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드러나는 존재감 (3)
임무 성공 판정.
흑마전주를 설복시켰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글귀다. 그것이 혈사전주까지 아군으로 끌어들이자, 비로소 눈앞에 떠올랐다.
[설휘 님의 대외적인 위상이 상승합니다.]
[반경 50미터 내의 밀도 높은 내공의 소유자, ‘장로’급 인사들이 설휘 님의 무공 수준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분석 중……◇]
‘이건 또 뭐지?’
시뮬레이션을 띄우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시스템이 멋대로 분석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글귀가 줄줄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설휘 님의 서열이 상승했습니다. 마교 공식 서열 9위로 등극합니다.]
[회오리치는 기공을 갈무리하는 능력을 보여, 별호 : 천류극마(天流極魔)가 붙습니다. 유무형의 기류 형태의 공격에 강한 저항을 가집니다.]
[총단 내 모든 장로와 원로, 부대의 장, 책임자와 관리자, 은거기인들이 설휘 님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설휘 님의 등장으로 곤마의 위상도 함께 올라가 세간의 평가가 상승합니다.]
[곤마가 천마 제자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인물로 거론됩니다. 지속시간 : 30일]
‘이, 이게……?’
확실하게 변화가 생겼다.
이제껏 어디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던, 존재감 자체가 부족했던 곤마의 세력이 교내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은 것처럼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인물로 거론된다는 건, 이제부터 다른 천마 제자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
‘곤란해졌어. 우리 세력이 급속도로 강해졌고, 강한 고수들도 많이 모여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쪽의 패는 드러났고.
나머지 세 제자들의 으뜸 패는 아직 꺼내지지 않았다.
“…….”
그렇다고 다시금 죽은 척 목소리를 내지 않고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는 일.
설휘가 고민하는 가운데, 글귀가 계속 이어졌다.
[곤마와의 우호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현재 우호관계 –절대 신뢰(Max)]
[절대 신뢰 : 큰 감명, 혹은 구명의 은혜를 입은 이가 가질 만한 우호도입니다. 설휘 님은 곤마에게 그저 믿을 수 있는 부하를 넘어, 서로 같은 뜻을 지닌 동지로 대우받습니다.]
[절대 신뢰의 효과가 발휘되는 도중, 낭설이나 거짓 문서 등을 이용한 이간계를 높은 확률로 방어해 낼 수 있게 됩니다.]
“허!”
추가적인 보상일까.
아니면 또 다른 임무의 시작을 알리는 초석일까.
이번에 떠오른 글귀에 설휘는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절대 신뢰. 주군과 수하가 서로를 도우며, 중간에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그 유대가 상하지 않는 관계.
평소 주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음울한 얼굴로 마음의 벽을 닫고 있던 곤마다. 그런 그가 앞으로 어떤 계교나 공작에도 자신을 믿어 줄 거라는 사실은, 후방이 크게 안정되는 것을 뜻한다.
이 특수 효과는 곤마에게만 적용되고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설휘는 엔간해서는 곤마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조금 근질근질하군.’
무엇보다 마음의 보답,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기꺼웠다.
대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던가. 천마신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협의와 신의로 뭉친 감정이 있다는 것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또한 시스템이 묘하게 변경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처럼 길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째,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조건을 달성하여 ‘겸직’이 해금됩니다. 이제부터 비밀무사 외에, 다른 직위도 동시에 맡을 수 있게 됩니다. 곤마에게 청하시겠습니까?]
‘다른 직위? 겸직?’
갑자기 생소한 글귀가 나와, 설휘는 잠깐 머뭇거렸다.
일단 동의하자, 눈앞으로 주르륵 펼쳐지는 제안들.
▶ 은영단주
▷ 천야각주
▷ 곤마의 수석군사
▷ 핵심, 호위, 비밀무사의 통솔대장.
‘아.’
설휘는 이어지는 항목을 보자마자, 이것이 어떤 선택지인지 감을 잡았다.
네 가지 직위 모두, 세력의 지존인 곤마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하는 자리.
이는 곤마의 깊은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설휘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여차하면 자신의 중요한 부대 전력을 떼어 지휘하게도 해 주겠다는 것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설휘는 우선 처음에 제시된 은영단,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현 대원들의 숫자는 수백 명.
곤마의 세력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속한 부대이기도 한 이곳은, 아쉽게도 다른 천마 제자들이 보유한 정예 부대에 비해서는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때문에 전열에 나서는 대신 후방, 측방에서 감시나 추적 같은 자잘한 임무를 주로 맡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황대가 그중에서 나름 뛰어나다곤 하나 세간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다.
예비대. 혹은 2선 부대 취급. 대우도 실력도 낮은, 덩치만 커다란 조직이다.
‘천야각은 곤마가 부리는 또 하나의 부대다.’
일전에 그에게 사로잡혔을 때 들은 기억이 났다.
대외적으로는 감식부대로 알려진 이곳은, 본교 내 주요 인물의 분석뿐만 아니라 교외의 강호에 떠도는 정보도 함께 수집한다.
은영단이 나뭇가지 같은 정보를 우루루 모아오면, 그 정보를 가공하고 내밀한 흐름을 읽어, 적의 진의를 밝히거나 큰 책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체.
대부분이 실내에서 보고서만 들여다보기에, 외모만 보면 무예를 모르는 백면서생처럼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원 하나하나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천야각은 곤마가 직접 손을 대어 키워온 알짜배기 정보 단체.
후에 알았지만, 과거 자신에게 몇몇 가르침을 준 만답서생 그가 이곳 출신이었다.
은영단처럼 전투력이 부족한 어중이떠중이가, 적성에도 안 맞는 정찰 임무를 행하며 억지로 실력을 기른 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는…….’
곤마의 수석 군사.
가장 가까이에서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일인 군단인 곤마에게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하며, 여차하면 그가 위태로울 시 호위까지 맡게 되는 명실상부한 복심의 위치.
‘마지막은 싸움터를 이끄는 선봉장이구나.’
남은 것은 곤마의 정예부대를 통솔하는 역할인데, 이건 다른 말로 싸움의 제일선에 언제든지 투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처럼.
곤마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핵심 자리를 설휘에게 그대로 내밀었다.
“뭘 고민하느냐? 어차피 너라면 이 자리 중 어느 것을 맡든지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네가 이중에서 무얼 고르건 분명히 뜻이 있을 거라고, 곤마 자신을 돕는 일에 진심을 다할 것이라고, 맹목에 가깝게 믿고 있었다.
고맙기는 한데, 동시에 짐이 너무 무거워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거 조금 고민을…….”
정찰대, 정보 수집, 수석 군사이자 측근 호위, 그리고 전투부대의 선봉까지.
하나같이 중요하지 않은 책무가 없다.
몸만 여럿 있다면 다 맡겠다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결국 딱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고.
툭. 툭. 툭. 툭.
고민에 빠진 설휘가 팔을 두드리는 동안, 곤마는 느긋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설휘가 뭘 고르든 그 선택을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그에겐 그만한 공이 있었고, 그리고 설휘의 성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까.
하지만 사실, 그도 내심 설휘가 맡아줬으면 하는 자리가 있었다.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의 세력의 인적 자원은 다른 곳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던 설휘는 결국 선택을 했다.
<은영단주를 맡으시겠습니까?>
“……은영단을 맡는다고? 정말이냐?”
곤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내심 가장 맡아줬으면 했던 자리가 은영단주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세 바뀌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은영단은 전반적으로 무력이 부족한 곳이다. 본래라면 단주가 단원들을 조련하는 책임을 맡으나, 현 은영단주는…….”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줘서 시원해진 얼굴에서, 너무 고생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스런 얼굴로. 또 혹여 억지로 힘든 일을 맡는가 싶어 미안해하는 얼굴로.
은영단은 곤마의 세력 중 가장 약한 집단이다.
그런 이들을 거느리고 키우는 단주 역시, 무위가 뛰어나거나 남을 가르치는 교습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기초가 부족하고 믿음을 주기에는 무공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요. 그래서 제가 적격입니다.”
마교 내 많은 무사가 그렇듯이, 현 은영단주 역시 한순간에 마공을 각성해서 경지에 오른 이가 직위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단원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필 깜냥이 안 되는 것이다.
반면 설휘는 하류무사 밑바닥 인생을 구르고 구르며 차곡차곡 단계를 밟은 이였다.
그 역시 따지고 보면 시스템이라는 기연을 통해 급성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진 무력이 부족해 홀대받는 밑바닥 무사들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급 마인들은 강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실수나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고, 그들의 무공을 손봐줄 스승도 없습니다.”
“음.”
“특히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임무. 의미 없는 순찰 뺑뺑이나, 다른 조직 상급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단원들을 동원해서 타 부서의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설휘의 말은 현 은영단주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상 강자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마교의 대부분 조직의 장이, 그런 식으로 수하들을 물건처럼 마구 사용한다.
하급 무사들의 역량이 오르지 않는 건, 그들에게 향상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시간과 가르침의 기회를 얻지 못하니, 자신의 무위를 발전시킬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쉽고 빠른 성취를 얻는다는 금지된 마공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구나.”
설휘의 긴 설명에 곤마는 한탄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일할 자리의 여건을 알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니, 정말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군. 은영단을 잘 부탁하네. 은영단주.”
“예.”
눈을 빛내며 말하는 곤마에게, 설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제 이걸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군.’
곤마에겐 이리저리 많은 이유를 대긴 했지만, 사실 설휘가 은영단을 선택한 이유는 달리 있었다.
바로 소령.
그녀에게 더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접근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살고 있을 과거의 소령처럼은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생에는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다. 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는 지독한 싸움터에서.
부디 그녀만은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현생을 사는 설휘의 작은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