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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272화 (276/379)

272화. 드러나는 존재감 (4)

“더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이 마지막인 것 같군요.”

창밖을 응시하며 여인이 말했다.

백발의 머리카락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

흑요석처럼 맑고 검은 눈동자에 섬섬옥수.

손가락은 악공(樂工)의 것처럼 길고 가느다랬다. 저 손으로 끔찍한 한기(寒氣)를 뿜어내던 것이,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군요. 이자는…….”

흠칫!

천미려와 눈이 마주친 소령은, 지레 시선을 돌려 바닥에 누운 시체 한 구를 보았다.

“……적건(赤建)이라고 불립니다.”

마침 그는 소령도 아는 자였다.

마교 공식 서열에 55위로 등재되어 있는 인물

암습에 능하며 이제껏 단 한 번도 임무 실패가 없었다는 이름난 자객이었다.

애초에 그는 출신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진 호리동 7기 출신의 최종 생존자.

허나 계속된 정신분열로 수많은 자해와 자살 시도를 계속했고, 그러다가 한 노인에 의해 살아난 뒤, 그의 뒤를 따라 은자림으로 향했다고 알려진 인물.

“자객들 사이에서는 전설과도 같은 자인데…….”

그런 그를 손쉽게 잡은 천미려를 곁눈질하던 소령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싸우는 모습도 보지 못할 정도로, 단번에 제압해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웬만한 사람들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할 만한 솜씨더군요. 어디서 온 것 같나요?”

천미려는 뭐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닌 것처럼 담담히 물었다.

사실 그녀는 현직에서 물러난 지 꽤 오래된 터라, 현재 본교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을 잘 알지 못했다.

천마 제자들 간의 후계자 쟁투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건 천미려가 소녀일 때도 있었던 일.

거의 마교의 전통에 가까운 일이라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소령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도 딴에는 정찰부대인 사령대의 수장이었지만, 시체가 된 적건으로부터는 뭘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지극히 담백한 암살자로, 지닌 소지품도 임무에 필요한 장비나 무기들뿐.

어떤 제자의 소속인지, 어떤 명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면식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천미려의 말에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워낙 유명한 이니 알아본 것이지, 적건이 자신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전 급행으로 임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저 은영단의 흔한 무인이었을 뿐이니까.

“흐음. 배후가 분명 있을 거예요. 여기는 분명히 사제자 곤마의 구역인데 제멋대로 날뛴 걸 보면……. 그런데 왜 당신을 노렸을까요?”

천미려가 묻자 소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모르겠습니다.”

그녀도 알고 싶었다.

왜 손 씻고 은퇴까지 했던 전설적인 살수가 여길 왔는지, 그리고 뭐가 있어서 자신을 노렸는지.

지금 눈앞에 있는 천미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은 분명히 자신이었을 것이다. 적건이 아니라.

“흐음.”

천미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턱에 대고, 뭔가 생각하는 듯 한 발짝 한 발짝 걸었다.

자박. 자박.

“…….”

단순한 행동이었는데, 소령은 다시 한번 놀라고야 말았다.

하얀 교구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는 은빛.

나이 들어 푸석푸석한 노파의 백발과는 달랐다. 기름이라도 바른 듯 윤기가 흐르는 머리. 그리고 무복을 입은 채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잘록한 몸의 곡선.

같은 여인으로서 샘이 날 정도로 빛나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미모 때문이었다.

“혹…… 설휘 님을 만난 적이 있던가요?”

“예…….”

소령은 무심결에 끄덕였다. 그러고는 되레 반문했다.

“……네?”

얼마 전, 은영단의 영역 내에 들어온 사내. 용진에게 이름을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 한번 지나친 사람이 여기에서 왜 나온단 말인가?

“그렇군요……. 음, 이제 이해가 가네.”

“……?”

의아해하는 소령을 두고, 천미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휘. 평시 항상 얌전하고 잠잠하던 그가, 단 한 번 돌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혈강대 집체교육에 참석한 중 짧은 휴식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한 번 찾아갔다는 것.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일이지만, 의심을 품고 ‘혹시?’ 하고 추측을 계속하다 보면 한 번쯤 찔러볼 만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마 이자는, 천마의 제자인 곤마를 노린 자가 아닐 것이다.

혹여 있을까 한, 설휘의 약점을 공격하기 위해서 겨눠진 칼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계속 이렇게 소저와 함께 지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그보다…….”

소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모든 게 신비투성이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타난 사람.

아니, 정말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흡사 얼음의 선녀 같은 초월적인 미모도 미모지만, 무위 역시도 어마어마한 고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보호를 받는 것도 그렇고, 며칠 함께하는 동안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그녀가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것도 그랬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보다 적들이 어떻게 나올까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네?”

소령의 의아한 표정에 천미려는 짧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적들이 더 오지 않으면 제 역할은 거기까지고요.”

천미려는 대충 예상이 갔다.

저들이 소령을 노린 이유는.

그녀가 설휘의 약점이기 때문일 터.

그걸 알았기에 설휘가 먼저 움직인 것일 테다.

‘깊은 관계겠지. 지인이든 여인이든…….’

어느 쪽이든, 이런 상황이 그녀로서는 그다지 달갑지가 않았다.

마교에서, 친인은 곧 약점인 세상에서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그녀가 차라리 고독할지언정 그런 인물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런 그녀도 결국 설휘에게 마음을 열고 말았으니, 이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리라.

“저부터 물을게요.”

천미려가 돌아보며 짧게 읊조렸다.

“그의 눈에 비친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내가 지켜줘야 하는 건가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소령도 천미려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상황이 그녀들에겐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흐르던 그때.

“대장.”

드르륵.

문이 열리며 사내가 말을 건네왔다.

“오늘도 수업 안 하십니까?”

“요 며칠 방에만 계시고…….”

사령대원이었다.

그들이 한두 명씩 모이고 있었다.

“아니,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어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천미려는 그곳에 없었다.

대체 언제 갔는지, 애초에 있었는지도 의아할 만큼 흔적도 없이.

그것이 묘한 기시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

“상견례 정도는 해야겠지. 새 식구가 들어왔으니.”

혈사전주의 영입에 성공한 곤마는, 곧바로 수뇌부들을 불러들였다.

명목은 축하이자 서로 얼굴 익히기였지만, 실은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 때문에 얼추 반 시진.

사전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소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총단 내부 평가가 바뀌었을 테니까…….’

이미 회의실 후원에 도착한 설휘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껏 항시 조용했던 곤마.

천마 제자 중 사제자의 전력이 새로이 평가를 받았다.

전에는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거꾸로 제일 강하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설휘와 그가 영입한 은거고수들.

추가로 총단의 여덟 개의 전대 중, 무려 2개의 전대가 아군으로 들어왔다.

지금의 세력은 일제자 살마의 전력을 가뿐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단, 드러나 있는 전력에 대해서만.

“가만…….”

설휘는 잠깐 주변을 거닐 생각으로 이동하다가 한 지점을 보고 반색했다.

놀랍게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정확히는 꽤 오랫동안 안 보였던 글자가 진하게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다시 생겼어!’

전투방식 [!]

턴제와 시뮬레이션을 버리고 선택했던 AI.

그를 불러냄으로써 수많은 미래의 갈림길에서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필연적으로 만남의 시간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었는데, 이제 다시 그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전생의 시간이 보태지고, 현생의 시간이 더해지며 이제 AI를 사용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설휘는 그와 대화할 수 있다는 반가움과 함께, 그동안 그 없이 겪었던 수많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전생에서 살마와 싸웠던 기억.

살마를 죽인 후 천마를 마주했던 기억.

다시 현생의 삶으로 돌아와 동굴에서 겪었던 것들, 그리고 천미려를 찾아 나섰던 여정까지.

‘이럴 때가 아니지. 무엇부터 물어볼까.’

잠깐 넋을 놓고 있었던 설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AI 설휘. 그에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걸 물어볼까?

지난번에 듣기로, 그에게는 수많은 환생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삶도 겪어봤을 것이다.

‘아니면 무의 성취에 대해서 물어볼까?’

손쉽게 탈마에 오르는 방법. 힘이 최고의 명분인 마교에서, 경지의 상승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도 있다.

‘아니,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해.’

과거와 달리 곤마의 수하들은 강해졌고, 이제 그의 세력은 교단의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니 일단 마교 안에서의 문제는 제외.

그러고 보니…… 화산파의 구종명 장로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시간을 아껴야 해.’

이번에는 숨 한 번 쉬는 것도 계산해서 써야 했다.

지난번에 AI를 불러들인 후, 이번에 다시 만날 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짧게, 그리고 빠르게 물어 그의 지혜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설휘는 몇 가지 가정을 정리했고.

‘그런데, 묻는다고 바로 응답할까?’

전투방식을 바꾸기 전에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전투방식을 바꿉니다.>

그건 단순한 우려였다.

“보기 좋아 보이는군.”

눈앞에 그 녀석이 웃으며 나타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오래된 친우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오래 기다렸다! 나는…….”

“아, 너무 조급할 필요 없다. 설휘.”

그를 보자마자 뭐라고 입을 열려던 설휘.

처억.

하지만 녀석은 이미 짐작했는지 손을 내밀어 그의 다급한 말을 막았다.

“궁금한 점이 많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보아하니 네 무공 수준은 이미 극마의 극에 다다라 있다. 이 벽만 넘으면 탈마가 될 터. 그리되면 나와의 소통은 언제든 이루어질 거다.”

“아…….”

설휘는 그가 말한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탈마. 세상 만물이라는 우주(宇宙)의 기운과 소통할 수 있는 경지.

거기에 도달하면 이 무형(無形)의 존재를 언제 어느 때든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제한 없이.

“성장하는 추세를 보니, 큰 문제가 없는 이상 무난하게 탈마에 이르겠군. 이로써 네 번째인가…….”

“네 번째…….”

설휘는 혀를 내둘렀다.

그를 거쳐간 수없이 많았던 선택받은 플레이어들.

그중에서 고작 세 명밖에 탈마에 오르지 못했다니. 새삼 자신 앞의 벽이 얼마나 흉험한지 실감이 들었다.

“그래. 어디 보자……. 흑마전주와 혈사전주를 영입한 뒤 살마와 싸움이 있었을 테고, 세력이 늘어난 곤마가 수뇌부 인사 모두를 불러들인 상황. 맞나?”

“허…….”

묻지도 않고 바로 짚어내는 AI.

설휘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자신의 무공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AI에게 자연스럽게 교감된 듯했다.

“맞아.”

“그럼 너도 이제 곧 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겠네.”

“무슨 문제?”

의아하다는 듯한 설휘의 반응에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목숨 말이야.”

“목숨……. 내가 죽나?”

“아니, 오히려 반대다.”

“……?”

이상한 소리에 설휘가 반문하려 했지만, AI가 더 빨랐다.

“너를 위기에서 구했던 목숨 말이야. 이제 계속해서 생겨날 거야. 원하면 언제든 얻을 정도로…….”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냐?”

“처음엔 그런 줄 알았지. 나도.”

마지막 말을 내뱉는 AI의 표정이 썩 어두워졌다. 장난기가 없는 어둡고 칙칙한 모습으로.

“어쨌든 곧 알게 될 거야. 목숨이 늘어난다는 게 그저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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