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은영단의 위기 (1)
‘……그대로군.’
설휘가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곤마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 바깥에서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갔는데, 마치 이곳만 정지되어 버린 것처럼.
천미려는 데려오지 않았다.
설휘의 짐작대로라면 시스템이 말한 미상의 존재는 그녀일 가능성이 컸다.
도박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으뜸 패를 숨겨두는 편이 더 좋을 터였다.
<출전하시겠습니까?>
곤마 앞에 서자 나타나는 문구.
설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은영단 대장들을 만나고, 나름의 준비를 시켜 주었으니 웬만한 작전은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닥쳐올 상황이 설휘의 뜻대로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은 직접 부딪쳐보고 판단해야 했다.
<출전합니다.>
출전에 동의한다는 선택을 하자, 눈앞이 환해지면서 다시금 어둠이 찾아왔다.
***
“성공했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애원은 흑마대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쓸려나가고 있습니다.”
“흑령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혈사전주와 혈강대의 추적을 떨치지 못하고 궤멸되었습니다.”
“주군. 기뻐하십시오. 대승입니다!”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르는 글귀.
과감하게 기습을 선택했던 판단이 전투의 승전보로 돌아오고 있었다.
“삼제자 휘하 무사들 중에 제대로 대응하는 이가 없습니다.”
“영역 내 중심지라 여겨지는 기로화원(崎路花園)까지 모두 저희가 장악했습니다.”
“비밀무사들이 적진의 자료를 확보! 정보를 확인하고 있으며, 핵심무사들은 수장급 인사들의 목을 베고 있습니다.”
“인명피해 없이, 모든 곳에서 활약이 고무적입니다.”
계속되는 승전보는 곤마의 기분을 들뜨게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삼제자 아령의 가장 큰 힘은, 저들의 주력 부대인 사애원과 흑령칠비가 아니었다.
교주 천마에게서 지원받은 장로급 마인들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곤마도 유의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아령의 존재였다.
섬광처럼 들이쳐서 허수아비든 뭐든, 아령의 목을 거두면 모든 것은 끝날 테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가 무엇인지는 상대 역시 알고 있었다.
“삼제자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흑령칠비를 칠 때, 주변에서 그녀가 지휘를 내리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정찰조를 보내겠습니다.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겁니다.”
기습의 이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곤마는 더욱 끈질기게 몰아붙였다.
아령만 잡으면 모든 게 완승인 상황이다. 이제 와서 물러섰다가 천추의 한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게 떴다.
“북쪽, 하부지단으로 가던 은영단원들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고립된 걸로 보입니다. 좀 더 사람을 보내어…….”
“함정입니다! 진입한 은영단이 반격을 받았습니다. 사상자는 대략 서른 명 내외라고 합니다.”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병력을 충원해야 합니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 은영단이 공략하는 전선이 지나치게 떨어져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게 흑마대원들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곤마 님!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어서 빨리!”
“급보입니다! 적의 맹습에 부대의 삼분지 일가량이 궤멸!”
“장로들과 그들을 필두로 한 호법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처음부터 함정이었습니다!”
“조치를 내려주십시오! 이대로는 은영단 전원이 몰살당합니다!”
……
……
수하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곤마의 외침이 이어졌다.
“기다려라! 설휘가 이렇게 맥없이 당할 리 없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은영단주까지 당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그리고 거기서 시간이 멈췄다.
잠시 아무런 반응도 없이 어둠만 가득하더니, 어느 순간 청명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Part 101. 은영단의 위기]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글귀와 함께.
***
쏴아아아---
감각은 청각부터 돌아왔다.
거센 빗줄기가 주변을 적시는 소리. 조금씩 또렷해져 오는 시야에는 어둑어둑한 그늘이 져 있었다.
한밤중에 내리고 있는 비였다.
“…….”
정신을 차린 설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산 중턱에 위치한 지대.
그리고 바로 아래에는 허름한 모옥 세 채가 보인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낯익은 중년인이 있었다.
“단주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흑구였다. 빛이 거의 없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거무튀튀한 윤곽만 겨우 보였다.
“설명을 좀 해주겠나?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황이 너무 없다. 상황도 갑작스럽고, 장소도 여기가 어딘지 모를 곳이다.
쿠르르릉. 번쩍.
거센 빗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번개.
언뜻 눈앞에 대여섯의 주검이 쓰러진 것이 보인다. 복장으로 보아, 다들 은영단원이었다.
“저는…… 단주께서 쓰러졌다는 급보를 듣고 이제 막 달려온 참입니다.”
“내가 쓰러져 있었다고?”
“예.”
“왜?”
“……기억이 안 나십니까?”
설휘가 더 반문하지 않자, 흑구가 그에게 모포를 덮어 주었다.
온몸이 비로 흠뻑 젖은 상태였지만, 일단 뭔가를 두르니 몸을 파고들던 냉기가 잦아들었다.
“제가 들은 보고라고는, 삼제자를 찾기 위해 은영단이 정찰 범위를 넓혔고, 그 와중에 단주께서 기습당하셨다는 게 전부입니다.”
“……기습당했다? 내가?”
“예. 급한 대로 은영단의 사황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다행히 단주님을 뵐 수 있었지만, 때마침 노리기라도 한 듯 적들이 계속해서 추격해 따라왔습니다. 그사이 주변에 있을 다른 부대와 연락을 취해봤는데, 어찌 된 건지 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음…….”
설휘는 그의 설명을 듣는 도중 얼굴을 굳혔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지금 상황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녀석.
3,111…… 3,110…… 3,109……
바로 시간을 나타내는 글귀였다. 심지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설휘는 한참을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갑자기 확! 얼굴을 굳혔다.
‘가만, 설마……?’
타닥. 타다닥.
그는 급히 몸 상태를 점검했고,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공과 체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뭔가에 의해 단전에서 기를 뽑아내는 것이 막혀 있었다.
‘금제(禁制)에 걸리다니. 어떤 수법이지?’
난데없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분명 출전 당시만 해도, 설휘의 내공은 잔에 가득 찬 물처럼 충분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내공을 한 줌도 쓰지 못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가.
대체 무슨 상황을 만들고 싶기에, 시스템이라는 놈은 이 지옥으로 자신을 처넣은 것인가.
“현재 상황은 어떻지?”
설휘는 솟구치는 울화를 참으며 물었다.
눈앞에 있는 대원들은 사적대와 사황대 소속.
그들의 죽음에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늪에 빠졌을 때 놀라서 허우적거리는 건 자살행위임을 알고 있다.
슬금슬금 빠져드는 한이 있어도,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들의 추적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교육관주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육관주가?”
“예.”
흑구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사황대장이 빠르게 합류하지 않았다면 사적대장까지 당했을 겁니다. 다들 위험한 상황이 한 번씩 있었지만, 다행히 단주님께서 구비해 주신 신병이기 덕에 목숨들을 건졌습니다.”
“아…….”
설휘는 짧게 탄식을 흘려냈다.
출전하기 전에 있었던 신병이기의 지급. 그리고 반 시진의 대련.
시스템이 강제로 이끈 출전 준비, 딴에는 낭비하지 않고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전 직전에 이들을 신병이기로 무장시키지 않았다면…….
원래는 여기 흑구만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령대장은……?”
설휘가 조심스레 묻자, 흑구가 대답했다.
“작전 당시 다른 지역을 맡고 있어서, 우리 쪽으로 합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지. 소령…… 아니, 사령대장은 여기 와서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거다.”
설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 생에 소령은 적어도 비참한 삶은 살아선 안 된다. 자신과 엮이지 않는 게 그녀에겐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
그러던 중 설휘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음험한 웃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크흐흐흐.”
“으흐흐흐흐흐.”
고립.
그 의미가 확실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삼제자의 목을 노리고 지나치게 깊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돈좌당해 저들에게 포위된 상황.
사제자의 본대와 멀어진 상황에서 적의 최정예인 장로단과 마주 보게 된 처지다.
그것도 자신의 힘은 금제되어 있는 최악의 상황에.
‘기분 탓일까…….’
흑구의 말대로라면 아령의 장로단 중 누군가에게 거하게 기습을 당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자신이 적을 경시했다고 해도 고작해야 장로급.
그들에게 대규모 기습을 받았더라도 이 정도로 피해를 입을 상황이 맞는가.
거기다 금제까지 당했다고?
‘내 의식이 없었다곤 하나, 그 정도로 내 몸이, 내 무위가 약하지는 않다.’
딴에는 나름, 극마의 정점에 도달한 몸이다.
그런 그가 고작 장로급 인물의 기습을 방비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건 불리한 상황을 누군가 강제로 만들어낸 게 더 합리적이었다.
누군가가 곤마 측이 유리한 상황에서 압승을 거두는 꼴은 못 보겠다고 생각해낸 것처럼.
“괜찮으십니까, 단주.”
“정말 다행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설휘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사황대장 화순과 사적대장 비군이 다가왔다.
설휘가 깨어난 모습을 보자, 화색이 감돈 얼굴이었다.
“잠깐.”
스윽.
설휘는 인사를 뒤로하고 진지하게 눈으로 훑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비안개 저편에서 점점 존재를 드러내는 인물들이 보였다.
‘열하나, 열둘. 장로들과 그들을 필두로 한 호법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저들은 상당한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란 걸.
그중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고수들도 있을 터.
“이놈들. 겁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덤벼들었느냐.”
어둠 속, 번개의 빛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장로 하나가 소리쳤다. 그리고 뒤이어 한 명이 말을 받았다.
“은영단주 모가지 정도면 남는 장사지. 적어도 사제자의 오른팔 하나를 죽이는 거니까!”
“사로잡으면 더더욱 좋다. 삼제자님 말씀대로 협상의 패로 이만한 게 없을 테니!”
그들의 대화에 설휘의 표정이 구겨졌다.
놈들은 곤마가 기습을 할 거라고 이미 예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사애원이랑 흑령칠비를 은영단과 바꾸려고 했거나.
헌데 그들의 목적은 설휘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살마와 비슷한 무위를 보였고, 공식 서열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 인물을 생포.
싸움을 지지부진하게 끌어내며 협상의 패로 쓰려고 한 것이다.
아령의 세력 중에서 장로급 고수들은 으뜸패.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수가 적다.
그런데 그런 장로들과 그들의 호법들을 십여 명이나 보낸 걸 보면 틀림이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눈앞에 떠 있는 숫자는 시간이 아직 남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군인 은영단 대원들의 숫자는 대략 백 명이 조금 넘어 보인다.
반면 저쪽은 상당한 수준의 인물들이 열 남짓.
우리 쪽 숫자가 많긴 하나, 비바람 속에서의 싸움에선 상대가 되지 않을 터.
“흑구. 화순. 비군.”
“예.”
설휘의 목소리가 낮고 진중해졌다. 대장들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명을 기다렸다.
“시간을 벌어라. 지금 나는 기습을 당한 탓에 주화입마가 온 상황. 당장은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몸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려면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
“……!”
“……!”
수하들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설휘는 그렇지 않았다.
“걱정 마라. 이 상황을 쉽게 타개할 방법이 내게 있으니까.”
그는 침착한 얼굴과 목소리로 계획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