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새로운 경지 (2)
한편.
설휘의 검에 왕모력의 목이 떨어지던 순간.
“아…….”
“대체 이게…….”
지켜보던 사령대 조장들. 특히 적송은 경악에 물들었다.
왕모력이 누군가. 삼제자 아령 휘하의 장로급 고수들, 그중에서도 극마급 인물이다. 노쇠했다 해도 늙은 생강이 매운 것처럼,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몸.
그런 입지전적인 이를, 설휘가 단 한 번의 칼질로 죽여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음, 방금 무공은 뭔가…….”
요림이 미간을 좁히며 더듬거리자, 소령이 그 뒤를 마무리 지었다.
“본교의 신공은 아니야.”
“음.”
차마 말을 못 하고 있던 이들이 다들 끄덕였다.
“직선의 공세를 곡선으로 되받아치는 무공. 마치 일기입공(一技入功)에 정통한 사람처럼…….”
“일기입공이면 음양(陰陽)과 허실(虛實)을 바라본다는 그거로군요. 아니, 그럼?”
소령의 이어진 말에, 용진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단주님은 정파의 무공에도 정통하시다는 겁니까?”
일기입공.
하나의 초식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기예.
주로 정도무문의 고수 중, 경지가 입신에 오른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애초에 은영단주는 극마에 오른 고수이지 않습니까? 그럼 근본으로 익힌 무공은 당연히 마공일 거고요.”
“음.”
당연한 지적에 소령이 침음했다.
“아니, 사람이 정파의 무공과 본교의 신공을 동시에 어떻게 익힙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다음으로 적송이 웃자, 소령이 이번에는 발칵 짜증을 냈다.
“그래서, 너희들이 보기엔 뭔데? 좀 전에 단주께서 펼치신 신공이 어느 계파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어?”
“어…….”
“그게…….”
“음.”
그에 다들 말문이 닫혔다.
왕모력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설휘의 검이 번뜩인 건 모두가 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검격이 너무 빠른 데다, 애초에 예상도 하지 못한 궤적으로 뻗어 나갔으니, 그게 태극검이라고는 도무지 유추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소령 정도만 정파의 무공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을 뿐.
“아니. 근데 도무지…….”
“궁금한 사람은 나중에 단주께 따로 여쭈어봐. 내 안목으론 모르겠다.”
소령이 다시금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하들이야 별생각 없이 마공과 정공을 동시에 한 몸에 쌓는 게 가능한가 어떤가를 따졌지만, 그녀는 그래도 사령대의 대장이다.
당장은 상관인 설휘, 은영단주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무공을 펼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니, 본 건 있는데 말이 안 되는 걸 봤다.
그 말은 자신과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
이쯤 되면 무인의 자존심도 자존심이고, 든든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력이 빠져버릴 뿐이다.
‘대체 무슨 저런 괴물이…….’
‘어휴.’
‘세상에…….’
헌데, 사실 그녀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속내도 똑같았다. 극마에 오른 고수가, 정파의 무공에도 정통할 수 있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니.
“어? 단주님께서 적진으로…….”
“뭐!”
그때였다.
한참 다들 심사가 어지러운 가운데, 갑자기 기함할 일이 벌어졌다.
설휘가 적진을 향해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버린 것이다.
“저, 저기! 대장님!”
“단주님이 위험합니다! 저희도 함께…….”
“따를 생각하지 마! 우리는 짐만 된다!”
혼란해진 조장들에게 소령이 일갈을 날렸다.
상대는 장로급 고수들이다.
거기에 사령대 전력을 부딪쳐봐야, 그냥 바다에 돌 하나 던지는 격일 터.
쾅! 쾅! 쾅! 쉬이이익.
아니나 다를까. 설휘가 파고들어간 진형에서는 곳곳에 폭발이 일었고, 형형색색한 검기와 도기가 난무했다.
저걸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령대 조장들은, 자신들이 들어갔을 경우를 상상하고는 치를 떨었다.
“허.”
“어?”
그런데 그 뒤로도 충격적인 장면이 계속 이어졌다.
휘리릭! 휘릭!
설휘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적들의 공격을 모조리 봉쇄했다. 심지어 방어를 하는 와중인데도 호법 몇몇의 목을 날리는 기이한 검술을 보였다.
거기다 한 지점을 포착하고 크게 움직였을 때는 장로들의 목도 날려버렸다.
하나같이 한 번에, 아니면 두 번째 검격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처억.
그러던 설휘가 멈췄을 때.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수다. 왕모력보다 더.”
꿀꺽.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침을 삼켰다.
***
‘이거 쉽지 않은데…….’
자신을 사마령이라 밝힌 노인. 그를 본 설휘는 우선 자신의 몸부터 점검했다.
이제까지 상대한 장로들이나 호법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극마, 아니 화경에 오른 자신에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이대로 싸우면 안 되겠는데…….’
하지만 이번 상대는 달랐다. 극마고수, 그것도 최소 통달의 경지에 도달한 자였다.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라면, 쉽게 상대하기 힘든 상황.
‘내공이 턱없이 부족하구나.’
회복되는 족족 다 써버린 탓이다. 거기다 이제는 황금 벨트에 있던 영약들도 모두 소모한 상태.
태청단으로 상당히 회복했다곤 하나, 그건 몸 상태를 진정시켜주는 데 그쳤다.
이미 설휘의 내공 경지는, 영약으로는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정도로 커졌다. 별도로 운기를 하지 않는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 그게 있었지.’
그때 떠오르는 하나.
단숨에 내기를 충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극마 ON]
경지를 극마로 바꾼 뒤, 곧장 기 모으기를 펼쳤다.
발동 조건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기 모으기 Lv2를 발동합니다.]
‘역시!’
특수 기술을 펼치자 순간적으로 발바닥과 손바닥에서 내공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왔다.
‘녀석……. 뭔 짓을 꾸미는 것 같군.’
노인, 사마령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급격하게 운용되는 상대의 기공. 극마의 고수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참에 바로 목을 칠까? 하고 잠시 고민했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상대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으니까.
그그그그극.
단숨에 내공을 팔 할까지 회복시키고, 설휘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생각이지?’
어찌 된 영문인지 노인은 자신이 기력을 회복하는 것을 뻔히 보고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
‘어쨌거나 살았다. 또 특수 기술 덕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너무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번 삶은 시스템의 기능으로 덕을 보는 것을 가급적이면 피해왔다. 시뮬레이션도 그렇고, AI도 그렇고. 좋다고 너무 익숙해진 다음 갑자기 봉인당하면 큰 낭패였으니까.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니, 역설적으로 다시 의지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단 이 위기부터 넘기고 보자.’
그런 생각을 하던 때에.
“소문에 일제자와 동수를 이뤘다는 놈이 있다던데, 네가 그 녀석이냐?”
노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소문이 와전되었나 봅니다. 동수까진 아니었고…… 겨우 상대하는 수준이었지요.”
설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흠. 나도 그 정도로 생각했지. 허나, 네놈이 여기에서 부린 재주를 보니, 어째 그 소문이 사실인 거 같다만?”
“노 선배께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니, 후배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그런데…….”
두 사내의 애매한 인사가 이어진 후.
사마령이 본론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얘기 한번 해보지.”
“예?”
“기습이라 하더라도 다른 제자들의 눈들도 있을 거고. 우리가 함정을 파고 기다릴 게 두렵진 않았나?”
거기서 바로 눈앞을 가리는 글귀.
이번엔 정보의 창이 아니었다.
<아래의 지문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 그래서 삼제자가 패를 준비하기 전, 기습을 통해 제압하려고 했다.
▷ 함정이라 해봤자, 한곳에 몰아넣거나 뒤를 치는 전략인데. 병력도 무공도 우위에 있는 상대에게 먹힐까 싶군.
▷ 삼제자의 능력으로는 음모나 계략을 꾸미는 게 불가능하지.
▷ 삼제자는 이런 전란이 벌어질 것도 예측하지 못했는데, 무슨 방비를 할 수 있단 말이냐.
▷ 이제자와의 협상은 끝내 결렬될 거라 알고 있었다.
‘이건!’
설휘의 눈이 커졌다.
오랜만에 나온 선택지문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겪어온 대로라면, 이런 상황에 이런 지문이 나온다는 건 분명 어떤 변화를 야기할 것이란 뜻이었고.
‘혹, 지문의 선택으로 상대를 포섭할 수도 있는 건가?’
사마령.
척 보기에도 악비와 초아란을 능가하는 고수다.
포섭만 한다면 사제자는 그야말로 날개를 다는 상황. 왠지 이 지문 중 하나에는 그를 포섭하는 방법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포섭이 아니라도 된다. 그저 싸우지 않고 중립으로만 물러서줘도 감사할 지경이다.
‘일단은 내가 회복되는 걸 기다려줬다는 게 좋은 징조이긴 한데…….’
문제는 다섯 개의 지문 중, 정답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 하나하나 읽어보니 머리가 복잡했다.
어떤 답을 해도 좋게 받아들이면 충분히 말이 될 것 같았고, 나쁘게 받아들이면 또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의 성향에 맞는 대답이 필요해.’
그럴 것이다.
사마령이란 절대고수. 녀석의 성향이 어느 쪽인지.
주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인지, 혹은 이성적인 실리를 따지는 자인지.
아니면 힘으로 모든 것을 누르는 패도를 지향하는 자인지, 반대로 두루두루 감싸 안을 포용을 원하는 자인지.
열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설휘는 마지막 지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나마 이 지문이 내가 하고 싶은 대답과 비슷하다.’
▶ 이제자와의 협상은 끝내 결렬될 거라 알고 있었다.
이제자 마후와 삼제자 아령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다.
사제자 곤마의 힘이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두 사람이 손을 잡았지만, 그 관계는 오래갈 수 없다.
그간 여러 번의 삶을 겪은 덕에 이제자의 성격도, 삼제자의 성격도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자와의 협상은 끝내 결렬될 거라 알고 있었다.’를 선택하셨습니다.>
“흥,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
“어수룩한 녀석. 그래,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실력을 한번 볼까?”
그러고 나서 뜨는 글귀.
[적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삼제자 아령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포섭? 게다가 아령의 위치도 알려주려고 했어?’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예상보다 더 큰 게 걸려있는 지문이었다.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한 게 크게 아쉬워지는 대목이었다.
[사마령과의 대결이 이어집니다.]
츠으으으으.
더는 예를 갖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글귀와 함께 사마령의 발끝에서 피어나는 진기(眞氣).
과연 극마의 고수답게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공할 만한 기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녹색의 기류들.
‘저건 무슨 마공이지?’
나름 많은 마공을 알고 있는 설휘조차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먼저 상대의 수준을 알아보려면…….’
츠츠측.
설휘의 주변으로도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상대가 폭발적으로 진기를 피우는 것이라면, 그는 차분하게 주변에 기류를 생성하고 있었다.
“설마, 그 신법은…….”
역시나 사마령은 설휘가 펼치려는 신법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래. 천마군림보다.”
파아앗.
말과 함께 점점 불어나는 설휘의 신형을 본 사마령.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려 열 개.
그리고 그 신형은 누구 할 것 없이.
바박. 바바박. 파파파팟.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재밌군. 재밌어.”
사마령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주변 삼 장 내에 휘몰아치던 기운을 오 장 너머까지 더욱 확장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재미있지.”
사마령은 한쪽은 반개한 눈을 뜨고, 한쪽은 감은 상태로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환영들이 그를 덮치는 일순, 한마디를 외쳤다.
“천마폭렬공(天魔爆裂功).”
피이이이---- 쿠와아아아앙!
갑자기 암흑의 폭발이 천지를 뚫어버릴 기세로 용솟음쳤다.
천마의 비전신공 중 하나인 천마폭렬공.
단순한 불의 폭발이 아닌, 그보다 몇 배는 강한 마력의 폭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