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비틀린 운명 (2)
<출전하지 않습니다.>
“음? 뭔가 이유가 있는가?”
설휘가 거부 의사를 밝히자 곤마가 물어왔다.
“출전하기 전에 준비를 좀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라면…….”
“저기, 혹시…… 영약을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설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말을 꺼낸 자신이 생각해도 질문이 좀 그랬다. 이 정도면 거의 내놔라 수준이 아닌가.
“허, 허허허허!”
다행히 곤마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기가 차서 웃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영약이라……. 그래. 싸움을 앞두고 영약을 챙기려는 건 당연하지. 안 그래도 전부터 너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이 있었다.”
다행히 곤마는 손짓하며 자연스레 뒤돌아섰다.
“따라오너라.”
***
곤마가 향한 곳은 집무실 뒤쪽에 붙어 있는 작은 안채였다.
끼이익.
문을 여니, 한쪽 벽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약재들이 내걸려 있었고, 앞쪽과 옆에는 수많은 병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마음껏 가져가게.”
“아…….”
설휘가 멈칫했다.
벽에 걸린 무구들을 보니, 성능은 둘째치고 외관부터 대단히 화려해 보였다.
아마도 곤마에게 특별히 들어온 선물들인 것 같았다. 이런 걸 정말 마음대로 가져가도 될까?
말없이 시선으로 묻자, 곤마가 피식 웃었다.
“본래 천마님의 제자쯤 되면, 여기저기서 청하지도 않았는데 선물을 들고 오는 이들이 있네. 모두 감사한 일이지만, 대부분은 나에게 맞지 않는 것들이지. 그러니…… 자네가 가져다 쓴다면 오히려 좋은 일일 터.”
“……그러십니까.”
설휘는 곤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생각해 보면 천살성을 가지고 태어난 곤마에게, 영약이나 무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가 진심으로 싸우고자 하면, 한낮 낡은 철검도 신병이기나 다름없게 되고. 또, 한 번 천살성을 폭주시킨다면 영약이 아니라 대라신선이라도 살릴 수 없었으니까.
단 한 번의 절대적인 승리를 보장하지만, 그 대신 반드시 목숨을 잃고 마는 비운의 운명이었다.
“그럼…….”
설휘는 더 사양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무구와 영약을 하나씩 살폈다.
마음 같아선 도구함에 많이 챙겨 넣고 싶지만, 그건 생각으로 그쳤다.
아무리 곤마가 그렇게 말했다 해도, 여기 있는 모든 걸 싹 다 쓸어갈 수야 없지 않은가.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간단한 약초들은 척 봐도 보류할 수 있었다.
생김새도 볼품없긴 했지만, 특유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몇몇이 좀 눈에 띄어서 도구함에 집어넣어 보면, 죄다 효과 좋은 금창약 수준이라고 판별되었다.
그래서 창고를 싹 다 털다시피 해서 찾아보고, 그 가운데 가치가 있어 보인 것은.
○ 천양금황단(天壤金凰丹)
설명 : 천지의 양기를 수백 년 머금은 황색 열매를 갈아서 만든 단약.
효과 : 심신에 끼치는 부정적인 기운을 날려준다.
‘좋은데?’
그냥 신체가 아니라 심신(心身)에 끼치는 부정적 기운?
심력이 소모되거나, 주술 혹은 진법에 의해 정신의 마모가 일어났을 때. 그런 부정적인 효과를 정화해 줄 수 있는 단약인 듯했다.
‘이건 하나 챙기고.’
[천양금황단을 얻었습니다.]
일단 하나를 도구함에 넣고, 또다시 돌아보며 하나씩 맘에 드는 걸 골랐다.
아쉽게도 태청단처럼 특수한 영약 같은 건 없었지만, 그럭저럭 준수한 영약 두 개를 더 챙겼다.
[마령혈수(魔靈血水)를 얻었습니다.]
[보천환(保天丸)을 얻었습니다.]
그러고는 더 없을까, 하고 마지막으로 돌아볼 때.
‘어?’
뭔가 은은한 빛이 숨 쉬듯이 희미한 광채를 피워 올리는 약재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도구함에 넣지 않아도 자연스레 정보가 떴다.
○ 자하미란(紫霞迷亂)
설명 : 자하의 기운을 품으며 자라난 난초.
효과 : 기공을 운용할 시 자하의 기운을 실어준다.
‘이게 영약이야 뭐야?’
자하라면, 화산파의 자하신공을 말하는 건가?
그럼 이 약초를 쓰면 화산파의 내공을 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조금 수상쩍긴 했지만 설휘는 혹여나 싶어 이 녀석을 챙겼다.
‘일단 이것도 가져가고.’
[자하미란을 얻었습니다.]
“다 골랐느냐?”
“아, 예.”
그럭저럭 영약을 챙기고 나니, 곤마가 다시금 턱짓했다.
“그럼 저기, 병기도 한번 골라 보거라. 이제까지 네가 제대로 된 신병이기를 갖춘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그, 저는…….”
설휘는 곤마가 주었던 예오후검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얻었던 신검이었다. 이 선택지에서는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
설휘는 다시 뒤돌아 이번엔 병장비가 있는 곳에 섰다.
대여섯 벌의 갑주와 수투. 그리고 칼, 도, 장, 창. 등 없는 게 없었다.
“음…….”
여기저기 널린 병기들은 하나같이 예기가 서린, 특별한 무구들이었다.
전에 쓰던 예오후의 검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잘 제련된 병기보다는 훨씬 급이 높았다.
‘딱히 검이 아니라, 다른 부무장도 좋겠지.’
고민하던 설휘는 일단 팔을 뻗어놓았다. 혹여나 특별한 병기가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개를 거쳐 가는데.
[폭뢰검(瀑雷劍)을 발견했습니다.]
눈앞에 글귀가 뜨면서 능력이 표시되었다.
[폭뢰검]
설명 : 대장장이가 만든 신병이기. 뇌전이 기운이 담겨 있다.
특수 능력 : 뇌전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
“그건 수영 장로에게 받은 거다. 오래전 남궁세가에서 훔쳐 온 보검이라고 하더군.”
“아, 그렇군요.”
뇌전이 담겼다는 말에 흥미가 동했다.
설휘는 망설임 없이 집어 들며, 다시금 다른 것들을 훑어보았다.
[잔혈비(殘血匕)를 발견했습니다.]
‘오.’
설휘는 곧장 설명을 확인했다.
[잔혈비]
설명 : 단검과 비슷한 형태의 암기의 일종. 날 끝에 수천 개의 칼날 조각이 세공되어 있어, 적에게 일격을 맞추면 팔과 다리 부위라도 몸속으로 파고드는 효과를 얻음.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안에 죽게 하는 치명적인 암기.
특수 능력 : 평소 암기의 속도를 50% 향상시켜준다.
‘음.’
설휘는 잔혈비의 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뭔가 희미한 녹색의 잔광이 흐르는 것이 범상치가 않아서.
“그건 당가에서 얻은 거네.”
“그렇군요.”
곤마의 말에 설휘는 이것도 하나 챙겨뒀다.
뭐든 괜찮은 걸 챙겨놓으면, 훗날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 것이었다.
그렇게 또 암기를 지나, 이번엔 도가 내걸린 쪽에서 슬쩍 손을 하나하나 대면서 만져보던 중에.
또다시 뭔가가 떴다.
[사라인곡도(沙羅刃曲刀)를 발견했습니다.]
‘이건 뭐지?’
설휘는 호기심을 가졌다. 검과 도와는 좀 다른, 낫과 비슷한 형태의 곡도.
날이 조금 예리해 보이는 것 외에는 딱히 비범하지 않았다.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곤마도 별다른 얘길 해오지 않는 걸 보니. 그도 이 무구의 출처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선 정보를 보는데.
[사라인곡도]
설명 : 이것은 본래 천축에서 만들어진 물건으로, 사라는 범어(梵語)로는 살라. ‘집’을 뜻함.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뜻을 내포함.
특수 능력 : 이 곡도를 사용하여 적을 죽이면, 내공과 체력의 10%가 회복
“허, 이게…….”
설휘는 눈이 다시 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런 거였다. 대단하거나 특수 기술을 쓰는 병기도 좋지만, 아예 별도의 능력 자체가 다른 신병이기.
‘이거면 난전 상황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겠어.’
적을 죽일 때마다 회복하는 무기라니. 일대일의 강적과의 전투가 아니라, 다대일의 학살에 특화된 능력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설휘는 이걸 주섬주섬 챙기고는 이제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갑옷이 있는 쪽으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설휘가 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이름 모를 병기들을 손에 든 설휘를 보며 곤마가 물었다.
“다 골랐느냐?”
“그렇습니다.”
“그게 다 맘에 드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래. 나중에 더 원하는 게 생기거든 언제든 날 부르거라.”
“감사합니다.”
곤마의 말에 설휘는 예를 표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 보거라.”
“혹 전에 제가 드린 여지도를 가지고 계십니까?”
“여지도라면…… 황가산의 그 지도 말이더냐?”
“예.”
곤마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있지.”
“아, 잠시만 제게 맡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굳이 묻지 않고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이것으로 곤마가 제시하는 세 가지의 삶.
훗날 죽어서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선택하게 되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혹시나 모르니까…….’
설휘는 황금 벨트를 이용해 앞서 가지고 온 영약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출전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곤마가 다가와 여지도를 건넸고.
[도구함에 넣으시겠습니까?]
여지도를 보관함에 넣었다.
“자. 이제 준비됐느냐?”
그의 물음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전하시겠습니까?>
글귀에 동의하자 눈앞에 다시금 새하얀 빛이 들어왔다.
설휘는 또다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
홧!
다시 시야가 암전되었다. 새하얀 빛과 어둠이 연속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명암이 파도처럼 거칠게 흔들리기를 얼마 후, 완전히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다시금 감각이 돌아왔을 때.
사박사박.
제일 먼저 돌아온 것은 청각이었다.
츠츠츠. 투투둑.
풀을 밟는 소리. 벽을 넘는 소리.
조용히 지면을 밟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쯤 시야도 돌아왔다.
화르륵!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횃불.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속에서 한순간 정적과 함께 펼쳐진 엄폐와 은신.
그리고.
“……!”
“읍!”
한두 번씩 새어 나오는 단말마.
손에 축축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오더니 이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여긴…….”
눈에 들어온 것은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었다.
아주 완벽히 오래된, 그리고 온통 토벽(土壁)으로 지어진 밀실 같은, 흡사 뇌옥을 연상케 하는 환경이다.
꽉 막힌 천장과 벽을 둘러보던 설휘는 이번엔 바닥을 내려 보았다.
“뭐지…….”
자신 앞에서 쓰러져 있는 두 사내.
툭.
가볍게 걷어차 보니 반응이 없었다. 호흡도 맥박도 없었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는…….
“허.”
이번에 곤마의 안채에서 얻은 곡도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죽인 건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뒤늦게 곡도를 휘두르는 잔영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 상대가 이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전에는 은영단원이 있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렇게 설휘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곡도를 바라볼 때였다.
[경지가 강제적으로 하락합니다. (초마)]
- 반 시진 후 본래대로 돌아옵니다.
‘이게 뭐야?’
이윽고 떠오르는 글귀들.
창에 뜬 정보와 함께 온몸에 힘이 쭈욱 빠지며 불쾌한 기분이 느껴졌다.
지난번처럼 경지 하락이 강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우선 위기를 탈출하세요.]
3,600…… 3,599……
제한 시간도 있는 것 같았다.
설휘가 급히 나갈 공간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쿵쿵.
“뭐야? 여기 왜 문이 잠겨 있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문에서 놈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영락없이 자신의 존재가 발각될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