 뗀 순간, 주서린은 목 뒤로 기분 나쁜 서늘한 느낌을 감지했다.
뭔가 이상했다. 짜놓은 대로 판이 흐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뭐, 뭐야?”
“주서린이라고 했나. 너, 상대를 잘못 골랐다.”
“……?”
“겁박을 하려 했으면 제대로 된 증거를 가지고 왔어야 했고, 증거가 제대로 되었다고 해도 상대방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아야 했으며…….”
저벅.
설휘는 한 발짝 걸으며 말을 이었다.
“성격을 알았다면, 겁박보다 화해를 요청해야 했다. 그래야 너희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을 테니까.”
치이익!
동시에 설휘의 검 끝에서 피어나는 회색의 기(氣).
“너…… 너…….”
순간적으로 품속에서 병기를 꺼낸 주서린. 하지만 눈앞에서 쏘아지는 기운에 그녀는 손발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거…… 귀기의…….”
때마침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음혼유령검. 귀기를 파악하면서 알게 된 무공이었다. 허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쉭!
검기는 섬전처럼 목을 꿰뚫고 지나가버렸고, 그녀는 어떠한 항거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극독이 묻어 있는 단검과 다른 한 손의 개량형 비도는 덧없이 땅을 뒹굴었다.
“흔적이야 이렇게 남기면 되는 거고, 문제는…….”
설휘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저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년이 이미 펼쳐놓은 암계를 막아야 할 텐데…… 어쩌면 좋지?”
설휘는 고민했다.
기껏 여기까지 임무를 진행했는데, 집체교육을 받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 그게 있었지.’
문득 떠오른 한 인물이 눈앞을 스치자 설휘는 곧바로 달려 나갔다.
등 뒤로 환하게 펼쳐지는 달빛이 쓰러진 주서린과 설휘를 묘한 빛으로 감싸고 있었다.
***
한 여인이 건물의 처마 위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에 청조한 옷차림. 거기에 조각 같은 얼굴.
누가 봐도 절세 미녀라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엔 노인이 신신당부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미래에 있을 그분을 도와야 한다.
‘사부님…….’
정체미상의 존재, 자신과 달리 과거로 역행하는 미지의 인물을 옆에서 돕는 것.
하물며 어디에 있을지 모를 절대자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숙명까지.
‘정말 그가 그런 인물일까요?’
천미려는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이미 극마에 올라, 세상을 보는 차원이 다른 인물.
허나, 거기까진 그래도 누구든 갈 수 있다.
문제는 탈마. 이 경지는 본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운도 중요했다.
설령 그 지고의 자리에 오른다고 하여도, 선택받은 자들과 싸워서 이겨야 했다.
그 길은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험난했고, 너무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길이었다.
아무리 사부가 내린 명이 있다 해도, 그녀는 그걸 완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진인사대천명.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말은 좋지만, 결국 그조차 승자의 말일 뿐.
패배하고 죽은 자가 최선을 다했는지 어떤지 후인들이 어찌 안 단 말인가. 그저 기분이 복잡할 뿐이었다.
‘……응?’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녀가 반응했다. 그리고 곧 한 사내를 발견했다.
“여기에 있었습니까?”
설휘였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 천미려는 직감했다.
‘달라졌구나.’
우물처럼 고요한 동공.
눈에서 이미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주변의 기운 자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깨달으셨군요.”
“어쩌다 보니 작은 소득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부탁이 있습니다.”
휘리릭.
자리에서 뛰어올라 설휘 앞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온 여인.
눈을 자극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색.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어떤 부탁을요?”
“이 근방에 은영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의 사령대장으로 소령이란 여인이 있는데, 그녀를 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
천미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상황 설명이 필요한 듯 보였다.
“그녀를 노리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혈사전주의 집체교육 때문에 몸을 뺄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가서…….”
“그러니까 왜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 거죠?”
천미려의 물음에 설휘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녀의 입장에선 소령을 지킬 이유에 대한 인과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설휘가 말에 뜸을 들이자, 천미려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아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
“과거에 말이죠…….”
“……!”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과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묘했다.
단순 과거라고 하는 것인지, 아님 회귀 전의 과거라고 하는 것인지.
“좋아요. 부군께서 시키시면 해야죠.”
따르겠다는 긍정의 말과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
그럼에도 설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하겠는가. 회귀하기 전에 만났던 여인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겠는가.
“다만.”
그녀가 잠깐 생각한 뒤 다시 대화를 해왔다.
“방해는 되지 않겠죠?”
“…….”
“당신이 앞으로 상대할 적들 말이에요. 그들의 노림수가 되면 안 되니까요.”
설휘는 여기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이제부터는 그들의 눈에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을 가능성보다 없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럼에도 설휘는 천미려를 속였다.
“그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생각과 다른 본심이 흘러나왔다.
***
십여 일이 흐른 혈사전의 이른 아침.
총교두 소천괴는 예의를 갖추며 관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공사가 다망한데 이렇게 수많은 영웅께서 본전의 행사에 참여해주시다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빈으로는 총단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장로급 고수들이 즐비했다.
표면상으로는 집체교육을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온 이들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인재 욕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강대 집체교육은 그 어려움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동시에 그 난관을 돌파한 이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검증된 이들이다.
“이번에 꽤 떠들썩했다던데?”
“뭐,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수련을 마친 애들의 눈빛이 다르더군. 고생했어.”
“하하, 과찬을…….”
그렇게 장로들과 덕담을 주고받던 소천괴의 눈에 약간의 당혹감이 일었다.
“우리 애는 잘 있겠지?”
다름 아닌 일제자 살마.
그가 의심 가득한 물음을 던져왔다.
“어……. 음, 일단 앉으시지요.”
소천괴는 어물어물 말을 돌렸다. 어쩌면 하고 예상은 했지만, 성과 발표를 하기도 전에 대뜸 물어 오는 것이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왜 그러지. 뭔가 문제라도 있나?”
“그…… 죄송합니다만 다른 제자분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
“…….”
소천괴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답을 해 주었다간, 집체교육 결과가 발표 나기도 전에 난장판이 될 수도 있었다.
“발표는 전주님의 일입니다. 소인에게 뭐라 하지 마시고 일단은 기다려 주십시오.”
“……건방진.”
썩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살마는 더는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
후우.
소천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연무장처럼 거대한 관내 안, 좌우로 이어지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또 몇 명과 인사를 나누던 중에 다시 끼어드는 인물.
“정말 오늘만 기다렸네. 귀기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어떤 성적을 받았을지가 궁금하군.”
“…….”
이제자 마후다.
소천괴는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깊이 고개를 숙여 목례로 답을 대신했다.
어찌 보면 일제자보다 더 미치광이라 할 수도 있는 인물이기에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아야 했다.
‘큰일이군.’
그러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일제자와 이제자. 이 둘이 작정하고 날뛴다면, 혈사전에 그걸 막을 사람이 있을까.
“성적보다는 과정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맛이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쯤 또 우려하던 셋째 제자인 아령도 나타났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걸어갔다.
“…….”
교육 기간에 문제가 발생했으면, 작심하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겠다는 겁박이 아닌가.
“예. 결과를 보시면 압니다.”
하지만 소천괴는 이들의 엄포가 거슬릴 뿐, 그렇다고 겁을 집어먹진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자는 혈사전주다. 팔대전주 중에서 가장 강하고 뒤가 없는 인물.
만에 하나 저들이 성과에 불복해서 판을 뒤집어엎는다면, 그 판을 아예 산산조각 낼 사람이 혈사전주였다. 그걸 되새기며 사람들을 접대하던 중.
소천괴의 눈이 커졌다.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 당신은…….”
곤마. 천마 제자 중 가장 약하지만, 역설적으로 제일 거슬린다고 평가받는 자. 그가 들어온 것이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수행 인원도 없이 단신으로, 심지어 차림새마저 소탈하게 하고 온 터라 잠깐 알아보지 못하고 헷갈렸다.
‘……자신에 차있군.’
소천괴는 솔직히 처음엔 그런 그의 행동이 달갑지 않았다.
지위가 있는 사람은 마땅히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곤마는 가진 것 없는 사람처럼 너무도 자유롭고 무방비했다.
그것이 혈사전을 대하는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집체교육을 행하고 나서 깨달았다.
‘물어뜯을 수 있는 개는 짖지 않는 법이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곤마가 굳이 화려하고 강맹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 그가 자신에 찼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내방해 주신 여러 귀빈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집체교육은 총 20일입니다. 그중…….”
장로 5명, 원로 3명, 총단의 실무진 10명과 천마 제자 넷이 참가한 관내에서 혈강대 집체교육에 대한 성과 보고가 시작되었다.
단상에 스무 명 이상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 잡은 가운데, 소천괴는 단상 위로 올라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그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혈사전주가 있었다.
“……이와 같이 각계각층에서 수많은 수련이 있었습니다. 본전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아, 교육생들의 집체교육을 주도했습니다. 그 과정에…….”
불끈.
소천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이제부터 읽어내리는 내용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번 집체 교육 중, 절반에 달하는 이들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내분, 항명, 교관 살해. 교육 첫날부터 교육생들 간의 살육이 있었지요.”
웅성웅성.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내분, 심지어 교관 살해까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령 일어났다 하더라도, 혈강대 체면 때문에라도 스스로 밝힐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집체교육을 따라가기 힘든 것도 있었겠지만, 본전에서는 애초에 이들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천괴가 마무리 부분에서 힐끗 눈길을 주자 혈사전주가 일어섰다.
“저 혈사전주는 그중에 엄중히 죄를 물을 이들을 먼저 알리겠습니다.”
뚜욱.
쇠를 긁는 듯한 그 목소리에 장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