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드러나는 존재감 (1)
일제자 살마.
전생에서 겨뤄본 그의 무위는 놀라운 것이었다. 일반적인 대적은 불가능. 오로지 기연으로 얻은 특수기술로만 겨우 상대했을 정도였다.
그저 마주 보기만 해도, 이쪽이 압도당할 것 같은 기운을 풍겼던 사내.
그런데 지금 설휘가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왜 이런 거지?’
언제라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과거에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은 어디에도 없다.
작금의 무예의 성취가, 극마의 마지막 단계까지 올라섰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탈마는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감히 예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극마에 오른 살마와 자신 사이에도 이 정도 차이가 나는데, 탈마에 오른 이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과연 대적이나 할 수 있을지, 그런 경지에 다다른 자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금 다가왔다.
“호오.”
한편 살마는 설휘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극마에 오른 이는 그저 눈빛만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형진기.
투기의 일종으로,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상대에게 가하는 압박이다.
그럼에도 눈앞의 녀석은 버티고 있었다.
아니, 여느 놈들과 달리, 자신의 기세를 그저 버티는 정도를 넘어 도도하게 흘려내는 것이 아닌가.
“이거…… 우연히 죽인 건 아닌 것 같군.”
짧게 말을 내뱉던 살마.
마주친 시선에서 먼저 움직인 건 그였다.
파아아앗.
엄청나게 빠른 발도술.
극마에 오른 고수답게, 검을 꺼내 뻗는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현상을 보였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혈강대원들은 눈으로 보고도 이해 못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런데.
“기습입니까?”
“……!”
어떻게 피했는지 설휘는 그의 등 뒤에 있었다.
당혹이나 긴장도 보이지 않는 것이, 여유롭게 피했다는 기색이다.
“허허허…….”
살마 역시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더니.
화르르르륵.
검 끝에 기력을 주입시키며 불꽃을 뿜어냈다.
사대극마공의 화.
불꽃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움직이는 이것은, 극에 오른 자만이 시전할 수 있는 불의 고리였다.
“나름 비기를 쓰려는가 봅니다.”
설휘는 그의 기운에 대적하기 위해 검을 들어 보였다.
검 끝에는 어떠한 기운도 담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뒤돌아 격돌했다.
카아아아아앙!
충격에 강렬한 기의 태풍이 몰아치자 근처에 있던 혈강대원들은 기함했다.
반탄력만으로 사람들이 쭈욱 밀려났고, 그러고도 남은 기세의 일부는 하늘로 치솟으며 지붕을 단번에 뚫어버렸다.
“어?”
“이게 맞는 거야?”
“살마를 상대로…….”
혈강대원들은 상황을 파악한 후 다시 한번 경악했다.
천마의 제자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일제자 살마.
그의 공격을 저런 식으로 맞상대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크읍.”
“큽.”
설휘와 살마는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지만, 단순히 힘 대결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이이익!
살마가 피워낸 극마공의 불꽃은, 검신을 타고 설휘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히죽.
그 모습에 살마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와 내력 대결이라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
“지금 불꽃이 보이나? 이미 네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넌 거기서 끝이지.”
설휘는 시선을 잠시 움직였다.
살마의 말대로 검을 타고 흘러내린 극마공의 불꽃이, 몸을 덮어 파고들고 있었다.
“이게 뭘 어쨌다고?”
“극마공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한번 혈류를 타고 들어가면, 내부의 장기를 완전히 태워버리고 하얀 재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지.”
“음.”
설휘는 그 말에 시익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몸에 피어나는 불꽃을 보며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뭐?”
“아무렇지도 않다고.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냐?”
“……!”
갑자기 당황하는 살마.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불꽃이 설휘의 몸에 들러붙은 지 한참이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진작에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어야 했는데.
“어떻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은 살마.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부릅뜨며 읊조렸다.
“너, 설마…….”
그제야 설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맞아. 나 역시 이 무공을 익히고 있지. 네가 익힌 사대극마공 중 화를 말이야.”
[사대극마공 화(火)를 익혔습니다.]
과거에 익혔던 무공을 급히 떠올린 게,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었다.
일제자의 살아있는 불꽃은, 자신의 몸속을 헤집고 들어와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그그그극.
서로의 칼날에서 불이 튀듯 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기왕 이리된 것, 살마가 내공으로 상대를 압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허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무려 오 갑자를 투입하여 짓누르는데도, 이상하게 상대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벽에 대고 힘자랑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쾅!
이내 교차된 검을 강하게 밀어낸 건, 설휘가 아닌 살마였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그는 고함쳤다.
내공의 수준도 그렇고. 상대는 보통의 능력이 아니었다. 특히.
“무슨 술수?”
“네놈이 어떻게 사대극마공을 익히고 있느냐! 그것도 화공을……. 아니, 애초에 네놈이 이 정도 무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왜? 나는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서?”
드드드드득.
설휘의 주변에 강한 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힘은 마주하는 살마의 몸도 떨리게 만들었다.
무형지기.
투기를 뛰어넘은 무형의 진기. 거기서 한 번 더 한계를 뛰어넘으면 기운만으로 상대를 해할 수 있다.
바로 심즉살의 경지.
검강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기운을 풍겨내자 살마의 얼굴에 그늘이 맴돌았다.
“이번엔 전력을 다해 덤벼야 할 거야.”
한편 설휘는 상단전의 힘을 모두 개방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신의 무위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놀아줄 의미가 있으니까.”
***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켜보던 마후가 자신도 모르고 소리쳤다.
대사형. 싸움으로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던 그가, 이름도 모르는 일개 마졸 녀석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누구야! 저거 대체 어떤 놈이냐고!”
아령은 도저히 진정하지 못하는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설휘.
겁쟁이로 보일 정도로 매사에 신중하던 곤마가 가려 뽑은 인물이다. 그러니 비범한 인물임은 예상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름 아닌 살마와 호각을 이루는 실력이라니.
‘대체…….’
그리고 곤마 역시 놀라고 있었다.
나름 다른 천마 제자들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설휘가 이 정도 실력일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나마 혈사전주가 그릇을 크게 쳐주긴 했지만, 살마가 싸움을 걸었을 때는 설휘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중에 싸움을 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굉장한 수하를 두셨습니다.”
스윽.
한편, 이제자와 삼제자가 물러선 뒤 옆으로 다가온 혈사전주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턱이 딱딱하게 당겨져 긴장을 보이긴 했지만, 도통 두려운 기색이 없는 것이, 그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전주님께서는 보셨습니까?”
곤마의 다소 두루뭉술한 말에, 혈사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봤습니다만, 못 본 거나 다름없습니다.”
“……?”
“교육 중간중간 실력을 가늠하긴 했지만, 범위를 정해두고 나면 항상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어디서 저런 인재를 구하셨습니까?”
“…….”
곤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사전주의 예상과 다르게 딱히 알아보고 구한 인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가 아닙니다.”
“……예?”
“찾아낸 것도, 키운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찾아와서 힘을 보태준 이입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지요.”
곤마는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영입해야 할 혈사전주 앞에서 이러는 것이,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득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허허. 이제 보니 사제자께서는 자존자대하심이 광오하실 정도군요.”
“……제가 말입니까?”
“예.”
하지만 그게 대체 어떻게 보였는지 혈사전주는 오히려 혀를 내둘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유사 이래로 어느 군주건, 아래의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스스로 발굴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곤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의 잠재력을 보는 눈은 없다는 자책에 가까운 곤마의 겸허함을, 오히려 반대로 받아들이는 이였다.
“사람을 보는 눈은 분명 중요하나, 그런 것은 그런 것을 잘 보는 다른 이에게 맡기면 되는 것. 단체의 수장께서 갖추셔야 할 것은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뜻?”
“예. 혹시 설휘라는 분이 사제자님의 꿈, 사제자님께서 바라는 세상. 그런 것을 묻지 않던가요?”
“…….”
곤마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깃들었다.
그러고 보니 설휘는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힘이 생기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저 자신의 속내를 말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혈사전주는 보지 않고도 모든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니 그랬던 모양이군요. 그런 겁니다. 의외로 본인은 모르시는 경우가 많지요.”
“…….”
“꽃이 스스로 걸어 나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저 향기로운 향내에, 벌과 나비가 스스로 모여드는 법이지요. 인덕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덕…….”
곤마는 저도 모르게 사르륵 가슴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약하다고 괄시받았던 삶. 그럼에도 자신을 따르는 수하를 챙기려고 했던 시간들. 그것을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가슴 아리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크흠, 음! 그, 제가 싸움의 향방을 보기 힘들어서 그러는데…….”
곤마는 급하게 화제를 돌리고 고개 또한 돌렸다.
지나치게 진탕된 가슴. 숨이 울컥거리는 게, 자칫하면 부끄럽게도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전주님께서 보시기에 그의 역량은 어느 정도입니까?”
“음, 뭐랄까요…….”
“……?”
곤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에게 혈사전주는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 번 본 무공이라도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알며, 불길이 뒤덮이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제거하는 자였습니다. 나설 때와 기다릴 때를 아는 무인이었지요.”
“…….”
“초마를 한 번 더 뛰어넘어 마공을 다룰 수 있는 극마의 경지. 거기서도 이미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강호에서 태어났다면 작게는 한 지역의 패자가 되었을 것이고, 넓게는 제일인을 다투고 계실 분. 이미…… 하늘을 보며 걷고 계신 분입니다.”
“……!”
곤마의 눈썹이 꿈틀댔다. 흥분됐다.
이 정도의 극찬을 혈사전주에게 받는다는 것이.
“그런 분이 곤마 님의 수하로 있는 것이지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눈빛이 떨렸다.
그리고 그때.
콰아아아앙!
때마침 이어지는 굉음에, 그는 싸움의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