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새로운 경지 (1)
마교의 극마와 정파의 화경.
각각 추구하는 무학의 끝에 다다른 경지로, 단순히 공력(功力)만 쌓은 것으로는 이룰 수 없는, 도산검림을 헤치고 나온 경험과 깨달음이 필요한 산이다.
‘이건…….’
보통은 서로 같은 단계로만 여기지만, 서로 간의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극마의 경우 마를 극복함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며, 언제고 그를 넘어 마를 완전히 벗어나는 탈마(脫魔) 단계를 지향한다.
반면 화경은 신검합일. 다른 말로 신기합일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또한, 정파에서 말하는 내공적인 의미로는 영성(靈性)을 띤 진기(眞氣)가 신기(神氣)로 변해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처럼 서로서로 추구하는 무학의 한계. 육체와 내공이 가진 한계를 초월(超越)하는 것을 뜻하니, 어떤 의미에선 같은 것이며, 어떤 의미에선 다르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경지로 나아가시겠습니까?]
▶ 화경
▷ 극마
9…… 8……
질문으로 떨어지자, 설휘는 고민했다.
원래 그의 상황만 보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극마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굳이 이런 선택지를 자신에게 고르게 만드는 의도는 무엇일까?
‘만약 화경을 선택하면…….’
미지의 길을 걷게 된다.
자신의 무공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마공.
그런데 잘 알지 못하는 정파의 무공으로 근본을 바꿔서, 얼마나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 미지수다.
언제고 적으로 만날 플레이어 천마의 무위는, 극마조차 넘어선 탈마 중에서도 극한까지 도달했다고 추정되는 상황.
과연 정도무공으로 갈아타서, 그에 견주는 현경, 화경, 그 위의 단계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능성이 낮아.’
힘들다. 현경은 고사하고, 당장 그 아래인 화경의 끝자락까지 가기도 힘들 것이다.
반면 극마를 선택하면, 언제고 탈마의 경지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설휘 자신만이라면 어쨌든, 가까이에 천미려가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그러니 당연히 극마를 고르는 것이 맞지만.
‘AI 녀석. 왜 이런 걸 말하지 않았지?’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AI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녀석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는 말을 남겼어야 한다.
화경이 잘못된 방향이니 절대 고르지 말라고 하거나, 혹은 화경이야말로 유일한 돌파구니 반드시 그쪽으로 가라고 하거나.
그런데 그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두 갈래의 선택 중, 어느 것을 고르든 상관없는 것인 걸까?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익숙한 길을…….’
고민 끝에 극마를 선택하려던 설휘는, 거기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화경을 선택하셨습니다.]
“……!”
당황은 잠시였고, 경악으로 눈이 부릅떠졌다.
‘망할!’
고민을 너무 깊이 한 나머지, 선택할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그냥 자동으로 화경에 걸려있던 선택지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잠깐. 이렇게 화경이 되어 버리면…….’
큰일이었다. 극마를 고르지 않았으니 이제는 탈마로의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천마를 상대하려면 정파 무공으로 그와 동급, 화경 위의 단계인 현경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건 너무도 설휘에게 불확실한 길이었다.
[플레이어 설휘의 경지가 화경으로 변했습니다.]
[주의! 정도무공의 속성으로 인해, 마공과 연관된 특수 기술을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마교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최대 50%의 추가적인 피해를 줍니다.]
[정파의 내공 특성을 갖춤으로써 항마력이 증가합니다.]
“음…….”
글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설휘의 인상이 찌푸려지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나타났다.
[태극의 묘를 익히셨습니다.]
‘태극의…… 묘?’
이건 또 뭔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글귀에 설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 태극 특성 기술표 ◆
[태극의 묘] : ↓↓↓ (부드럽게) A 또는 B
왠지 모르게 친근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기술인지 예상이 간다고 해야 할까.
태극권의 기예 중에 대표적인 것은 사량발천근.
넉 냥의 힘을 이용해 천근의 무게를 되돌린다는 것으로, 적의 공격을 흘려버리고 방향을 틀어버리는 정도무공 최상승의 기예다.
보통 적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드는 마교의 고수들로서는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계열인데, 그런 기술이 특성 기술표로 나왔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태극혜검을 익히셨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태극에 관련된 무공의 기술들이 눈앞에 계속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엔 사량발천근보다 훨씬 대단한 기술들이었다.
◆ 태극혜검 특성 기술표 ◆
[태극천루(太極天漏)] : ↑ ↓↓↓ A 또는 B
‘헉?’
태극혜검의 최강 초식이라 불리는 태극천루.
과거 마교의 절대극마공에 준하는, 정도문파 최고의 무공이 나타난 것이다.
‘아니, 이게 여기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순간순간 상황이 바뀌는 걸 적응 못한 설휘가 한 발 내디디려고 할 때.
눈앞에 떠오르는 글귀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정보를 알려주었다.
[띠링! 설휘 님은 이미 마공에 대한 이해도가 극마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무공 특성에 관한 신규란이 개설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필요하면 언제든 추구하는 무학을 바꿀 수 있습니다.]
[화경 ON] [극마 OFF]
‘이건 또 뭐야…….’
놀람에 이어 반색이 되는 설휘.
추구하는 무학을 바꿀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 가능한가? 설마설마하며 글귀를 노려보며 선택하자.
[극마 ON] [화경 OFF]
글귀는 이렇게 떴고, 그 아래에는 친절하게도 설명이 이어졌다.
[주의! 마공의 기력으로 인해 정종무공과 연관된 특수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정종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최대 60%의 추가적인 피해를 줍니다.]
[마교의 내공 특성을 갖춤으로써, 정종무공을 쓰는 이에게 마독(魔毒)의 피해를 추가적으로 입힙니다.]
이건 앞서와 같다. 속성이 반대인 무공을 억지로 쓰면, 위력은 감소한다.
하지만 그 다른 의미에 설휘는 말도 못 하고 전율했다.
“사기적인 능력이다…….”
이렇게 되면 정파의 무공이든, 마교의 무공이든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다.
필요할 때면 화경이 되었다가, 또 필요할 때면 극마로 될 수도 있었다.
이걸 전략에 활용하면? 어마어마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상대의 무공 속성에, 무조건 치명적일 수 있는 극상성을 쓸 수 있으니.
“거, 제놈이 혼자서 뭐라 구시렁대는지 모르겠지만…….”
왕모력이 성큼 걸어 나왔다.
먼저 선뜩 나섰던 설휘가 한참 혼자 중얼거리고 있자, 성질 급한 그가 더 보다 못한 것이었다.
펄럭. 파아악!
왠지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두 팔에 내력을 끌어올리며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한 번에 죽여주마.”
파팟.
그 말과 함께, 사령대 조장들의 눈이 커졌다.
서서히 속력을 높이던 왕모력. 그의 신형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글귀에 빠져 있던 설휘의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화경으로!’
[화경 ON]
글귀가 떠올랐다.
왕모력이 사라졌다가, 다시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설휘의 눈빛은 한 번 더 변했다.
[태극의 묘를 사용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
휘리릭!
눈 깜짝할 사이, 설휘의 앞을 지나쳐 흘러가는 기류.
처음엔 이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가, 기류의 움직임을 보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무격신장.’
왕모력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극강의 초식이었고, 몸을 스친 건 그의 기류라는 걸.
스슥.
태극의 묘는 그렇게,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읽는 예지력처럼 설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예전의 시뮬레이션 같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설휘는 감탄했다.
시스템이 제공한 시뮬레이션은, 주로 공격자의 최적 예상 투로를 보여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태극의 묘는, 투로가 아닌 흐름.
상대의 날카로움에 반응하는 무당의 부드러움이, 상대의 공격을 굳이 부딪치지 않고 유려하게 흘려내는 식이었다.
“음?”
파밧!
왕모력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역시 극마고수로 이름을 날린 몸. 자신의 공격이 빗나가자, 즉각 순간적인 방향 변화로 눈과 감각을 두 번 속이는 보법을 펼쳤다.
파바바바밧.
좌로 우로 정신없이 날리는 신형. 상대의 감각이 교란되는 틈을 파고들어 일수를 날리는 수법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이 동작은 설휘의 눈에 이미 익었다.
“후우.”
태극의 묘는 상대의 움직임을 흐름으로 감지한다. 왕모력의 움직임이 다 펼쳐지기도 전에,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대비했다.
처억.
발뒤축은 단단한 균형을 이루게 하고, 두 손은 가슴 쪽으로 모아 원을 그렸고.
사삭.
녀석의 공격이 날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창졸간에 검을 휘둘렀다.
슥-
태극의 기초.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라는, 태극의 묘리가 정확하게 담겨 있는 한 수였다.
촤아아아악!
부드럽게 원을 그린 칼날에 노인의 목이 떨어졌다.
“……?”
“……헉!”
그 장면을 본 주변의 모든 이들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극마고수 왕모력.
자그마치 마교 서열 60위라 일컬어지던 고수가, 상대의 단 일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와 이건…… 또 다른 경험인데…….”
태극의 묘를 펼친 설휘의 표정은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써 보니 확실히 시뮬레이션과 다르다.
그저 상대가 품은 기류를 무위로 돌리거나, 그 과정에 일격을 가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
좌우, 상하, 속과 밖, 대소(大小)와 진퇴(進退)의 모든 흐름을 읽어내고 잡아낼 수 있는 태극의 묘.
왜 정파의 무인들이 태극검 하면 망설이지 않고 엄지를 치켜드는지. 그리고 이 무공을 쓰는 자들이 왜 오만해지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 이제…….”
투욱.
검날에 묻은 피를 한 번 털어낸 설휘.
그는 눈앞에 있는 장로들의 숫자를 확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심판의 시간이다.”
***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싸움이 아니라 학살에 가까웠다.
쿠웅! 콰아앙!
폭발이 일고 형형색색한 검기와 도기가 난무했지만, 소용없었다. 죄다 한 번 아니면 두 번의 칼질에 목이 날아간 것이다.
서걱! 휘리릭!
설휘는 마치 잘 짜인 대련을 하듯, 사방에서 날려대는 적들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러면 그냥 호법 몇몇의 목이 날아갔고. 검을 크게 회전시켰을 때에는 장로들의 목이 떨어졌다.
“후우.”
설휘가 잠시 발을 멈췄을 때, 적들은 괴멸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살아남은 장로는 하나. 그리고 호법이 셋이었다.
“네놈이 마지막인가?”
“…….”
살아남은 장로는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그에게 비친 설휘는 무신.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적이었다.
“유언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겠지?”
“허…… 헉!”
설휘가 다시 검을 쥐며 미소를 보이자, 장로는 뒷걸음쳤다.
그리고 도망칠지, 아니면 최후의 절학을 펼칠지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투욱.
그러던 그때 그의 어깨를 치는 자가 있었다.
“어이.”
핼쑥한 체격의 노인. 이름 모를 긴 장대를 든 노인.
“어, 어르신.”
노인을 본 장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내가 너무 늦게 온 건가?”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검은머리와 흰머리가 반쯤 섞인 노인은 설휘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해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
그를 본 설휘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극마고수!’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지금 나타난 상대가 극마에 오른 고수란 걸. 그것도 왕모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완벽한 극마고수란 걸.
“설휘. 너는?”
그렇게 말을 받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자네가 요즘 시끌시끌한 설휘란 자군. 음……. 그래, 노부의 이름은.”
그는 담담히 주위를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사마령(司馬玲)이라 한다. 삼제자님을 모시고 있지.”
“……네놈이구나.”
이름을 듣자마자 설휘의 눈빛이 달라졌다.
드디어 나타났다.
삼제자의 수하 중 가장 강인한 존재.
소문만 무성할 뿐, 있는지 없는지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절대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