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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육성 시물레이션-285화 (289/379)

285화. 비틀린 운명 (1)

이렇게 시간을 기록하겠냐는 창이 뜰 때에는 항상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당장 저장 목록에 적힌 글귀만으로도 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즉, ‘저장’이란 능력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편의 중에서도 가장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다.

[어느 지점에 기록을 남기시겠습니까?]

■ 천력 96년. 권력 재편의 날!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그럼에도 설휘는 지금 상황을 기록에 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사마령을 설득하거나 사로잡는 데 성공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실패한 상황을 굳이 기록에 덧씌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 문제가 발생한다면, 차라리 목록 중 첫 번째 기록을 불러오면 될 터.

[저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거부하고 돌아서려는데, 다시금 창 하나가 눈앞을 가렸다.

이번엔 지문이 생성된 것이다.

[아래의 지문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 본대로 복귀합니다.

▷ 삼제자 아령을 찾아 나섭니다.

▷ 사령대를 이끌고, 본교를 이탈합니다.

‘이건 또 뭐냐…….’

마치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선택지들.

본대로 복귀한다처럼 자연스런 선택지도 있었지만, 어디 있는지 모를 아령을 찾아 나서겠다는,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선택지도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적진으로 더 들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거기다 셋째 지문은 더 황당했다. 사령대를 이끌고 본교를 이탈한다? 대체 왜?

그렇게 하면 뭐가 좋아지는 걸까?

설휘는 황당한 지문에 속으로 웃다가, 이내 흠칫했다.

‘사령대를 이끌고 교단을 이탈한다고?’

생각해 보니, 여기에 선택지가 있는 것이 뭔가 의미심장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보면 아령을 찾아 나선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정보가 있다면 여기서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본대로 복귀합니다.]

그 정보를 얻으려면, 우선은 빨리 본대로 돌아가서 정황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

- 무슨 일이 있었느냐? 쓰러졌다는 얘긴 또 뭐고?

- 어쨌든 다행이구나.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으니…….

-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어서 치료부터 받거라. 사제자님이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곤마의 영역 내로 들어서자 흑마전주와 악비, 초아란이 직접 나와 반겨주었다.

설휘는 그들의 살가운 말에 뭐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제 맘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새하얀 빛이 시야에 들어왔고. 다시금 어둠으로 변했다.

- 팔과 다리에 화상이 제법 있습니다만, 다행히도 피륙에 그쳤습니다. 내상도 크지 않아서……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의원 한 명이 치료 상황을 보고한 뒤,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을 때는.

“…….”

설휘는 방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천천히 몸이 움직여졌고, 감각이 돌아옴이 느껴졌다.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복잡한 감정이었다.

임무를 끝낸 뒤 강제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이제껏 그러려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은 심히 불편했다.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하며,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스스로 손을 쓸 수 없는 통제 밖의 시간.

암만 애를 써봐야 결국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눈앞에서 불현듯 생성되는 지문도 그렇다.

한 번 경험해 보기 전에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이대로라면 결국 시스템이 짠 설계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언제쯤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가.”

설휘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사실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시스템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진작에 죽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

“벗어날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설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그중 핵심무사가 되고, 큰 공을 세워 곤마에게 갔을 때 일부 통제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거기다 마교를 벗어나 강호로 나갔을 때는 시스템의 통제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존재했고, 결국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설계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AI 놈. 그 녀석도 제정신이 아니군.”

이런 삶을 무려 수천만 번이나 바라봤다는 놈.

자신의 회귀 횟수는 헤아려봤자 고작 두 자리 숫자에 머무른다. 그 정도만 해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런데 AI는 수백 수천 번도 아니고. 수천만 번.

쉽게 말하면 이 시스템의 굴레 안에서 억만 년을 살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인간의 감성이 마모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니, 그보다 지금에 이르러서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 괴물도 당해내지 못한 강자라니.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실로 독보적인 인물.

셀 수 없는 많은 인물 중에서 정점에 도달한 존재.

자신이 그런 경지에 갈 수 있을지, 도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깊은 고민을 하던 중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했더니…… 괜찮으냐?”

“아…….”

잠깐 잠들었던 건가.

옆을 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곤마가 와 있었다. 표정이 밝은 걸 확인한 설휘가 예를 갖췄다.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기껏 은영단의 단주로 임명되었는데, 적을 추적하는 도중에 자신이 쓰러지기까지 하고, 지원받은 은영단 중에서 상당수의 정예를 잃었다.

“아니다. 전장이란 원래 언제 전황이 바뀔지 모르는 법. 더군다나 적들의 장기 중의 하나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교란작전이니,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곤마는 설휘가 일으킨 실수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은 듯했다.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쪽의 장로들을 일망타진한 성과를 거두었다.

곤마의 아래에 있는 수하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이 정도 결과를 낼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 책망할 마음 역시 없었던 것이다.

“전세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설휘는 현재 상황을 물었다.

그간 강제적으로 시간이 진행되어, 병상에 누워 있던 기억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형세가 어떤지를 알고 싶었다.

“뭐…… 일단 사저는 둘째 사형에게 붙었네.”

“예견한 대로군요.”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곤마의 기습으로 피해를 보았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사저의 병력이 꽤 되는 모양일세. 전력 전부를 잃은 게 아니라서…… 나중에 둘째 사형을 상대할 때 놈들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겠어.”

“그거야 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곤마는 약간 뜸을 들였다.

아마 살마를 언급하려고 하는 듯 보였다.

“대사형은 세력을 확장했다. 총단, 원로원, 은마원 등 가리지 않고 병력을 모으다 보니, 단시간 내 한 일치고는 상당한 수확을 거둔 모양이다. 또한, 중원에서도 접촉한 문파가 있는 듯해. 거기서 몇몇 인물을 본교로 데리고 왔다는데…….”

“화산파군요.”

“……!”

곤마는 크게 놀라며 설휘를 바라보았다.

그에 설휘는 생각하는 척,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전에 제가 드렸던 여지도에는, 태황각주가 오랫동안 화산파와 만났을 걸로 추정되는 위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자의 주인이 곧 일제자 살마였지요.”

“으음.”

“그리고 지금처럼 표변하는 본교의 세력 구도에서, 살마의 성격상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외적과 손을 잡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승리하고 난 뒤 어떻게 구도가 바뀔지는 그때가 되어봐야 알 테지만.

“그럼에도 둘째 사형이 더 까다로워졌어…….”

곤마는 짧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은마원을 뒤져 은거했던 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당장 나도 이름을 듣고 놀란 고수들이 제법 있더군. 그러고도 모자라 오각 중 두 곳인 비상각과 운영각을 접수했네.”

“오각이라면…….”

“그래, 대사형을 따르는 조직이지.”

“허!”

놀라운 일이었다. 오각은 모두 일제자를 따르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났다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그래서 대충 전주와 어르신을 모아 사형들의 병력을 분석해 보니……. 대략 병력이나 수, 질적인 면에서 우리와 비등하게 나왔네. 어제까지는.”

어제까지?

설휘는 곤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부터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나올 걸 예감하면서.

“천야각을 통해 들은 정보로는, 둘째 사형 쪽에서 비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네.”

“비정상적인 활동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실혼인.”

“……!”

설휘는 무슨 뜻인지 곧장 이해되었다. 마후를 따르는 집단 중에 기기아대가 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표정을 보니 실혼인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나 보군.”

“예.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는 강시들과 달리, 온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이들입니다. 몇몇 놈들은 조금의 사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맞네. 그런 녀석들을 강제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더군. 일개의 전대를 만들 정도로.”

“아…….”

“숫자도 숫자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들의 경지일세. 무위가 자그마치 초절정에 다다른 실혼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 주술을 아는 이에게 물었더니, 오히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되물어오더군.”

초절정 경지의 실혼인 일개 전대.

말이 초절정이지,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강력할 것이다.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지시가 떨어지면 죽음을 불사하고 맹목적으로 따른다.

마후는 수적인 열세와 질적인 열세를 이런 식으로 보충하고 있었다.

“허면 이대로 둘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대로 두면 안 되지. 대사형은 당장 자신들 안위 때문에 모르는 듯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균형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야.”

앞으로 실혼인의 숫자는 더욱 많아질 거다. 지금이야 일개 전대지만, 나중에는 일대 군단이 될 수도 있다.

비상각과 운영각에 있는 이들을 포섭한 것도 거기에 의중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 소속의 무사들을 대거 실혼인으로 만들어 내면, 수적 우위는 단숨에 마후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래서 대처할 방법을 찾는 중에, 묘한 정보가 하나 들어왔네. 알고 보니 초절정급 실혼인을 만들어내는 곳은 둘째 사형의 기기아대 중에서도 단 한 곳뿐이라는 게야. 주술력이 각별한, 단 한 명의 제작자가 새로 추가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혹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휘는 저도 모르게 곤마에게 먼저 물었다.

“그 실혼인의 제작자는, 어린 소년이 아닙니까? 이름은 송화라고 하고?”

“……그걸 자네가 어떻게?”

곤마는 놀란 듯 바라봤다.

지금 그가 말한 정보는, 기려사대를 통해서 극비로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운명이…… 돌고 돌아 이런 식으로 오게 되는 건가.’

설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과거 회차에서 그렇게 생사를 같이했던 송화.

그가 당시에 했던 여러 말들이 떠올랐다.

“실혼인을 제작하는 술사만 제거하면 된다……. 그럼 굳이 많은 인원을 동원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리고 곤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깨달았다. 바로 설휘 자신이 직접 나서 달라는 제안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임무는 그 아이를 꼭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까?”

설휘는 물었다. 곤마로서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그 자신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이 있겠나?”

“실은, 제가 그 술사에 대해 몇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포섭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곤마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술사 소년 송화.

적의 손에 있기에 제거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게 더 좋았다.

“그러면 좋기야 하겠네만……. 가능하겠나?”

“…….”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이제자의 핵심 전력인 실혼인들. 그들을 만들어내는 시설에는 아마 최고 수준의 경비가 세워져 있을 터.

그런 적진에 잠입해서, 신체가 미약한 송화를 데리고 나온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껏 장난질을 수도 없이 쳐댄 시스템이, 또 다른 제약을 걸어댈 것 같기도 하고.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설휘는 결정했다.

지금으로선 이게 맞았다.

이것 이외의 방법을 선택한다면, 송화는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출전하시겠습니까?>

설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조차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운명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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