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비틀린 운명 (3)
쾅!
문이 부서지며, 무인 셋이 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뭐야? 왜 아무도 없지?”
그러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자, 이내 말을 주고받았다.
“대체 문은 누가 잠근 거야?”
“잠깐 쉬라고 했더니, 다들 어딜 간 거지?”
안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다들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던 중 한 무사가 바닥의 한곳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뭐지?’
뚝. 뚝.
물방울 같은 것이 아주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싶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끈적한 붉은 것이 고여 있었다.
“피……?”
동그랗게 커진 그의 눈이 천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 뭔가가 떨어져 내렸고.
쇄애애액!
목으로 날카로운 것이 지나감과 함께 그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설휘의 곡도에 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뭐냐!”
“어?!”
갑작스러운 등장에 무사 두 명이 반응했고, 그중 하나는.
“억!”
머리에 암기가 박힌 채,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살아남은 마지막 무인은.
“읍!”
눈 깜짝할 사이에 입이 틀어 막혔다. 설휘가 그의 입을 막으며, 곡도를 목에 겨눈 것이다.
“몇 가지 물을 건데…… 살고 싶으면 눈을 깜박여라.”
“…….”
무인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스며들었다.
상대가 엄청난 고수란 걸, 그리고 저항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깜박깜박.
“좋아. 소리 지르거나 허튼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는 알겠지?”
깜박깜박.
붙잡힌 채로 그는 격렬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설휘는 그의 입을 막았던 것을 풀어 주었다. 보아하니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었다.
“좋아. 여긴 어디냐?”
“…….”
질문이 좀 이상했던 걸까. 녀석은 눈을 굴리며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이내 순순히 고했다.
“여, 여기는 실혼인을 관리하는 제관들이 있는 곳입니다.”
“실혼인……. 기기아대가 만들어낸 놈들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근데 왜 감옥 같은 곳에 두었지?”
“아니, 아무래도 다른 외부인의 이목을 속여야 하니까…….”
“흠.”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이번에 나타난 새로운 실혼인은, 가히 전술 병기라 할 수 있었다. 정확한 숫자와 능력을 숨겨 두는 게 유용할 터. 그래서 이런 감옥에 둔 것이다.
“제작된 실혼인들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지?”
“그,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이곳은 워낙 다양하고 비밀리에 많은 밀실이 있어서…….”
“주로 모이는 곳은 알지 않느냐?”
“이, 일단은 대부분 지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는 인원은 따로 뽑아서…… 저 같은 말단은 그리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그래……?”
잠깐 고민하던 설휘가 방향을 틀었다.
“좋아. 그럼 수뇌부들, 이들을 직접 관리하는 인물은 어디 있느냐?”
“아. 그거라면 이곳을 지나 쭉 직진하시다가, 계단을 타고 삼 층 중앙에 있는 회의실로……. 어?”
“……?”
갑자기 말하던 녀석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드드득!
그러더니 얼굴이 공기주머니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
멈칫하던 설휘가 뒤로 물러났고, 사내의 얼굴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이런…….”
사방에 터진 뇌수들. 옷에 묻은 것들을 털어내며 설휘가 인상을 썼다.
‘주술에 걸려있구나.’
남자가 죽은 이유는 알 만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언급하면, 그대로 즉사하는 그런 일종의 금제일 터. 아마도 그런 것을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걸었을 것이다.
“그래도 위치는 대충 짐작하게 됐어.”
직진에 삼 층 중앙 회의실이라.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열려있는 문을 통해 보이는 복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스윽.
설휘는 조금 전에 날렸던 암기를 회수한 후, 곡도를 들고서 달리기 시작했다.
***
복도는 일반적인 회랑처럼, 한쪽 밖이 보이는 구조였다.
이곳은 건물 자체가 사각의 토루(土樓)를 반으로 잘라놓은 모습이라, 감시하는 눈은 바깥쪽 성루를 향하고 있었다.
일정한 지역마다 서 있는 경계무사 외에는 감시하는 눈이 없었다. 그래서 삼 층 중앙의 회의실이라는 곳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여긴…… 귀식대법이 필요하다.’
천장에 거미처럼 붙어 이동하던 중, 회의실에 막 잠입하려던 설휘는 흠칫했다. 방 안에서 미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설휘는 슬쩍 제한된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곧장 대법을 펼쳤다.
천마잠행술.
마교 최고의 귀식대법인 천마의 무공. 그걸 펼쳐 호흡을 정지시켰고, 추가로 잠영투체술로 천장의 들보를 붙잡고 몸을 뒤집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스슥.
동시에, 좁은 공간의 밀실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니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병력을 너무 늘릴 경우, 오히려 우리 쪽이 다른 제자들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들린 건,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여린? 그런 이름이었던가? 기기아대의 궐장으로, 몇 회 전의 삶에서 자신을 가로막았던 이였다.
“그래서, 약한 채로 있자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간 최전선으로 밀려 나가 화살받이가 될 뿐입니다.”
말을 더 보태는 중년인.
설휘가 처음 보는 자였다.
다만 복장이 기기아대처럼 주술사복을 입고 있어, 그 역시 삼대 궐장 중 하나임을 추정할 뿐.
“하지만…….”
“자자. 어떤 쪽이든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차피 기려사대의 꼬마가 있으니, 녀석을 최대한 유용하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두 명의 발언이 끝나고, 자연스레 시선이 한 장년인에게로 향했다.
그를 본 설휘는 눈빛이 흔들렸다.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 회의장에 들어오기 전에 느꼈던 미묘한 기운이 바로 그의 것임을.
잔뜩 경계하며 둘러보는데, 회의장에는 또 한 명이 있었다.
마치 벌이라도 서듯 한쪽 구석에 시립해 있는 자.
처음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못 알아봤지만, 이들이 말을 걸자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노인은…….’
“그래서, 실혼마인을 어느 수준까지 만들 수 있소?”
“……그것이, 직접 손을 써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확실히 말하시오. 기려사대란 단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크음.”
노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추정해 보건대, 아마 그 외에도 기려사대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끌려온 듯 보였다.
“해보지 않았으나, 모든 전력을 집중할 경우. 한둘 정도는 극마의 수준까지 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크!”
“……역시!”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기아대 궐장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게 숙원, 실혼마인을 극마까지 올리는 게, 정말로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본래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소?”
“모든 전력을 다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요?”
궐장 둘이 거듭 물었다.
경지가 높은 실혼인을 만들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 초마 수준도 쉽지 않았다.
노인은 한숨을 내뱉고는 조심히 말을 이어갔다.
“송화는 주술사로서 대성할 체질입니다. 무인으로 치면 극마, 아니 탈마까지도 갈 수 있는 수준이라 말할 수 있지요. 그 아이가 영감과 심력을, 실력이 뛰어난 무사에게 주입할 경우…….”
그는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한둘 정도는 극마에 도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먼저 무사의 실력이 초절정을 넘어 초마에 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만…….”
“그거야, 뭐. 봐놓은 인물이 있소.”
“소재가 좋아야 좋은 결과가 나오지. 당연한 이야기군.”
“예. 다만, 문제는 그 뒤입니다.”
“그 뒤?”
장년인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자, 노인은 오히려 더 진지해졌다.
“노부는 이제까지, 실혼마인이 극마에 오르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일단 경지에 올랐을 때의 능력 또한 알 수 없습니다.”
“흠.”
“어쩌면, 극마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전례 없는,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실혼인은 흔히 병기로 취급된다.
그리고 전례 없이 강한 병기란, 제어가 안 되는 위험한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년인은 노인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건 문제 될 게 없지. 그만한 무기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 싸움은 완전히 우리 것으로 가져갈 수 있지. 혹여 문제가 된다면…… 유패 님께서 처리하실 거고.”
“그렇습니다. 강해져봤자 결국 실혼마인에 불과합니다. 여차하면 힘으로 통제하면 됩니다.”
다들 한마디씩 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노인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지만, 그도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미 결론이 정해진 분위기에서 굳이 입을 열어봐야 비난받을 뿐이었으니까.
‘극마에 오른 실혼인이라.’
천정에 붙어 숨까지 참고 있던 설휘는 생각했다.
이제껏 전례 없는 위험한 병기.
그런 걸 쉽게 만들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송화의 모든 잠력, 자칫하면 목숨까지 부어 넣어야 겨우 만들 수 있다는 것이겠지.’
설휘는 잠깐 시간을 보았다.
3080…… 3079……
아직은 여유가 있다. 이대로 조금 더 살펴보다가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눈앞의 시간이 어쩌면 제약만을 나타내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경지 하락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이대로 잘 숨어 있다 보면 제한은 끝나고, 본래의 경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겪어온 대로라면…… 시스템은 쉽게 가려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반 시진에서 대충 일 각을 뺀 시간.’
당장은 위험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설휘 자신에게는 위험이 없다.
그렇다면 이 긴 시간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송화?’
답은 곧 나왔다. 아마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송화의 목숨이 위태롭겠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린 소년은 극마급 실혼인을 만드는 재료로 소모되고 말 것이다.
‘어쩌지. 지금 바로 손을 써야 하나?’
설휘가 그런 연유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탕탕탕!
“궐주님! 궐주님!”
다급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여린이 눈썹을 곧추세우며 연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치, 침입자가 1층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걸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침입자?”
표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장년인이 나서고, 궐장들이 차례로 걸어 나갔다. 그리되자 회의장에는 기려사대의 노인 하나만 남게 되었다.
“…….”
홀로 남은 노인은 천천히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읊조렸다.
“너희들은 모른다. 얼마나 두려운 괴물이 탄생할지.”
혼자서 웅얼거리는 것이, 조금 전 실혼마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듯했다.
“아니, 뭐……. 그게 맞을지도. 어차피 죽을 거, 한바탕 폭주하게 만들어……. 억!”
그 순간, 노인의 동공이 멈췄다.
설휘가 뚝 하고 떨어졌기 때문이다.
“쉿!”
설휘는 급히 검지로 입을 막아 보였고, 다행히 노인은 소리치지 않았다.
“도우러 왔소.”
“……?”
“이들이 실혼마인을 만든다고……. 뭐 아무튼 좋소.”
설휘는 열린 문을 급히 닫았다. 그러고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노인에게 말했다.
“송화는, 송화는 어디에 있소?”
“……그 아이를 왜?”
“이대로라면 저들은 괴물을 만들어낼 것이오, 송화를 죽여서라도. 당연히 막아야 하지 않겠소.”
설휘의 얼굴에서 다급함이 보였고.
“…….”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의 표정도 묘하게 변했다.
“송화를…… 어찌 아십니까?”
“설명할 시간이 없소. 이리저리 연이 닿았다고만 알아두시오. 동령.”
“……?!!!”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노인은 놀란 기색이었다.
동령. 송화를 어릴 때부터 키운 주술사부.
설휘는 예전에 들은 주술사들의 운명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역천자.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산 사람의 의지를 꺾는, 천리를 뒤집기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법이라지. 하지만 나는 그게 오늘이라 생각하지 않소.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도 송화가 아니고.”
“다, 당신이 그걸 어찌……?”
“예전에 당신이 나에게 해준 말이오. 어차피 운명을 거스르는 자이기에, 송화가 나를 따르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다고 말했소. 당신의 기억에는 없겠지만, 나는 당신과 많은 말을 나눈 적이 있소.”
설휘는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추려서 설명했다.
믿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했는데, 그걸로 납득할지도 모르겠고 시간도 없었다.
“지금 당신의 선택은 둘 중 하나요. 믿을 수 있는 궐주들에게 송화가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혹은 오늘 처음 보는 나에게 송화를 살릴 가능성을 걸어 보거나.”
“…….”
“납득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소. 허나, 지금 바로 결정하시오. 송화를 살리려면 촌각의 시간도 아까우니.”
“…….”
노인은 잠깐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설휘를 빤히 쳐다보고는.
“……따라오시지요. 저와 함께 가시는 게 목적지까지는 더 안전할 겁니다.”
결심이 선 듯 입술을 깨물며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