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비틀린 운명 (5)
7…… 6……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설휘는 생각했다.
본래 이 임무는, 송화가 대법을 시전하는 것을 자신이 막아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러기엔 답이 없어 보였다.
당장 이 안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눈을 속이고, 어떻게 송화를 빼 갈 수 있을까?
그나마 있을지 모를 일말의 기회조차도 마후가 나타나면서 사라졌다.
마후와 그를 위시한 유패.
극마에 근접한 한 사람, 그리고 극마고수 한 사람.
거기다 더 있을지 모른다.
마후가 끌고 온, 벽 틈에 숨어든 무인들.
이 모두를 저지하기란, 지금의 설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크크. 크흐흐흐흐.”
아령이 흐느끼는 듯, 혹은 비웃는 듯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실혼마인으로 변한 건가?’
다른 실혼인과 차이점이라면 울부짖지 않는다는 것.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오히려 즐기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스르르륵.
때마침 그녀의 정수리로 혼탁한 기운들이 파고들었고, 그걸 받아들인 아령의 표정은 다시금 경직되었다.
동시에 이것이 눈앞에 떴다.
[제약했던 시간이 끝났습니다.]
[모든 제약에서 해방됩니다.]
‘송화가 강제로 주입한 건가.’
설휘는 아령의 머리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빙글빙글.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혼탁한 기운들이 그녀의 머리 위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모인 이들은 그 장면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마후는 대단히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퍽.
어느 순간 그녀가 자지러졌고, 그녀 뒤에 있던 송화 역시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어찌 되었나? 해낸 건가?”
마후가 홱 소리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물은 대상은 기려사대의 동령. 그나마 여기 있는 주술사에게 확인을 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글쎄요…….”
동령은 말을 흐렸다. 그로서도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삼제자가 쓰러지기 직전, 그녀의 눈에 본연의 자아와 주술의 자아가 뒤섞이는 것을 그는 보았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강시로 만드는 주술이기에, 단지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실혼마인으로 변한 건지, 아니면 주술로 인해 자아가 살아난 건지.
무엇보다, 여기 있는 누구도 극마에 오른 실혼마인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송화만이 알 것이다.’
동령은 조심히 설휘 쪽을 보며 신호를 주었다.
스윽.
그 시선을 받은 설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송화에게 은밀하게 접근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시선은 아령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초미의 관심사가 모인 것이다.
스슥. 스슥.
덕분에 지척까지 어렵지 않게 다가간 설휘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송화의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심력에 손상을 입었다.’
얼굴이, 아니 온몸이 백랍처럼 새하얗게 변한 송화.
마치 피라는 피는 다 빨린 것 같은 모습이다. 설휘가 재빨리 송화의 몸에 손을 올리며 진맥을 할 때.
스윽.
마침 정신을 잃었던 아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정신이 드는 거야?”
마후는 다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고, 대뜸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
유패가 소리쳤지만, 마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오히려 괜찮다며 손사래치며 말했다.
“어이, 사매. 정신이 좀 들어? 너? 실혼마인이야? 아님 본래대로 돌아온 거야?”
“…….”
아령은 그에 대답이 없었다.
눈동자가 조금 흐릿했는데, 이건 이제 막 일어난 피로함 때문인지, 아니면 주술 때문인지 알기 힘들었다.
외관상으로는 너무도 멀쩡해 보였다.
“말 좀 하자고. 사형이 조금 자유를 뺏었다고 나를 미워하지는 않잖아?”
“그럼요. 제가 사형을 왜 미워해요.”
놀랍게도 아령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사형, 나 기분이 좋아요. 대체 날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거야,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도와주셨지. 너는 특별히 손을 봤고……. 음?”
말을 하다 말고 마후가 눈이 가늘어졌다.
막 쓰러져 있는 송화를 부축하던 설휘가, 시선이 쏠리자 흠칫했다.
“그래. 맞아, 사형의 덕분이지.”
하지만, 이내 울린 아령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신경은 다시금 그녀에게로 쏠렸다.
“뭔가 온몸에서 힘이 샘솟는 것 같아…….”
“그래? 뭔가 강한 힘이 느껴져?”
“예, 이거 봐요.”
스윽.
그녀는 한 손을 내밀었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기류. 마교의 일반적인 마공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보다 좀 더 어두운, 그리고 섬뜩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었다.
“오오…….”
마후는 거기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자연스럽게 다가선 아령이 그런 마후에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떨 거 같아?”
콱!
“……!”
마후는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아령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엇……!”
그 한 수는 빠르기도 했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곁에 있던 유패도 손을 쓰지 못했다.
“큽.”
피가 몰린 마후의 얼굴은 돼지 간처럼 시뻘게졌고.
“왜? 당황스러워?”
반면 아령의 눈빛은 야생짐승처럼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잘도 말이지. 나를 실험 대상으로 써서 실혼마인으로 만들려고 한 거, 모를 줄 알았어?”
마후의 눈동자가 동령을 향했다.
“으, 으…….”
그 상황에서도 실혼마인이 실패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절레절레.
모른다. 동령의 대답은 이번에도 같았다.
“읍…… 읍.”
마후가 뒤늦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아령은 그가 입을 열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너 같은 쥐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지. 이제…….”
스스스슥.
그녀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고. 그것이 마후의 천령개로 스며드는 듯 보였다.
그런데.
“악!”
“……!”
“……!”
“……!”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아령이 본인의 머리를 붙잡았다.
“으아악! 아아아악!”
그리고 격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갑작스러운 돌변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방금 목숨을 잃을 뻔했던 마후까지도.
“서, 성공했습니다.”
그때였다.
설휘는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기절해 있던 송화가 의식을 찾고 입을 연 것이다.
“주술이…… 성공했습니다. 오히려 너무 완벽히 성공해서, 제가 두려워 먼저 손을 뗄 정도로.”
“……허면, 저 여인은?”
“예. 실혼마인입니다. 저 암전(暗全)의 기운을 다룬다는 건, 극마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
송화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크게 놀랐다. 대다수가 기쁨이었지만, 설휘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그가 들은 바로는, 무인이 실혼마인이 되는 과정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따른다.
그리고 저항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력한 실혼마인이 된다고 했는데.
“생문을 여는 것은 주술의 영역. 거역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다만, 저렇게 정신을 잃거나 발작하는 증상만 있을 뿐이지요.”
“그럼, 지금 저건?”
“자아가 먹히는 증상입니다. 어떤 귀신이 들렸는지는 모릅니다. 극마의 경지에 달한 실혼인은 전인미답. 아무도 도달한 적 없는 미지의 현상입니다.”
‘그럴듯해…….’
설휘는 내심 끄덕였다.
그가 본 아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현세의 기운과는 어딘가 많이 달라 보였다.
마치 허공에 음울한 분위기의 동굴이 뚫려, 거기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키키킥.”
“……!”
갑자기 아령의 웃음소리가 바뀌자, 좌중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마후의 표정도 변했다.
“크아아아악!”
갑작스런 괴성에 움찔하며 다들 몇 발짝 물러설 때였다.
“크아아악!”
“카아아아악!”
뇌옥에서 강한 난동이 시작되었다.
제관들은 발작하는 실혼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몇몇 무인은 철장 앞에서 바짝 경계를 섰다.
“이봐, 아령.”
“크아아아악!”
두 번째 사자후에, 이들은 흉폭함을 넘어 급기야 덤비는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휘둘러지는 팔. 철장을 뜯고 빠져나오는 실혼인들에, 상황은 완전히 혼란스럽게 변했다.
“제가 맡겠습니다.”
유패가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지금 일어나는 폭주는, 무인이 실혼인으로 변할 때 생기는 저항 정도를 넘어선 걸로 보였다.
특히 아령의 몸속에 흐르는 검은 기는, 마기보다 더 음허한 기운이라 유패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소란을 제압하라!”
마후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무사들이 예를 차렸다.
그리고 벽에 몸을 붙이고 이미 명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의 무사들. 그들이 사방에서 날뛰는 실혼마인을 제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뭔가 다르다.’
유패는 자신의 애병을 손에 들고 상당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크르르르…….”
눈앞에서 짐승의 소리를 내는 삼제자 아령.
이전만 해도 그녀와 그 사이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무럭무럭.
이 순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은, 닿았다간 큰일 난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결국 네가 나서는구나. 둘째 사형의 개.”
그리고 갑자기 또 평소처럼 인간의 말을 하는 아령.
그녀의 눈은 이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눈의 흰자위가 시커멓게 변해, 마치 안구 전체가 새카만 동공으로 변질된 듯했다.
“실혼마인은 실혼마인답게 주인의 말을 들어라!”
“지랄. 내가 내 주인인데, 누구 말을 들어?”
유패의 마기와 아령의 마기가 정면으로 뒤섞였다.
기기기기.
괴이한 소리가 일어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충돌했다.
쩌저엉!
검을 한 번 부딪치고, 다시 덤벼들려던 유패는 멈칫했다.
쉬르르륵.
아령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자신의 애병에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잇! 이잇!”
떼어내려 해도 쉽지 않았다.
화공처럼 활활 피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끈적이는 점액처럼 계속해서 위로 올라왔다.
그 기운이 급기야 검자루까지 피어오르자, 유패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검에 내력을 불어넣어 응축시킨 다음, 일거에 진기를 폭발시켰다.
쩌엉! 파스슥.
“후!”
그제야 검은 기운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후련해진 유패는 아령을 보며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흐느적.
일순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녀의 신영이 흐릿하게 일렁거린 것이다.
‘대체 뭐지?’
눈의 착각인가?
분명 상대는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육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저건, 암연의 그림자입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단 한 사람, 송화는 가쁜 숨을 내쉬며 설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주술로 불러온 이계의 힘. 원래라면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이죠. 이대로라면…… 모두가 죽을 겁니다.”
다 죽는다.
애초에 실혼마인은 산 사람을 생강시로 만드는 역천의 주술.
하지만 아무리 사마외도를 걷는 주술사들이라 해도, 그들 역시 인간이고 살아있는 존재다.
반면 극마에 이른 실혼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의 법도를 거역한다. 그 결과, 모두를 공평한 나락, 죽음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당신이, 나서 주셔야 합니다.”
“뭐?”
갑작스런 말에, 설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송화를 바라보았다.
분명, 이번 생에서는 서로 처음 만나는데도.
“변모, 아니 변질되어 버린 아령. 저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오직 당신뿐…….”
“…….”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꿰뚫어보는 듯한 눈을 하고 부탁하는 송화였다.
“뭔가 착각했나 본데, 난 그 정도로 강하지 않다. 거기다 자연에 존재할 수 없는 힘을 쓴다며?”
설휘는 고개를 저었다.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는 힘.
그런 걸 사용하는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말만 들어도 아득하기만 한데.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입니다. 당신은…….”
송화가 헐떡이며, 허우적허우적 설휘의 가슴 어림을 가리켰다.
“역시 존재할 수 없는 힘. 항마력으로 암연의 그림자를 누를 수 있으니까요.”
“항마력? 그게 뭐냐?”
“…….”
송화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항마십삼장(降魔十三掌).”
“……!”
설휘는 그에 잠시 입이 벌어졌다.
마교의 마공에 상극으로 작용하는 성질의 무공. 박대정심한 정파의 모든 무공 중에서, 유독 마교의 마공에만 끔찍한 피해를 주는 신공.
“그건 소림의 무공 아니냐.”
“예.”
“그걸 내가 어떻게…….”
“어떻게든. 쓰셔야, 합니다.”
송화가 헐떡이며 드문드문 끊기는 말로 계속했다.
“곧…… 제 제어가…… 더는 듣지 않게 되…….”
그리고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축 늘어졌을 때.
캬아아아아!
듣기만 해도 끔찍한 포효가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그때쯤.
암연의 그림자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