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빈틈을 만들 인물 (1)
시간의 불러들임.
글귀 앞에서 설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AI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현생은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
수많은 죽음과 환생을 반복했던 그마저도 자신이 제대로 걷지 못했던 길이라고, 지나간 후에야 알아차린 작은 분기라고 말했다.
그 말은 추정컨대, 지금 시스템이 눈앞에 표시하는 ‘미상의 존재’와 깊이 엮이지 않았다는 뜻일 터.
달리 말하면.
이번 생은 미상의 존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이, AI도 모르는 미래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얘기인 거다.
<시간을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하여 설휘는 시간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사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곤마가 제시하는 두 번째 삶으로 가려면 그에게 준 황가산 지도를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지금은 시간만 기록하는 게 나았다.
사아아아---
기록이 끝나자마자, 잠깐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밝은 기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들리는 얘기들.
“일제자는 분명 지금부터 움직일 거요. 세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고.”
흑마전주의 얘기였다.
그는 총단 내 팔전주 중 하나. 권력투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건 이리저리 멋대로 휘둘리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에 따라, 자신을 그렇게 휘두를 수 있는 천마 제자들의 성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냥저냥 웃으면서 지켜볼 상황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혈사전주도 동의했다.
“아마도 은마원에 직접 들어가겠지요?”
“그렇겠지요.”
“가볍게 볼 일은 아니군요. 실력도 뛰어나지만, 천마의 일제자란 명분이 있으니…….”
흑마전주의 말에 혈사전주가 혀를 찼다.
은마원은 마교의 은거기인들이 머무는 장원이다.
그런 곳으로 일제자가 직접 들어간다? 솔직히 이런 상황은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팔전주 중 두 명.
흑마전주와 혈사전주의 합류로 인해, 일제자의 세력은 곤마의 세력에게 밀리게 되었다. 특히 병력보다 절대고수의 숫자가 부족했다.
그러니 은거기인, 현역에서 물러난 은퇴 고수부터 차례로 찾아가는 행위가 이어질 터.
“상황이 이리됐으면…… 우리가 삼제자 정도는 바로 쳐야 하지 않소이까?”
한쪽에 있던 악비가 슬쩍 끼어들며 물었다.
일제자 살마가 자기네 전력을 강화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 것이다. 그러니 일을 벌인다면, 이참에 세가 약한 삼제자 정도는 처리하는 게 좋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글쎄. 이미 다른 놈에게 빠르게 흡수되고 있을 거 같군.”
“……?”
초아란이 툭 던진 말에 시선이 몰렸다.
“아령이라는 년, 머리가 비상한 년이야. 지금의 권력 구도를 놓고 보았을 때, 자신이 가장 손해를 입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될 거야.”
“허면, 이제자인 마후에게 붙는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봐야지. 곤마와 살마는 권력투쟁의 머리가 되어 싸우고 있는 상황이니, 마후는 그 점을 잘 파고들 거야. 아니, 이미 둘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지.”
따로 공표는 하지 않았지만, 흘러가는 추세가 그렇다.
현 제자들의 힘의 배분은 곤마와 살마에게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허면, 우리는 앞으로…….”
“삼제자를 치는 게 어떨까 합니다.”
“……!”
“……!”
악비가 다시 운을 떼자마자 곤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를 본 흑마전주와 혈사전주는.
“저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함께할 의사를 표명했다.
초아란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기왕 칠 거라면 빠를수록 좋아. 마후와 아령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고 해도, 이제까지 잠재적 적이었던 세력과 하루아침에 하하호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머리들이 화친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손발까지 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까.”
악비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좋은 지적이군. 삼제자의 세력 중에서 유독 휘청거리는 곳이 있을 텐데……. 음. 그녀가 가진 부대가 뭐가 있었지?”
곤마 뒤쪽으로 시선이 옮겨지자, 그를 수행하던 무사 하나가 예를 표했다.
“사애원(邪崖圓)과 흑령칠비(黑鈴七飛)가 주력 부대이나, 은영단 수준 정도로 파악되며 위협적이진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극마고수는?”
“두 분 계십니다. 모두 은거고수였던 분으로 한 분은 왕모력이라 불리며, 또 한 명은 마양천(魔陽天)이라 합니다.”
“양천이라면…… 귀수검혼(鬼手劍魂) 양천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놈만 피하면 되겠군.”
악비가 녀석을 안다는 투로 말하면서 대략적인 무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말고 피해야 할 상대라고.
거기서 곤마의 호위무사가 조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극마고수까지는 아니라 해도, 삼제자 아령을 지지하겠다고 한 옛 장로들의 세력. 그들이 가세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우리 측의 피해가 어찌 될지 가늠하기 어려워집니다.”
“음, 장로들이라. 무시할 게 못 되는군.”
흑마전주가 턱을 쓸었다.
싸움을 승리로 이끌더라도, 피해가 너무 커지면 싸우지 않음만 못하다.
기껏 삼제자의 세력을 부순다 해도, 그로 인해 이쪽의 세력이 줄어든다면, 기껏 얻은 세력의 우위를 잃고 다시 일제자 살마에게 밀릴 수도 있는 것이다.
혈사전주가 말했다.
“설득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늙은이들도 세력의 우위가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쯤이면 알 거 아닙니까.”
확실히, 아령의 세력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장로급 인물들이 그녀를 적극 지지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다.
그 말에 흑마전주가 대꾸했다.
“글쎄요. 애초에 그들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삼제자를 따르는지 생각하면…… 쉬울 것 같지는 않군요.”
“젠장. 교주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인지.”
나쁜 생각은 아니었지만, 설득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 장로급 인물들은, 다른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누름돌 역할로 투입된 이들.
일제자 견제를 위한 이제자와 삼제자의 존재.
이는 후계자 쟁투가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무료하게 느낀, 교주 천마의 입김으로 인해 맞춰진 저울추다.
그러니 장로들은 자신들의 뜻에 따라 참전한 인물이 아니다.
하여 의외로 쉽게 회유될 수도 있고, 혹은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찔러 보기. 설득을 시도하는 순간, 바로 적대적인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까보기 전까지 흉인지 길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니.”
“머리가 아프군요. 일단 그들은 배제하고 생각해 보지요. 장로파를 제외하고 나면, 삼제자 아령의 병력은 어느 정도 되지?”
혈사전주가 묻자, 곤마의 호위무사가 대답했다.
“대략 팔백 명 정도. 그중 절반은 절정고수이며, 대략 서른 명 정도가 초절정 고수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극마고수 둘 더하고.”
한번 턱을 매만지던 흑마전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든 생각인데, 전격적인 기습은 어떻겠습니까?”
“기습이요?”
“뱀을 잡으려면 머리부터 노리는 것이 정석. 삼제자 아령을 빠르게 끊어내면, 나머지 병력들은 어중간한 놈들 아닙니까. 반면 장로들의 결합은 느슨하고.”
“그래서……?”
“준비된 정예와 반드시 회전을 붙을 필요가 있습니까? 병법 중에는 우회기동(迂廻機動)이라는 게 있지요. 적당한 미끼나 유인으로 장로들의 시선을 끌고, 신속하게 삼제자를 제거하는 겁니다.”
“……!”
“……!”
흑마전주의 말에 다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령의 최대전력은 그녀 본신의 세력이 아니라, 교주 천마가 붙여준 장로급 고수들이다.
그들을 정면으로 깨부수자면 곤마의 세력도 분명 큰 피해를 입으리라.
하지만 싸우지 않는다면?
장로급 인물들은 어차피 자의로 아령에게 신속(臣屬)한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내키지 않는 주군을 모시고 있으니 평시에는 교류나 명령을 내리기에 힘든, 부담스러운 부하들일 터.
“바람처럼 달려들어 머리를 먼저 쳐내고 나면,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고 난 후. 싸울 이유가 없어졌는데 굳이 우리와 죽자 사자 붙으려 할까요?”
“아슬한 줄타기군요. 이건 도박 수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전력을 투사해서 촌절 간에 승부를 내야 한다는 건데.”
“하지만 도박은 원래 따면 엄청나게 이득이지요. 뭐…… 잃는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흑마전주와 혈사전주가 말끝에 피식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엔 곤마를 향했다.
“그래서 어찌할 겁니까. 우린 준비되었는데.”
“음…….”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곤마는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본래 이 자리는 축하의 의미와 함께 앞으로의 향후 계획을 만들기 위한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삼제자를 치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오고, 그것도 최대한 신속히, 전력을 다해서 한 번에 머리를 끊어내자는 대담한 발언까지 나왔다.
결정에 대한 확답을 내려야 했다.
‘성공한다면 전부. 실패한다면 역시 전부…….’
잃느냐. 아니면 얻느냐.
지금 이 순간 내리는 결정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 모두의 명운을 정하는 것이다.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부담일 수밖에.
그래서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음…….”
설휘도 부담스러웠다.
곤마의 성격은 그도 잘 안다.
그는 딱히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야욕이나, 반드시 차기 교주가 되겠다는 야망 같은 것이 없는 이였다.
그저 가진 바를 지키며, 크게 무리하지 않는 한에서 따르는 이들을 지키는 것.
본래 곤마의 목표는 그 정도로 소소한 것이었다.
헌데 갑작스럽게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전투. 그것도 다른 제자의 목을 치는, 혈투를 벌여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힘들다는 말도 일리 있어.’
그럼에도, 만약 기회가 있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마후와 아령이 만나서 아무런 병력 손실 없이 힘을 합친다면.
단번에 살마를 위협할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들도 만만히 볼 수 없는 병력이 갖춰지는 것이다. 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아마 천마, 마교주는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지도. 그런 생각까지 하며 설휘는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는 좌중을 바라보며, 특히 곤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은 주군처럼 고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처럼 고민하지 않는다고? 무슨 뜻이냐.”
“작금의 상황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선택의 기로. 범인이라면 망설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번 싸움에는 삼제자뿐만 아니라 그저 그녀의 수하란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어차피 죽여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평소 사제자님은 양보하셨고, 그리고 양보한 만큼 오히려 잃어 오셨습니다. 이제는, 잃은 것들을 가져와야 할 때입니다.”
“설휘…….”
“예. 저는 싸우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웃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조금 전까지 나약한 의지를 내보이던 곤마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알겠네. 준비되면 내게 말하게.”
“……예?”
“준비되면 내게 말하게.”
‘뭐?’
설휘는 뭔가 인위적인 말투에 흠칫했다.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말투.
예전에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하고 한 발짝 물러선 뒤, 다시 가까이 가자.
<지금 출전합니까?>
‘아!’
그제야 이유를 알아냈다.
이것 역시 시스템이 개입한 하나의 얘깃거리였다.
설휘는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고민 없이 다시금 출전을 하려고 승낙했다.
그런데.
<불가! 출전이 불가합니다. 이 싸움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은영단 내 대장들과 최소 1회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은영단주였지.’
설휘는 순간 잊어버렸던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