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새로운 경지 (4)
“흡!”
혈견휴가 뻗어오는 순간, 설휘는 즉각 특수 기술을 발동시켰다.
태극천루(太極天漏).
태극혜검의 절학이라 일컬어지던 초식. 그것으로 응대하려고 한 것이다.
곧 그의 검 끝에서 생성된 백강(白罡)이 사마령을 향해 날아갔다.
쩌어어어엉!
정파와 마교. 무학의 절대쌍벽을 이루는 기운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가 뿌린 강막은 처음에는 사람 반신만 했던 것이, 날아올수록 점점 커졌다.
그리고 자신의 백강과 마주쳤을 때는 거의 집채만 한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의 태극천루는, 초식만 알고 있을 뿐. 이제껏 단 한 번도 펼쳐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상대의 마공, 그것도 거대한 강막을 파훼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수밖에.
촤아아아악.
두 힘은 크게 부딪혔다. 공력 일부가 파편처럼 떨어져 나가며 장관을 연출했다.
그러기를 잠깐.
백강의 기세가 점차 누그러지고 있음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열세인 것이었다.
그그그극.
“아…….”
아니나 다를까. 백강이 사라지자마자, 거대한 강막이 날아왔다.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빠른 탓에, 설휘는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끝인가.’
죽음의 그림자.
거대한 기운 앞에서 설휘는 이번 생이 이대로 끝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때.
파아아앗.
맹렬하게 다가오던 상대의 강막이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설휘에게 당도했을 때는, 그저 살랑살랑 부는 산들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설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스스스슥.
손끝으로 흘러 들어오는 기류의 흐름. 그걸 느끼고서 자신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혜검(慧劍)의 요체.’
해일처럼, 감히 대적할 수 없을 것 같던 상대의 기공이 그 공력과 함께 상쇄되었다.
서로 다른 성격의 기공이 부딪혔는데 폭발은 없었다. 그건 힘을 힘으로 제압한 게 아니라는 의미.
‘이것이 태극천루…….’
이 초식은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공이 아니었다.
다른 적대적인 기운을 봉쇄하고, 무위로 돌려버리는 성질을 가진 무공. 그래서 강막의 매서운 기운을 상쇄시켜, 그저 하나의 기류로 돌려버린 것이었다.
“허, 허!”
또다시 자신의 공격이 가로막히자, 사마령은 어이없는 듯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나름 최고의 절기 중 하나를 펼쳤는데, 이 녀석은 그 기운마저 파훼시켰다.
무엇보다 그것이 같은 마공이 아니란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네놈! 방금 태극혜검을 펼친 것이냐!”
다른 건 몰라도 도가의 태극검은 마교에서도 유명했다. 그중 무당의 태극혜검은 그야말로 태극의 정수.
마공이든 정공이든, 상대하는 모든 공력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무공이니,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밖에.
설휘가 대답이 없자, 그는 더욱 소리를 높였다.
“본교의 마인이 정공을 무슨 수로 익힌 거야?!”
“어,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그리고, 격하게 화를 내던 사마령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갔다.
그와 함께 눈앞에 뜬 새로운 창은, 다시 한번 설휘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다.
[수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싸우고자 하는 사마령의 의욕 50%]
‘의욕?’
설휘는 시선을 창에서 사마령에게로 이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글귀. 그간의 경험으로 50%라는 말은, 절반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싸우고자 하는 의욕이라면…… 전의를 말하는 건가?’
싸움을 멈추고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렇게 짐작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 괜히 손을 섞기 싫어지는 녀석일세.”
사마령의 눈빛이 이전과 달리 변했다.
이미 몇 차례 힘 대 힘으로 부딪친 게 실패로 돌아갔고, 이번엔 나름 최대의 전력을 끌어냈는데도 무위로 돌아갔다.
물론 스스로 죽자 사자 싸우려 들면 일단 승부는 낼 수 있겠지만, 오늘 처음 본 설휘에게 딱히 그럴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런 기회, 다시는 없다!’
다만, 그의 기세가 줄어들자, 설휘가 오히려 기운을 끌어다 올렸다.
사마령은 이제껏 만난 적들 중에서 거의 가장 강한 상대다. 처음에는 여기서 맞아 죽겠다 싶었는데, 어찌 된 건지 스스로 물러서려는 눈치다.
태극혜검의 위력을 알고 피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마교 특유의 강자존의 사상. 무위로 밀어붙이며 적당히 예우를 갖추면,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전의 선택지에서도 그런 언급도 있었고.
물론 모험이었다.
상대가 다른 이였다면 설휘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치 교주인 천마의 사제가 아닌가.
이건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극마 ON]
파앗.
설휘는 재빨리 경지를 바꾸며 달려나갔다. 동시에 튀어나오는 열 개의 환영들.
천마군림보의 시작이었다.
“실로 해괴한 놈이로고!”
솨아아악.
사방으로 달려드는 인영을 향한, 사마령의 대응은 단순했다.
자신의 애병인 혈견휴를 수평으로 그었다. 그러자.
슈와아아아아아아----쾅!
아까와 같이 주변이 화마로 물들었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강대한 힘이 사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글지글 불태웠다.
피이---이익. 치이칙.
폭발이 일어나고, 화마가 가라앉기 전에 침투하는 또 하나의 인영.
그 모습에 사마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엔 상대가 열 개의 환영이 아닌, 또 하나를 더 만들어서 펼쳤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따위…… 억?!”
목표를 향해 쫘악 뻗어지던 검이 멈칫했다. 자신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던 신형이 일순 사라져버렸기에.
‘설마, 천마잠형술?!’
사마령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노고수는 머리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공격하려던 힘을 그대로 흐트러뜨리며, 몸을 틀어 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사라졌던 설휘는 그곳에 있었다. 일격을 가하려는 것을, 정말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과연 교주의 사제답소…….”
“이런, 건방진!”
쩌저정. 지이이익.
서로 검신을 맞대고 공력을 싣자, 설휘는 그 자세 그대로 밀려났다.
치이이잉!
그리고 이번엔 사마령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화경 ON]
[태극의 묘를 사용합니다.]
설휘는 즉각 경지를 바꾸고 태극의 묘를 시전했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사사사사삭.
상대가 검을 휘두르자마자,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공들.
‘이게 무슨…….’
처음 그 장면을 본 설휘는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그저 일검을 뿌렸을 뿐이다. 그런데 정면에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팔방에서 동시에 검공이 날아오다니?
“하압!”
이윽고 예상대로 사마령이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설휘는 가히 맞받아치지 않고. 곧장 뒤로 바닥을 굴렀다.
그 순간.
쿠와아아아앙!
조금 전까지 설휘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렬한 불기둥 여섯이 치솟아 올랐다.
‘미친……!’
눈으로 보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분명 상대는 한 명인데, 동시에 여러 사람이 자신을 향해 검공을 쏘아낸 것처럼 공격이 날아든 것이다.
‘이게 가능해? 신법과 무공을 동시에 펼치는 게?’
보법에는 보법만의 흐름이 있다. 보법 사이에 펼쳐내는 무공의 연속성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걸 동시에 펼쳐낸다는 건 이론상 불가능하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 기운을 쏘아내는 것은, 순환의 방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 이걸 또 예측한 거냐?”
사마령은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매번 설휘가 이리저리 생쥐처럼 빠져나가며, 맞을 듯 안 맞을 듯하는 일이 계속되자, 그의 눈매는 극도로 예리한 빛을 띠게 되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셔서 감사하오. 노선배.”
“사정은 얼어 죽을…….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이거?”
그러고는 풀썩, 얼굴이 풀어졌다.
[수치가 25% 하락합니다.]
[싸우고자 하는 사마령의 의욕 25%]
설휘는 그에 흠칫했다.
눈앞에 떠오른 수치, 상대의 싸우고자 하는 의욕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당장 표정으로만 보아도, 이대로 한두 번의 공수를 더 나누면 그냥 본인이 자리를 뜰 분위기였다.
‘안 된다. 여기서 붙잡아야 해.’
설휘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생각해둔 무공은 둘.
먼저, 살마가 익혔던 사대극마공의 화였다.
[극마 ON]
스르륵.
설휘의 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은 일부가 자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뱀의 형상을 이루며 혀를 날름거렸다.
“이, 이건…….”
사마령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이 마공이 어떤 것인지 아는 탓이었다.
스르르륵.
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떠올라 번져나가는 불의 띠는, 정확히 방향을 정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휘어지며 자신을 노릴지 미지수다. 사대극마공의 화는 애초부터 그런 악랄한 마공이었으니까.
“이번은 선배도 조심하시지요!”
“……어떻게 이런!”
지지지지지직.
허공에 다시 원이 그려지자, 사마령은 깨달았다.
상대가 대멸천분공(大滅天焚功)을 쓰려 한다는 것을.
“좋다. 받아주마.”
콰르륵!
사마령이 디딘 땅에서도 마력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절륜한 마공에는 절륜한 마공으로 받아치는 게 답이다.
“대멸천분공.”
“천마폭렬공.”
그리고 폭발과 함께 스며드는 두 사람의 짧은 음성.
구구구구궁. 쿠아아아아아앙!
실로 거대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기류로 기공을 증폭시켜 강력한 화마를 생성하는 천마폭렬공과.
사대극마공 화의 정점, 멸화공의 힘이 담긴 폭발이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
구구구구궁.
폭발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강대한 위력의 여파가 계속해서 터져나갔고, 돌이든 나뭇조각이든, 죄다 모래처럼 부스러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사령대는, 부딪히는 순간 급히 자리를 피한 뒤 폭심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큽.”
자욱한 먼지들이 흩날리는 가운데, 누군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설휘였다.
‘살았나?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로, 설휘는 사마령의 존재를 확인했다.
지금은 그를 포섭하겠다는 생각보다,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궁금했다.
솔직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방금의 일격은 그만큼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저자와 다시 싸우라고 하면,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디지?’
서서히 분진이 걷히는 동안, 설휘는 녀석을 찾았다.
일단 자신이 죽지는 않았으니 이겼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가 어떻게 됐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살피던 와중에.
[수치가 모두 하락합니다.]
[싸우고자 하는 사마령의 의욕 0%]
[사마령이 사라졌습니다.]
뒤늦게 뜨는 정보들.
그랬다. 사마령은 결국 자리를 뜬 것이다. 천마의 사제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가지고도.
“제길,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설휘는 크게 아쉬워했다.
상대는 엄청난 거물이었다. 직접 손을 섞어보니 극마에서도 통달을 넘어선 실력자로 보였다.
그런 인물이 싸움에 승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사라지나? 나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터라 약간 허망했다.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때마침 달려오는 사령대 조장들.
그들은 홀로 남은 설휘를 보고서 빠르게 안위를 물었다.
“그래. 괜찮다.”
설휘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제는 보이지 않을 곳을 보며 말했다.
“실패했구나.”
“……네?”
“……그런 게 있다.”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사마령.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인물, 그리고 포섭하고 싶은 아까운 인물.
이번에는 운이 좋아 승세를 거뒀지만, 다음번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이런 글귀가 떴다.
[저장하시겠습니까?]
“…….”
어째, 이건 이거대로 의미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