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드러나는 존재감 (5)
[초당 1일간 AI 불러오기 불가]
32…… 33……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설휘는 AI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스템이란 녀석이 만들어놓은 규칙.
여벌의 목숨이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그런 세계였기에 이제껏 원래라면 넘을 수 없는 벽들을 넘어왔다. 그런데.
목숨을 얻으면 오히려 좋지 않다고?
그럼 위험할 때 그냥 죽으라는 말인가.
“말로 설명해 줘봤자 알 수 없을 거다. 직접 체험하는 수밖에…….”
AI는 더는 여기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모습이 아니었다.
억겁의 세월을 다시 더듬어봐야 하는 게 싫어서일까.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너도 겪은 적 있어?”
이번에 설휘가 물었다.
사실, 그로서는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제껏 ‘가장 높은 난이도’를 선택해서 힘들게 극복해가며 여기까지 왔다. 죽어라 노력했고, 운도 다행히 따랐다.
그 덕분에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 되었다.
무공은 천지차이로 높아졌고, 신분은 곤마의 지척에서 후계자 쟁투를 끌고 나갈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다만, 무공이 높아지며 생긴 자신감만큼, 변화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커져 있었다.
“물론이지.”
“어떻게 됐어? 아니, 내가 길을 잘 찾아온 건가?”
거듭되는 물음에 AI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지 알겠군. 그래, 넓게 보자면 방향은 맞다. 지금 네가 택한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이긴 해.”
“아…….”
방향이 맞다.
그 말은 좋은 말 같지만 동시에 등골이 서늘했다.
AI. 그가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던 길. 그래서 결국 실패를 겪었던 길이라는 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다만 방향은 맞다지만, 제대로 된 길이 맞는지는 나 역시 알지 못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가장 많은 좌절을 맛본 게 이 길이니까…….”
“…….”
혹시 했던 생각을 AI의 말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당장은 형편이 좋아도, 그 끝에는 결국 항거할 수 없는 높은 벽이 있다는 것 일터.
“그럼…… 왜 이 방향이 맞다는 거지?”
설휘는 되물었다.
결국 마지막에 막힌다면, 저 대단한 AI도 극복하지 못한 길이라면, 어떻게 방향이 맞는지 틀린지 안단 말인가?
“애초에 다른 길은 곤마의 도움을 받지 못해.”
“……곤마?”
“흐음.”
여기서 AI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만이 아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는 듯했다.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을 테니 알고만 있어라.”
그는 설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이 시스템의 마지막. ‘플레이어 천마’와 싸우기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은, 곤마를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것. 그리하여 ‘플레이어 천마’와 곤마가 싸우게 함으로써 최대한의 피해를 입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할 거다. 그게 제일 효율적이니까.”
“곤마를……?”
“그래. 천살성의 힘은 절대적이다. 그 힘은 플레이어 천마에게도 통할 정도지. 그러니까 너는 마지막까지 곤마와 우호를 유지해야 하고, 절대로 죽게 해선 안 돼.”
천살성.
설휘는 새삼 곤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최후의 적. 이 세계가 만들어낸 절대자에게조차,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네가 오를 수 있는, 아니 내가 최고로 오를 수 있었던 경지는 탈마. 그중에서도 초신까지였다. 안타깝지만 네가 날 뛰어넘을 만큼 강해질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
“탈마의 경지를 세부적으로 알려주자면, 총 네 단계. 초입과 기신. 초신과 마신으로 알려져 있다. 초신에 이른 내가 이기지 못했으니, 플레이어 천마는 아마도 ‘마신’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마신…….”
탈마에서도 극의 극.
대체 얼마나 강한지 가늠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네가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탈마의 초입이다. 반면 현 교주인 천마는 탈마의 기신까지 올라와 있다. 그를 이기려면 탈마의 기신에 오르거나 그와 동등한 마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는 설휘를 보며 말했다.
“절대극마공을 얻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다. 시간과 노력을 절대적으로 줄여주지.”
“아…… 그 무공은…….”
“그래, 곤마가 제시하는 삶의 두 번째. 그의 호위무사를 선택하는 길로 가야 얻을 수 있어.”
기억이 난다. 절대극마공.
이전에 그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가르쳐줄 순 있으나, 그리되면 탈마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잃게 된다는 말을.
아마도 절대극마공 원문에는 보는 해석에 따라 이해를 달리 하는 구문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절대극마공 없이 탈마에 오를 방법은 없어?”
“있기는 있겠지. 스스로 깨닫는 방법이나 절대극마공보다 더 강한 무공을 얻는 거. 하지만 둘 다 쉽지 않다. 탈마에 오른 고수가 현 천마 외에 지금 생존하고 있던가?”
“…….”
듣고 보니 그건 그랬다.
절대극마공 같은 최강의 무공. 그보다 더 강한 무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있었다면 진작에 소문이든 뭐든 두각을 드러냈을 터였다.
“……그럼 결국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중 두 번째. 호위무사가 되는 것. 그 외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탈마에 오르는 방법뿐이라는 거군.”
“그런 거지.”
“…….”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얼마나 자신에게 그런 수련시간이 주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급변하는 정세에서 몇 번의 싸움이 일어나고, 몇 번의 죽음을 맞게 될지도.
AI는 아마도 그런 걸 감안해, 두 번째로 돌아가라는 얘길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곤마의 회의실에 수뇌부들이 모일 거다, 너에 대한 칭찬과 자격이 주어질 거다. 그 이후,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날 거고. 이번엔 시간의 불러들임도 같이 일어날 거다. 그때 너는…….”
“……이 길이 정말 최선이었어?”
계속되는 AI의 설명을 듣던 설휘가 물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좌절을 겪은 AI.
그의 진실한 얘길 듣고 싶었다.
“정확히는 마지막까지 도전했던 길이지. 결국 넘지 못했지만.”
“그때 넌 탈마의 기신, 초신, 마신 중에서 초신까지 갔고?”
“그래.”
“흠.”
설휘는 여기서 고민해 보았다.
그간 AI의 조언은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안겨다 준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요소가 있다면, AI가 말한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는 수천만 번의 죽과 삶 속에서 터득했던 지혜를 전수해 주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삶은 시스템의 벽, 플레이어를 넘지 못했다.
그 말은 그를 따라가서는 벽을 넘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건데, 이 역시 보통 일은 아닐 터.
하여 설휘는 선택은…….
“알겠다. 그럼 나도 네 방식을 따르마. 곤마가 제안하는 두 번째 방식…….”
“아니, 바로 선택하지는 마라.”
AI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
설휘는 이게 또 무슨 소린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한 번. 지금 이 방향대로 가면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이 나오긴 해.”
“네가…… 가지 못했던 길?”
“그래. 거긴 내가 가지 못했어. 정확히 말하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르고 지나갔지.”
“…….”
“물론 이 방향으로 죽지 않고 가면, 오로지 네 능력으로 탈마에 올라야 하고, 적어도 초신까지는 다다라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라.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니까.”
“왜 그렇게 말을 돌려? 그렇게 중요한 기회면 그냥 말해주면 되지 않아?”
“아니. 직접 겪어라. 말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괜히 변수를 두고 싶지 않아.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딱 반 시진. 회의가 끝나면 알게 될 테니.”
“대체…….”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이제껏 겪었던 난이도와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방향으로 걸어가는 너를 지켜보고 싶군.”
“그게 대체…….”
[366일. 이 기간 동안은 AI를 부를 수 없습니다.]
AI는 다시 한번 시간제한을 알리며 그렇게 사라졌다.
***
설휘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반겼다.
“왔느냐.”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설휘가 영입한 절대고수 두 사람. 초아란과 악비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여전히 소녀 같은 외모인 초아란과 달리, 악비는 그새 살이 좀 쪘는지 두툼한 배를 잡으며 인상 좋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설휘는 빙월신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허. 사제자님의 최고의 심복이 이분이군요.”
그리고 한쪽에서 손을 들며 인사하는 인물.
흑마전주였다.
덩치와 인상이 마치 범을 연상케 한다. 설휘는 그런 그를 포섭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여어…….”
그리고 흑마전주와 자리한 인물.
평범한 체격의 사내였지만 실은 이곳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자, 혈사전주였다.
‘잠깐…….’
둘러보던 설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한 천미려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령을 잠깐 호위하라고 맡긴 그녀였는데…….
‘뭐, 그녀에겐 이런 자리가 불편할지도.’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쪽에 귀속되는 걸 싫어했던 그녀였으니까.
드르륵.
그리고 문을 열며 걸어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밝은 표정이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으니까.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저는 교주님의 네 번째 제자, 곤마입니다.”
그 말에 다들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설휘 역시 한 발치 물러서서 그를 바라봤다.
아마도 곤마가 고대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기록하시겠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기록창.
정말 오랜만이었다.
■ 천력 95년, 제2장-5. 동행, 그로 인한 수많은 갈래 길.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세 가지 기록.
다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다.
설휘는 여기서 첫 번째를 선택했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고, 모든 임무를 성공했으니 굳이 필요가 없을 듯했다.
■ 천력 96년. 권력 재편의 날!
그리고 이렇게 변경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불러들이겠습니까?>
‘이건…….’
새로 생겨난 질문.
이게 AI가 말했던 건가.
목숨을 잃지 않고, 시간을 불러들이는 방식.
- 아니, 바로 선택하지는 마라.
그리고 설휘가 흠칫하던 그때.
이것이 나왔다.
<주의 : 현 상황에서 시간을 불러오면, 규정 외의 미상의 존재(?)가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미상의 존재?
설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