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은영단의 위기 (2)
“먼저 화순. 네 수하 중 가장 날렵한 녀석들로 다섯을 명을 뽑아라. 기력을 비축해 놓았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들과 함께 전방으로 달려라.”
“명!”
“비군. 너는 몸집이 큰, 체격 좋은 이들로 셋을 선별해라. 그리고 역시 신호를 주면 후방으로 곧장 빠져나가라. 누군가를 호위하는 척하며.”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여쭤봐도…….”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거다. 전후로 성격이 다른 부대원들이 떨어져 나가면, 놈들은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다. 그걸로 놈들이 화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시간을 벌 것이다.”
“아…….”
대장들과 흑구는 설휘의 의도를 바로 이해했다.
전방을 향해 달려가는 날쌘 이들.
그리고 후방으로 물러서는 덩치 큰 체격의 이들.
장로들이 생각이 있다면, 즉각 전방의 날쌘 이들을 추격할 것이다.
사실 평소라면 좀 더 생각을 해보겠지만, 다급한 상황에서는 일단 붙잡고 보는 것이 먼저다.
본인들 측도 다급하긴 하지만, 자신을 생포하려고 하는 장로 측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터.
“화순. 이번 싸움에는 네 역할이 중요해. 지근거리까지 적이 추적해 오면 즉각 신병이기의 힘을 아끼지 말고 사용해 쓸어버려라.”
화순이 나아갈 전방은 사실, 소수의 병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유인 작전에 가깝다.
그가 장비한 금전자파를 염두에 둔 작전.
아무리 장로급 고수들이라 해도, 헐레벌떡 급하게 쫓아오던 중에 갑자기 반격을 받으면 낭패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화순은 그런 역할이고, 실제로 지원군을 요청할 사람은 비군이다.”
비군에게는 천잠단화가 있다.
원래 움직임이 좋던 이가 천잠단화까지 신었으니, 후방으로 이탈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물론 운에도 기대야 하겠지만.
‘따로 동작이 필요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신병이기.
과거 금만중에게 구입한 신병이기들은 기능을 발동시키기 위해 따로 특별한 동작을 취하는 것이 필요했다.
허나, 지금 수하들에게 하사한 것들은 다르다.
말 그대로 중원에 존재하는 신병이기.
그런 고급 기능은 없는 대신 딱히 특별한 동작이 없어도 활용할 수 있었다.
물론 내공 소모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겠지만.
“흑구는 화순의 뒤를 봐주면서 위험에 빠졌을 때나, 장로들을 죽일 때 거들어주도록. 특히, 장로들은 대부분이 초마에 오른 인물들이라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흑구와 화순이 합치면 장로 한 명씩 죽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둘 다 신병이기의 힘이 있으니까.
문제는 장로들을 위시하는 호법.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게 거슬렸다.
“알겠습니다. 헌데 단주께서는…….”
“걱정 마라. 나 역시 생각이 있으니까.”
설휘의 얼굴은 밝았다.
급조하긴 했어도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리고 아무리 장로급 고수들이라 해도 서너 명만 죽일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은영단원들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스윽. 스스스슥.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적들의 움직임을 본 설휘가 바로 반응했고.
“지금.”
타다다닥!
설휘가 신호를 주자 앞으로는 사황대장 화순이, 뒤로는 사적대장 비군이 대원들과 빠져나가며 정확히 세 개의 대열을 갖췄다.
움찔!
그로 인해 장로들의 움직임이 약간은 흔들렸다. 곧 그들 역시 분산하여 쫓기 시작했다.
솨아악. 철퍽. 철퍽.
빗속에서 질퍽한 소리가 울린다. 누가 보더라도 은영단이 패주해서 각자도생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열 명의 인원.
장로들이 몇인지. 호법들의 숫자는 몇인지. 또 그 뒤에는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설휘는.
‘이 싸움. 아직 해볼 만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싸우기 직전, 혹시나 하고 열어본 도구함은.
<장비>
황금 벨트, 진초혜
<약재>
금창약 2, 천영음실 30, 군자산 1, 학령초 1, 황단 1, 백반 1, 도화산(桃花散) 1, 칠리산(七厘散) 1
<영약>
태청단 1
<잡화>
무관도 각종 서류, 비밀교서 지도(3/4), 비밀교서 열쇠
이제껏 그가 노력해 온 결과였다. 설휘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골랐다.
[황금 벨트를 착용하시겠습니까?]
매 전투 끝에 허겁지겁 도구함에 넣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던 덕을 이제야 본 것이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즉각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것을 찾아 바로 벨트에 집어넣었다.
급한 대로 약재들까지 넣어봤더니, 다행히도 별 문제 없이 쏙 들어갔다.
[황단] [도화산] [백반] [태청단]
원래라면 체력뿐만 아니라 내공도 올려주는 영약과 약재들. 하지만 시스템 놈이 뭔 장난을 쳤는지, 금제 때문에 당장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은 내공이 아니라 체력을 회복시키는 목적으로 챙겼다.
“오랜만에 좀 빡빡하게 붙어 보는데…….”
금제에 걸렸다고 해서 아예 무력한가라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설휘에게는 남은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경지, 무에 대한 흐름.
극마라는 경지는 그저 내공만 쌓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을 사용하고, 병기를 활용하며, 언제나 자신의 한계 너머를 바라보며 쌓아온 경험.
“어디. 누가 박살 나는지 한번 해보자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웃음을 지으며 설휘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
상황은 설휘의 각오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 빨랐고.
“크악!”
“컥!”
절정 수준에도 미치는 못하는 은영단원들은 단 일 검도 받아내지 못하며 쓰러졌다.
그나마 절정에 오른 이들도, 그들의 검을 막아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하압!”
은영단원들을 밀어내고 들어온 어느 장로의 호법 하나가 설휘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쿵!
어찌어찌 피해내던 설휘가 나무에 부딪히며 신음을 흘렸다.
“와…… 이게.”
막상 움직여 보니 정말로 문제가 심각했다.
단순히 체력과 내공의 문제가 아닌, 몸의 모든 감각이 정상치보다 한참 아래에 있다.
다시금 쏘아지는 검기를 본 설휘는 급히 황금 벨트에 장착된 것 하나를 사용했고.
[체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금제로 인해 체력이 다시 감소합니다.]
황단을 사용해 체력을 증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금제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급작스럽게 체력이 줄어들지는 않아 조금은 숨이 트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큭!”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 반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주를 지켜라!”
설휘가 적들에 의해 곤경에 빠지자, 대원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허나, 그건 또 다른 위험을 일으켰다.
“크악!”
“아아악!”
사방으로 쏟아지는 도기에 거의 절반 가까이가 쓸려나가 버린 것이다.
“후후후…….”
어둠 속에서 나타나 은영단 십여 명을 단숨에 죽여 버린 노인.
체구는 장대했고, 손에 든 것은 참마도와 비슷한 장도였다.
‘철담마도(鐵膽魔刀) 홍탑극(洪托克)…….’
면식은 없지만,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극마에 오르진 못했어도 딴에는 유명한 인사였다.
한때 팔대전주 한 자리를 역임했고, 후에 총단에 부름을 받은 자. 패도적이며 강직한 거령탈백도(巨靈脫白刀)라는 도법으로 한때 본교에서 이름 날렸던 자.
거기에 주변으로 호법 셋이 그를 감쌌다.
“이보게. 저기 저항하는 걸 보면, 이거 생포해도 되겠는데?”
거기에 또 한 명의 장로가 나타났다.
긴 백발을 상투처럼 묶고, 턱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인물.
천잔신마(天殘神魔) 극명귀(克明鬼)다.
이자 역시 유명했다. 과거 만답서생의 말에 따르면 그가 사용하는 혼천마공(混天魔功)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거기에 호법도 무려 네 명이나 달려 있었다.
“후우.”
설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3,009…… 3,008…… 3,007……
그리고 아직 남은 시간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절망적인 상황이긴 해도, 살아날 구멍 역시 마련되어 있긴 할 것이다. 이제껏 시스템이 해 온 일은 항상 그랬다.
딱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지만, 정말로 죽이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자신을 떨어뜨려 놓았다는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다는 것. 그게 무언지 어떻게든 찾아내어야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어떻소. 내가 하리오?”
한편, 장로들이 대화를 한 번 나누더니.
“내게 맡기시오.”
홍탑극이 먼저 움직였다.
부우웅!
안개가 낀 한밤중에 휘둘러지는 거대한 대도, 마치 귀신을 마주한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설휘는 맞서기는커녕, 피하기도 급급하여 즉각 몸을 옮겼고.
놈의 도기는 그런 설휘의 등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콰아아아앙!
“……!”
그리고 멈칫했다.
스쳐 지나간 도기가 땅의 일부를 잘라냄과 함께 강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설휘는 그 광경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과연 장로급인가. 일반적인 도기를 쓰지 않는군.’
도기는 본래는 걸리적거리는 걸 잘라버린다. 그런데 이렇게 폭발이 일어났다는 건.
모종의 특성들이 부여된 듯 보였다.
일어난 폭발의 열기가 뜨끈뜨끈한 게, 마치 벽력탄을 터뜨린 듯 광범위한 폭발이었다.
“크흐흐. 이보게. 죽일 셈인가?”
“저놈이 이렇게 나약한지 몰랐지 않은가.”
“일제자와 동수를 이뤘다는 얘기가 있다 했는데……. 대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말하지 않았나. 일제자께서 일부러 당해주신 거지, 뭐!”
“크하하하!”
상황이 심각한 와중에도 놈들은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그도 그럴 게, 저들의 눈에 자신은 그저 애송이 정도로 보일 터였다.
‘시간이 좀처럼 흘러가질 않네.’
녀석들의 빈틈이 점점 커져가도, 설휘로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직접 부딪혀 보고 느낀 무력은 예상했던 바와 달랐다.
다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앞서 나갔던 화순과 흑구도 상당히 버거울 터.
그저 뒤로 도망쳐갔던 비군이 잘 도착하기를 바랄 수밖에.
“이번에 확실히 잡아보지. 여봐라.”
“옙!”
홍탑극의 말에 그의 주변에 있던 세 명의 호법이 예를 차렸다.
“저기 저놈을 잡아와라. 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 적당히 패도 좋다.”
“알겠습니다.”
호법들이 명을 받고 곧장 달려왔다. 은영단원들이 반사적으로 설휘의 앞을 막아서자.
“괜찮다. 대열을 지켜라.”
설휘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도…… 은영단원들의 도움을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 정말. 어쩌다가.”
그리고 한걸음 나서며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을 잡겠다고 나선 이름 모를 호법.
척 보기에도 초절정 수준으로 보였다.
지금 몸으로는 상대가 쉽지 않음에도, 설휘의 시선은 조금 떨어진 홍탑극이란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설휘는 한 발씩 천천히 내디뎠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패애애액!
자리에서 도약하자, 호법이라 불리는 놈들의 검기가 쏘아졌다.
그리고 설휘를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크읍!”
검기에 몸의 일부가 베였지만, 그럼에도 설휘는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연속해서 공격하지 않아, 장로에게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홍탑극에게는 마치 스스로 섶을 쥐고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보였다.
“어허. 이래서야 생포하진 못하겠구나.”
말은 안타깝다는 투였지만, 그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간 들어온 소문과 달리, 은영단주 설휘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아마도 사제자 세력이 일부러 와전시켜 거창하게 만든 모양인데, 그렇다면 생포해 봤자 별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스윽.
홍탑극은 중상을 입고도 달려드는 설휘를 향해 그의 장기인 탈백도를 펼쳤다.
쉬이이익!
눈 깜짝할 사이 생성된 도기가 설휘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번엔 폭발의 묘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쾌도였다.
그 순간.
[도화산을 사용합니다.]
가슴이 꿰뚫린 설휘의 눈앞에 이것이 떴다.
황금 벨트의 사용.
이는 체력과 내공 회복에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
일시적인 체력과 내공 증진의 효과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적용되었다.
즉, 가슴이 뚫리는 극단적인 상황도 복원시켜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투욱.
갑자기 손바닥을 머리에 갖다 대는 설휘.
그는 어이없어하는 노인을 보며 담담히 내뱉었다.
“이거 실패하면…… 내가 알아서 죽을게.”
상대는 그때까진 그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휘이이이잉!
손바닥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자가 펼친 기술이 단순한 기공 발출이 아니란 것을.
[풍신을 사용합니다.]
내공과 체력의 금제, 그리고 몇 단계의 경지 하락에도 설휘가 찾아낸 한 수.
바로 사대극마공을 익혀서 얻은 특수 기술, 풍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