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정면 대결 (5)
“이거, 분위기가 좀……?”
“축하받을 편안한 자리는 아닐 것 같구만.”
혈사전주의 움직임에 분위기가 변했다. 한쪽에 자리한 스무여 명의 대원들이 술렁였다.
혈강대 집체교육은 대내외적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난이도가 워낙 높았기에 최종 수료까지 탈락자가 무수했다.
때문에 수석이고 차석이고 없이, 수료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예가 되었고 출세길이 열리기도 했다.
오늘 수료식에 발걸음을 한 장로들, 혹은 원로들은 다른 많은 조직에 연이 있다. 혈사전주의 승낙만 떨어지면 원하는 자들을 데리고 갈 수 있다.
이를테면 어느 조직의 새 인원으로 충원되거나 하는 식으로.
적응이야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어쨌든 막무가내로 강호에 투입되는 화살 받이에 비해 권한과 급여가 좋은 자리. 이를테면 총단의 내빈으로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크다.
때문에 본래라면 화기애애하며 편안하게 즐겨야 할 수료식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이 당겨지고 있었으니.
“이거 그 녀석들 때문 아니야?”
“확실히. 직속 수하들이 죽었으니 천마 제자님들께서는…….”
“야, 다들 조용히 해. 괜히 저들 귀에 들어가면 이쪽으로 불똥 튀어.”
한마디씩 주고받는 대원들. 그들 역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번 집체교육은 사상 유례없이 죽거나 다친 자들이 많았다.
특히 죽은 이들 중에 교육생만이 아니라 교관들까지 있었다는 점은 혈강대 모두를 긴장시켰다.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
그렇게 날이 선 대원들 사이에서, 설휘 역시 조용히 저편을 보고 있었다.
천마 제자들.
원래는 혈사전주를 포섭하려 점잖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이다. 앞서 대차게 내지른 내기가 있었지만, 그 말을 지켜 물러갈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패했다고 수긍하기보다는, 본인 직속의 수하가 죽었으니 이를 문제 삼아 따지고도 남을 녀석들이었다.
그랬기에 한편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혈사전주는 무슨 생각인가.’
본래라면 이리저리 피하고 물밑작업으로 덮어도 모자랄 판인데, 당사자가 오히려 발칵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만인이 보는 자리에서.
***
“첫째는 바로 요수광이란 자입니다. 일제자께서 추천하셔서 입교한 자로, 교육 중에 감히 교관에게 살수를 썼습니다!”
혈사전주가 말했다. 자리에 모인 이들이 다 들으라는 듯, 그의 목청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허 교관은 즉시 반격했으나, 교육생의 예기치 못한 기습에 치명상을 입어,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뭐, 본전의 교관을 살해할 정도니 요수광이라는 자가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습니다.”
웅성웅성.
장내에 소란이 조금 일어났다.
죽은 요수광의 뒷배가 일제자 살마.
집체교육 중에 이미 이래저래 들은 이들도 있었지만, 이제껏 모르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들은 이들은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흠.”
다만 의외로 일제자는 별다른 노기도 살기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혈사전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소란이 잦아질 때에도 질문이나 별다른 목소리는 없었다.
“다음은 둘째, 귀기란 자입니다. 이자 역시 집체교육 때 수많은 교관과 동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회암전의 표적을 노릴 때, 큰 산불을 일으킨 바.”
혈사전주는 좌중을 보며 말했다.
“동료 대원들의 목숨도 교관의 목숨도 감안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상을 유도한 위험한 수단을 사용한 자였습니다. 물론 저희는, 설마 이제자께서 이런 지시를 직접 내리셨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허…….”
“음……”
장로들은 다들 불편한 기색이었다.
혈사전주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은근히 돌려 말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시킨 거냐?’라고 묻는 것보다 더욱 노골적이었다.
분명히 혈사전주에게도 생각이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는 다름 아닌 천마 제자들이다.
그들을 불순한 의도로 집체교육에 투입했든, 그로 인해 사고를 쳤든.
명백한 신분의 차이가 있기에, 이토록 강경하게 말하는 것은 뒷감당이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엄중히 죄를 물을 사내들입니다.”
“…….”
좌중은 조용해졌다.
주서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럼에도 다들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좌중에 침묵이 깔리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으으윽.
아니나 다를까.
천마 제자 중 살마가 천천히 풍기기 시작한 기운이 매우 거칠었다. 주변에 있던 장로 하나가 자리를 피할 정도였으니까.
“혈사전주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때,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건 이제자였다.
그는 살마와 달리 웃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거기에는 그만한 증좌가 있겠지요?”
“…….”
“제 수하가 불분명한 의도로 들어왔다고 규정을 지으셨고, 교관과 동료 대원들을 살해했다고 제 체면을 꽤나 깎아 먹으셨습니다. 명백한 증거 없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으셨을 걸로 봅니다만.”
슬쩍.
마후가 이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행동에 좌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렸다.
“제 모자란 수하 귀기가 일으켰다는 죽음들. 그리고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는 발언. 여기에 대해 납득할 만한 증좌를 보여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 마후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리고 살마와 눈이 한 번 마주친 후 말을 이었다.
“저뿐만 아니라 대사형 또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여기 있는 자들은, 마후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단번에 알아챘다.
혈사전주를 포섭하려 했던 처음 노선이 변경된 것이다.
오히려 그를 제거하려는 방향으로.
그러면서 이제까지의 적이었던 살마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견한 듯한 기분도 같이 들었다.
“따로 자리를 만들까요, 아니면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혈사전주의 말에 마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죠.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원하신다면.”
혈사전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커다란 두루마리를 좌중이 보는 데서 펼쳤다.
촤르륵.
애초에 많은 사람이 보기 좋게 준비한 것일까, 그가 펼쳐 보인 두루마리의 내용은 크고 자세했다.
“귀기가 사용한 무공은 총 세 가지였습니다. 그중 두 가지 무공의 흔적이 죽은 교관과 대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크게 그려진 인체도, 죽은 이들의 모습과 그들의 몸에 남은 흔적, 사인과 예상되는 무공의 일람이 다 함께 그려지고 적혀 있었다.
헌데 마후는 그걸 보지도 않고 다시 물었다.
“귀기는 어디 있습니까?”
“죽었습니다.”
“시신은 어디에 있지요?”
“불에 타고 심하게 상해서, 한곳에 안치해놓았습니다.”
“저런, 재미있군요. 저는 지금 볼 수 없는 흔적을, 여러분만 보셨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신 후 시일이 꽤 지나 있다는 말이시고.”
“…….”
혈사전주는 대꾸가 없었다.
마후가 하는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가시가 단단히 박혀 있는 말이었다.
- 나한테 보여주지도 않고, 이런 일방적인 주장을 납득하라는 말이냐?
그렇다고 귀기의 시신을 이제서라도 내어 올 수는 없었다.
이미 시일이 많이 지나서 남은 흔적도 시신의 부패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상대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이건 뭐냐, 저건 어떻게 된 거냐, 하며 뭐든 트집을 잡아 이것저것 캐물어 올 것이 훤히 보였으니.
“혈사전주의 말씀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 입장에서는 궁금하군요. 귀기는 초마에 오른 고수인데다 태생적으로 화염에 내성을 갖춘 자입니다. 그런 자를 불에 태우고 죽일 정도라면…… 적어도 어떤 인물인지는 알아내셨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혈사전주의 답변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거기서 마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거…… 조사가 모두 완벽히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 조사에 참관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제 수하를 죽였는지, 혹은 제 수하로 가장하고 다른 사람을 죽였는지, 확실히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후가 노골적으로 한쪽 대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교육을 통과한 이십여 명의 대원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조사는 혈사전에서 합니다. 다른 분들의 개입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혈사전주는 냉막하게 대답했다.
사공이 많아지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이미 나와 있는 조사 결과에 대해 다른 이들의 첨언이 이것저것 들어가면 좋을 것이 없다.
말이 참고 조사지, 목소리 큰 이들이 제멋대로 방향을 비틀 것이다. 거기에 천마 제자들의 의도가 들어갈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고.
“그 말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요?”
그때였다.
혈사전주가 말하기 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제자 아령이었다.
“……지금 그 말씀, 어떤 의미십니까?”
“제 수하 주서린이란 아이도 죽었죠. 그에 대한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혈사전주의 눈길이 더욱 차가워졌지만, 아령은 상대가 불쾌해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주서린 교육생의 시신에서는 음혼유령검, 귀기가 주로 사용하던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본전은 그와의 교전 끝에 상잔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요? 파견자 귀기의 사망 시각이 어떻게 되죠?”
“말씀드렸던, 회암전에 일어난 화재…….”
“시기가 맞지 않는데요, 그럼. 주서린의 죽음은 그로부터 반나절 이상 지난 후예요.”
“예……?”
아령의 말에 혈사전주 냉정이 깨어졌다.
아무리 천마의 삼제자라 해도, 혈사전의 중요 안건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볼 수는 없는 법.
그 짧은 시간에 첩자를 심어 넣는 것은 불가능했을 텐데, 어찌 이쪽의 빈틈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지적한 것일까.
“이상하지 않나요? 죽은 귀기가 살아 돌아와서 죽인 것이 아니라면, 주서린의 죽음이 그로부터 반나절 후라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지금 그런 주장을 하시는 근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쌍주여미(雙朱麗美). 그녀와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 아이가 있어요. 주서린의 동생이 언니의 죽음을 감지했고, 그래서 그것으로 알 수 있었죠.”
“허…….”
생각도 못 한 곳에서 탄로가 나버렸다.
분명 특이한 경우이긴 하나, 같은 날 같은 시간 태어난 쌍둥이들이 다른 한쪽의 죽음을 감지하는 일은 여러 사례에서 나타난다.
그걸 토대로 이제 와서 묻는 것을 볼 때, 삼제자 아령은 이미 주서린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작정하고 캐물을 기회를 지금까지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존의 조사는 다시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죽은 자들의 사인과 당시 사건에 대해 많은 의문이 남아 있으니까요.”
꿈틀.
아령에 이어 마후까지 강고하게 나오자, 한쪽에 서 있던 노천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곳은 혈사전. 혈강대를 키워내는 본진이다.
아무리 저들의 논리에 설득력이 있다지만, 이건 남의 집에 와서 할 법도가 아니었다.
혈강대 대원들과 교관들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살육자들의 살해 행위까지 부인하고, 거기에 대놓고 혈사전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아예 막무가내로 나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허허허…….”
많은 의심과 우려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혈사전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딴에 이리저리 땜질해서 막아놓은 방패가, 세력이라는 힘에 완전히 박살 나서 속내를 고스란히 까밝히고 있었으니까.
“그 웃음은 무슨 의미십니까. 저희가 뭔가 잘못 알고 있기라도 한 겁니까?”
마후가 물었다.
묘하게도, 혈사전주의 얼굴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건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였다.
“글쎄요. 그건 아닙니다. 사실 본 전주가 이번 일을 그냥 묻어버리려고 한 것은 맞으니까요. 하지만 다들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혈사전주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약간 씁쓸한, 그리고 웃음이 조금 섞여 있는 묘한 표정이었다.
“조사 결과를 이렇게 정한 것은, 우리 혈사전이 아니라 천마 제자님들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모든 것을 소상하게 다 밝혀버리면, 여러분들이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힘들 테니 그걸 배려해 준 겁니다.”
“……뭐라고?”
마후가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혈사전주는 시선을 들었다. 그는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던 곤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본 혈강대 집체교육에서 최고점을 받은 자는 사제자 곤마 님의 수하 설휘입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과정을 수료했고, 교육 도중 분란을 일으키는 요수광, 귀기, 주서린 등의 경쟁자들을 모두 처리해버렸지요. 매우 훌륭하게.”
“……!”
“……!”
“……!”
“본 전주와 하신 약조를 기억하신다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겝니다. 믿기 힘드시면 한번 시험해 보셔도 됩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인물 중에는.”
혈사전주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적수가 없을 테니까요.”
***
갑자기 시선이 쏠리자 설휘는 당황했다. 열심히 툭탁거리던 이들의 싸움이 이렇게 끝나고 자신에게로 관심이 몰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 저 녀석이…….”
“예상대로군.”
옆에 있던 대원들도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최고점이 누군지.
평소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사는 자들은, 설휘란 자가 사제자의 수하인 것까지 이미 들어둔 모양이었다.
파파팟.
그때, 일제자 살마가 이동했다. 이제껏 잠잠히 있었던 그는, 누르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기라도 할 듯 설휘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네가…… 내 수하를 죽였느냐?”
거침없이 살기를 피워내는 살마.
주변의 시선이 잔뜩 모여드는 가운데, 설휘는 담담히 되물었다.
“그 생각 없는 사내가 당신 수하였소?”
“…….”
도발하려고 의도한 것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즈즈즈즈즉.
살마가 살기를 뿜어내자 강력한 진기가 안을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살초가 쏘아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