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새로운 경지 (3)
“……!”
나아가느냐 멈추느냐의 기로. 거기서 설휘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충분히 공격 범위 안에 상대를 넣을 수 있었지만, 막상 손을 쓰려니 주변을 에워싼 마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맞았다.
콰콰콰쾅!
설휘가 물러서자마자, 엄청난 기류가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그리고 즉각 자줏빛 화염으로 변하며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두두두두두 쿠쿠쿠쿠쿠쿵!
기류가 흐르던 오 장을 넘어, 사마령을 중심으로 반경 십 장이 통째로 폭발에 휩싸였다.
인근의 지반을 다 까뒤집어버리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큭!”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그때 천마군림보의 위력이 빛을 발했다.
열 개의 환영 중에서 무려 아홉 개가 화마에 집어 삼켜졌지만, 단 하나의 신형은 겨우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크…….”
울컥!
구르다시피 하여 피해낸 설휘는, 피 한 모금을 입가로 흘려냈다.
충격파에 후드려 맞은 내부가 진탕되었다.
바로 내상을 입었고, 왼팔로 막았던 불꽃은 계속해서 지글지글, 기름이라도 먹은 것처럼 살을 태웠다.
‘대체 뭐 이런 무공이……?’
찌이익!
설휘는 불길을 급하게 진기로 억누른 후, 장포를 어깨부터 뜯어내 던졌다.
지이이익.
땅을 뒹굴며 여전히 일렁이는 자줏빛 불길.
옷자락을 다 태워먹고도 아직 남아서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을 보며 설휘는 얼굴이 굳었다.
‘확산속도가 엄청나다.’
천마폭렬공.
천마의 비전신공답게, 이 마공은 폭발의 범위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범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발동 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 사람의 내력을 불꽃이나 빙공으로 전환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방금 당한 공격은 그런 시간의 차가 거의 없었다.
설휘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발동 시간이 나보다 훨씬 짧다.’
사실, 시스템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설휘는 이제껏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력을 속성화시키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싸움에서 매번 우위를 차지해왔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상대는, 내력의 전환에 드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발동시켜서 전환시키는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바로 발현되는 것 같았다.
“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진짜로 천마군림보라니.”
한편, 설휘를 마주한 사마령의 표정도 꽤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네놈은 대체 뭐하는 물건이냐? 본교의 교주만이 쓸 수 있는 호교신공을 어디서 훔친 게야?”
상대의 외침에 설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왠지 교주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러니 다시 하대를 하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는 선배 역시 천마폭렬공을 쓰지 않았소?”
“하! 이놈 보게.”
설휘가 말을 피하자, 사마령은 가당찮다는 듯 픽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교주의 사제다. 전대의 교주, 본교의 지존이시던 분을 직접 사사한 몸이란 말이다.”
“……뭐요?”
그 말에 설휘는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천마의 사제.
과연,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교주만이 쓸 수 있는 무공이라지만, 저 천마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제자였고 사형제도 있었을 테니.
“이제는 네놈이 밝혀라. 천마군림보는 네 주군인 곤마도 전수받지 못한 신법이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걸 훔쳐 배운 게야?”
“…….”
사마령의 물음에 설휘는 잠깐 고민했다.
어떤 답을 하는 게 좋을까?
예전 곤마에게 소수마공을 들켰을 때에는, 천미려의 제자라는 새빨간 거짓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천미려가 워낙에 바깥출입이 없는 은거고수 중의 은거고수였던 까닭이다.
허나 지금 사용한 천마군림보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이건 오로지 교주만이, 혹은 그가 마음에 들어 가르침을 내려준 사람만이 사용 가능했다.
하지만 설휘는 당장 당대의 천마와 아무 접점이 없었고, 사마령은 그의 사제라고 하니 어설픈 거짓말로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인연이 닿았소. 어쩌다 보니.”
“하, 그래. 쉽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겠지.”
스릉.
사마령은 어깨 쪽에 손을 두고 천천히 움직였다.
섬찟한 금속음과 함께, 폭이 좁은 협봉검(狹鋒劍)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음.”
설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조금 전 격돌에서 맨손이었다.
그래서 주먹을 쓰는 권사인가 싶었더니, 이제 보니 검사가 칼을 뽑지 않은 거였다.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찌잉.
그리고 지금 뽑혀 나온 검도 예사롭지 않은 기물이었다.
날 부분이 빛을 받아 물결치듯 아롱지는 것이, 아마 두세 가지 성질이 다른 철을 접붙인, 그리고 수백 번의 단조를 거친 보검인 듯했다.
“당신 같은 고수를 품을 만큼 삼제자의 역량이 넓은 줄은 몰랐는데…….”
설휘가 한숨을 쉬며 자세를 잡았다.
사마령이 천마, 현 마교 교주의 사제라니.
뒷배로 두기에는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역량? 고수? 개방귀 같은 소리. 그냥 죽지 못해 사는 몸이다.”
헌데, 사마령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이었다. 얼핏 스쳐가는 표정에는, 불만과 분노가 스며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놈의 균형, 그놈의 조율. 그 빌어먹을 교주의 명령 때문에 죽지도 못한 이 늙은이가 끌려 나왔고.”
히죽.
사마령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나도 참, 말동무할 상대가 없다 보니 너 같은 녀석에게 신세한탄을 늘어놓았군. 닥치고 일단 붙자. 내 혈견휴(血見休)를 뽑은 이상, 반드시 피를 봐야 한다.”
혈견휴.
사마령이 뽑은 검의 이름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피를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는.
두두두두둑.
사마령이 검을 들자 또다시 특이한 기류가 흘렀다.
‘이런.’
지면이 꿈틀거리며 자갈들이 치솟는다.
내공이 얼마나 넘쳐나기에, 저런 무형의 기류를 유형으로 광범위하게 피워낸단 말인가.
‘어떤 무공을 어떻게 사용할지도 걱정되는데…….’
저 기류의 범위에 휩쓸리면, 조금 전처럼 필시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것 같았다.
‘어려운 상대다. 지금껏 싸운 자 중에서도.’
당장 교주와 같은 무공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마교에서 가장 우수한 마공은, 당연히 교주의 것일 터. 같은 마공끼리 부딪혔을 때, 내공이든 숙련이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패배하는 건 이쪽이 되니까.
그러니만큼 설휘는 가장 익숙한, 이제껏 제일 오래 써온 마공을 선택했다.
스스스슥.
사마령의 눈이 커졌다. 설휘의 빙공이 주입된 검 끝에서 서슬 퍼런 한기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소수…… 아니, 소신수마공?”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단번에 자신의 무공을 알아봤다. 설휘는 괜히 불쾌해졌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가리다.”
슈슈슈슈슉!
설휘가 검을 휘두르자, 주변에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특유의 시간 얼림이 발동된 것이다.
“……!”
하지만 사마령은 이미 알아차렸다. 자신의 기류 안으로 미세한 알갱이들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빙정(氷晶)?’
푸화아악!
빙정이 눈처럼 하얀 빛을 내며 주먹만 한 크기로 커졌다. 한두 개도 아니라, 주변을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빙정의 송곳들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쩌저정!
하지만 사마령이 일으킨 기류가, 빙정의 소나기를 완벽히 파훼했다. 너무도 쉽게 막힌 터라, 설휘는 입술을 질끈 문 뒤 다음 초식을 이어갔다.
“월공소하(月功素下)!”
소신수마공의 강력한 초식이 차례로 날아들었다.
“허어!”
사마령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언뜻 보면 달무리처럼 영롱한 힘이 담긴 빙공.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그냥 기공을 합친 힘으로 보았겠지만, 사마령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빙공의 힘은 그 특유의 냉기로 인해, 강기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받는 순간 내부로 스며들어 얼어 터진다.’
그는 즉각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됐다!’
한편, 빙공을 쏘아낸 설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대가 검을 들고 맞선 이상, 이번에는 승부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빙공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쳐 내든, 부수려 들든. 극도의 음기로 변해 상대의 내부로 스며드니까.
전력으로 몸을 피한 게 아닌 이상, 이걸로 끝났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휘이이이이--
“……!”
이번엔 설휘가 당황했다. 빙공이 그의 팔목과 검을 휘감다가, 되레 자신 쪽으로 날아온 것이다.
건곤대나이.
이 또한 천마의 무공. 천마신교 전통의 호교신공이었다.
“으윽!”
큰일이었다. 나름 전력을 담아 쏘아낸 공격이라, 파훼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설휘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하나의 수법.
사량발천근이었다.
[화경 ON]
‘태극의 묘!’
급하게 경지를 바꾸고, 태극의 묘를 펼쳤다.
되돌아온 빙공은, 설휘의 검 끝에 맺혀서 빙그르르 방향을 틀더니, 저 멀리 날아가 폭발했다.
쾅! 쿠아아아아앙!
사방에 얼음기둥이 쩍쩍 돋아났다. 마침 좀 전의 불바다 위로 냉기가 퍼져나가, 갑자기 북해의 빙벽처럼 허옇게 얼어붙는 일대 장관을 보였다.
“오호.”
사마령은 또다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변했다.
사정상 강호 출도는 하지 못했지만, 그의 무위는 꽤 높았다. 당연히 설휘가 사용한 무공이 어떤 것인지도 알아보았다.
그래서 기가 막혔다.
조금 전에는 천마의 무공이더니, 이번에는 도가의 검법. 그것도 제대로 배운 무당의 태극검이 아닌가.
“정종무공을 익혔더냐? 무슨 수로?”
사마령은 이제 호기심을 넘어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사량발천근이라 해도, 방금과 같은 강력한 기운을 흘려내려면 그 가운데는 정순한 기운과의 절묘한 조율이 있어야 했다.
마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운.
마공으로는 도저히 조정할 수 없는 기운이.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소.”
“끌끌끌. 이 녀석,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하하!”
쿠쿠쿵.
사마령이 크게 웃으며 땅을 밟자, 바닥에서 기류가 십 장 이상 뻗어 나갔다.
한순간에 설휘 앞까지 다가와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한번 상대해 주지.”
스스스슥.
그 기류는 거짓말처럼 다시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줄어들었다.
그의 애검이라는 혈견휴. 그 검날에 흰빛 기운과 함께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검강. 절대무학이 뿜어내는 기운.
그것이 기류와 더불어 증폭되며 투명한 아지랑이처럼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 검막?!’
설휘는 눈을 부릅떴다.
이건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알 것 같았다.
강기, 그리고 그 주변에 희미한 막을 형성하는 형태.
대체 얼마나 경지가 높고 내공이 심후한 것인가. 검날에 무려 강막을 형성해 내다니.
“까면 깔수록 재미가 각별한 아해로다. 어디, 꿍쳐둔 수가 얼마나 있는지 더 꺼내 보거라!”
우우우웅!
설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사마령은 완벽하게 자신을 봉쇄하는 무공을 꺼내 들었다.
광범위한 범위로 덮쳐오는 강막.
이건 사량발천근으로 흘려보낼 수 없었다. 공격이 화살이나 칼이었다면, 쳐내거나 막을 수 있지만.
우우우웅!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사람이 어찌 막을 것인가.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설휘는 또 하나의 특수 기술을 떠올렸다.
태극의 요체.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태극혜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