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벽사항마 (2)
“으윽.”
송화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눈앞의 설휘라는 사내가 어떤 수를 쓴 건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사기(邪氣)가 사라졌다.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
하지만, 곧 상황을 파악한 송화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실혼마인으로 변한 삼제자의 무위는 이미 극마에 달해 있었다.
어찌 보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당장 그녀가 뿜어내는 기이한 힘은, 본래 이 세상에 없는 탁하고 변질된 기운. 한 차원 높은 마공이 아니라면 대적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솨솨솨솨솨.
그런 기운을 아령이 쏘아내는 것을 보면, 그저 이 안의 모두가 죽겠구나 하고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
쿠쿠쿵!
‘어?’
설휘가 뿜어낸 싸늘한 빙공이 아령의 마기를 막아낸 것이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불가사의.
저런 이질적 기운에 저항하려면 최소한 극마 수준의 무위가 필요하다. 그걸로도 맞상대는 고사하고 단번에 휘말려 죽지 않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정면에서 부딪혀서 막아내다니?
그그그극!
‘또 온다.’
잠깐 눈에 희색을 띠었던 송화는, 아령이 다시금 강렬한 기운을 뿌리자, 이젠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좀 전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검은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망하게 설휘를 바라보는데.
스으으----
‘어?’
그가 흘려내는 기운은 고요했다.
상대의 어둠에 대항하는 기운의 성질은, 매섭지 않고 차분했다. 태양의 날카로움이 아닌, 달의 은은함처럼.
‘저건, 항마의 기운이다!’
송화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대체 어떻게 여기서 저 기운이 생성된 거란 말인가.
분명 본교의 마인일진대, 대체 무슨 수로 정도문파의 항마의 기운을 다루는 것일까.
한번 마공에 입문한 이상, 절대로 배울 수 없다는 정도의 무공을?
송화가 입을 벌린 사이, 아령이 검은 기류를 쏘아냈다.
피이이이잉.
예견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기운이 자신과 사내를 덮칠 때는 지축을 흔들 듯이 강렬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충돌 직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
“……!”
“……!”
설휘의 뒤에서 지켜보던 송화와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쉬르르륵.
아령이 뿜어낸 검은 기운이, 설휘의 손끝에 들어오기 무섭게 조용히 소멸되는 모습을.
“이건…… 벽사항마?”
두 기운의 충돌로 은은히 퍼져 나오는 기류는 모두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주변을 덮고 있던 실혼마인들의 사기까지 사라지게 한 벽사항마의 기운.
그건 마기를 익힌 모두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강렬했다.
“후우.”
설휘는 숨을 토해내고 자신을 손끝을 바라보았다.
전에도 정종무공을 다뤄봤으나, 소림의 무공은 무당의 태극권과는 또 다른 기질을 갖고 있었다.
소림오권의 초식을 취하고 항마의 기운을 뿌려 낼 때. 설휘는 기묘한 환상을 보았다.
파리한 안색의 승려들. 온몸이 추위와 고통에 절어 들었음에도, 막막한 석벽을 앞에 두고 오로지 집중하고 있는 수많은 스님의 모습을.
‘뭐였지. 대체?’
그 모습은 참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수련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워낙 비현실적이라 보고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저게 뭐인지 정도는 알았다.
소림의 면벽 수련.
번뇌와 욕망에서 스스로를 떨치고, 오로지 불법(佛法)에만 자신을 살라내는 평생의 도전.
그 겉모습은 그저 자신을 학대하는 듯 보잘것없고 안쓰러웠으나, 실제 면벽 수련을 하는 소림승들의 내심에서 피어나는 여러 감정은, 도무지 설휘로서는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후우. 후우. 후우…….”
파앗.
“……!”
한편, 아령은 공세가 흐트러지자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며 설휘와의 거리를 좁혔다.
좀 전부터 자꾸만 뭔가 상황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수는 눈앞의 사내. 계속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일으키는 자다.
“하!”
그래서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설휘에게 달려 들어갔다. 그건 거의 본능이었다.
더 이상 지켜보다가는 계속해서 휘말릴 거라는, 패배의 예감. 그에 직접 자신의 전력으로 이 자리를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사사사삭.
설휘는 아령의 흐느적거리는 신법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도 유패처럼 혼란스러웠으나, 곧 독송을 읊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니, 결국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어, 마음속으로 사라지는 법이며…….
고요함과 무심함에 평생을 바쳤던 어느 노승의 읊조림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와 함께.
키직!
흔들림과 혼란이 사라졌다. 흐느적거리던 아령의 환영이 거짓말처럼 깨어지고, 몸을 쭉 빼어 이쪽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명료하게 드러났다.
쩌어엉!
암흑의 기운이 사방에 재 가루처럼 뿌려지며, 뇌옥 안에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설휘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은은하게 주변을 보호했다.
지이이잉.
변질된 마공과 벽사항마의 기운은, 서로 부딪치며 소멸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걸 반복했다.
카카캉!
“어떻게! 어떻게!”
아령의 얼굴은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유패조차 쓰러뜨린 암흑의 기류가 상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극마에 이른 무위 또한 사내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설휘가 입을 열었다.
“그거 하나뿐이야.”
“……?”
“네가 달라진 거. 영혼을 빌어서 얻은 그 하나의 기운.”
얼굴이 붉게 변한 아령을 향해 설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필 내가 거기 저항할 무공이 있으니, 네 존재는 더 필요 없게 된 거다. 더욱이 자아가 있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터. 결국 너는 제거될 수밖에 없다.”
“이힉.”
아령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아를 상실한 듯 자신을 따라 폭주하던 실혼마인들은, 정체 모를 사내 녀석이 뿌려대는 기이한 기운에 쥐 죽은 듯 멈춰있었다.
“하, 하하.”
어이가 없었다. 어쩌다가 하필이면 이런 녀석을 만난 것이다.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고 생각한 지 일각도 안 되어.
‘일단……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해……!’
분노가 드글드글 일어났지만, 아령은 우선 이곳을 벗어난 다음,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기력을 쭈욱 끌어올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크어어. 으허허허.”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손짓에 실혼마인들이 반응했다. 동류의 강자를 따르는, 본능에 가까운 습성 탓이다.
“후우.”
“……?”
그렇게 몸을 돌리자, 마침 유패가 서 있었다.
“꺼져라. 너 따위가…….”
아령은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 자신의 공격도 당해내지 못한 녀석이, 조금 밀린다고 잘도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게 아닌가.
“못하겠다면……?”
“가소로운.”
화르르륵.
분노의 검은 불꽃이 뿌려졌다.
화아악!
헌데 유패는 기다렸다는 듯 맞서서 불꽃을 토해냈다.
그 불꽃은 자주색. 설휘가 한번 본 적이 있는 기운이었다.
‘멸화공(滅火功)!’
화온마공의 극의.
사대극마공 화에서도 나타나듯, 불의 힘의 마지막은 멸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멸화는 자연계를 뛰어넘은, 이계에서 전해진다고 알려진 불꽃.
강기 같은 절대적인 무학과는 또 다른 형태의 이계의 힘이었다.
‘어떻게?’
설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패가 아령의 앞을 막아섰을 때, 그는 내심 혀를 찼다.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당한 것을 똑똑히 목도했으니까.
그런데 그 유패가 화온마공의 극의를 꺼내들고 다시 덤벼들었을 때는 꽤 당황스러웠다.
구구구구. 구구구궁.
“……!”
설휘가 항마의 기운으로 맞설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두 기운이 부딪쳤고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벽이 무너지고 바닥이 쩍쩍 갈라지기까지 한 것이다.
“어, 어떻게……?”
그 속에서 아령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금 전 유패를 꺾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다. 강력하고 막아낼 수 없는 특별한 내력을 본인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력에서도 밀리고, 술수에서도 밀려버렸다.
조금 전의 우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 아. 실수네. 네가 잠깐, 일반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버렸지 뭐냐.”
당당하게 선 유패 뒤로, 기다렸다는 듯 걸어 나온 인물이 있었다. 아령은 그를 보고 이를 갈았다.
“네놈까지…….”
“네놈까지라니? 사매는 뭐 본인이 잠시 천하제일이라도 된 줄 알았어?”
싱글싱글 웃는 마후였다.
딱. 딱.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통 말이지. 성질이 다른 기운끼리 부딪치면 그 세기에 따라서 폭발이 일어나지. 허나, 상승의 무학일수록 세기보다는 성질이 작용할 때가 많거든.”
주먹으로 책을 후려치면, 큰 소음이 난다.
하지만 뾰족한 송곳으로 찌르면, 책은 그저 푹 찢기며 뚫리고 만다.
아령과 첫 공수를 주고받았을 때, 유패는 강기로 반격했다.
그게 실수였다. 강기는 분명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뭐든 받아낼 수 있지만, 극마급 실혼인이 된 아령의 공격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수한 경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패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지. 본교를 대표하는 삼단장(三團長)쯤 되면, 그냥 무위만 센 게 아니라 이질적인 능력도 갖추는 법. 화공의 정점에 있는 무공도 익혔거든.”
츠즈즉.
때마침 다시 피어나는 불꽃.
유패는 언제든 출수할 수 있게 멸화의 기운을 뿜어냈다. 아까의 패퇴가 방심 탓이었다고 시위라도 하듯이.
그에 아령은 속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휘에게는 항마의 기운으로 밀리고, 압도한 줄 알았던 유패에게는 저 자주색 불꽃에 밀렸다.
이능의 특성으로 일시적인 우세를 점했지만, 간파당한 후에는 오히려 성취에서 자신이 밀린 것이다.
“하. 과분한 부하 덕에 목숨을 건져놓고 이제 와서 잘난 척은.”
“……과분한 부하?”
마후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령은 그걸 보고 즉각 그를 도발했다.
“아니면? 힘도 없는 네놈 따위가 삼단장 중 한 사람을 부리다니. 솔직히 운이 좋은 것뿐이지, 한심한 꼴이라고.”
“이야……. 이거, 사매가 날 너무 쉽게 보는데? 유패한테 깨진 주제에 그 주인인 나한테는 잘도 대들고 말이야. 억울하면 한번 다시 붙어볼까?”
“뭐? 네 따위가? 까르르르.”
팡. 팡.
아령이 웃자 마후가 까닥하고 턱짓했다.
그러자 유패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팡! 파앙!
마후가 소매를 크게 휘둘러 소리를 내며 자세를 잡았다.
“덤벼봐. 어디.”
“……후회할 거다. 멍청이.”
아령은 씨익 웃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슨 생각이지?’
한편, 두 사람의 대치를 보던 설휘는 의아했다.
마후.
자신이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 자가, 갑자기 나서는 것에.
그리고 위기에 몰린 아령이 마구 도발한 끝에 바로 기회를 잡아 싸움이 붙으려는 것에.
츠으으윽!
이번에 아령은 원거리에서 기공을 쏘지 않았다. 그녀는 마후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끝이다. 병신.”
십자 모양의 검은 기운이 마후를 덮쳤다.
콰아악!
그런데 마후가 사라졌다.
마지막 격돌의 지점을 어떻게 잡았는지, 한순간에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걸렸군. 사매.”
“……?!”
“내가 항상 말했지. 그 성격 안 버리면 언제고 큰코다칠 거라고.”
콱.
마후의 소매가 아령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되네. 어쨌든 사매의 기운, 고맙게 받아 가겠어.”
스으으읍.
뒤이어 마후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피어오르며 흔들거렸다.
“……!”
그에 아령은, 꿈틀꿈틀 몸을 경련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히 저항하려고 하는데, 격이 다른 힘에 짓눌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건……?”
“흐, 흡성대법이에요.”
“흡성?”
놀라는 설휘 옆에서, 송화가 소리 죽여 신음하며 말했다.
“극마급 실혼인이 된 아령 님의 기운을…… 빼앗아서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거예요. 정말이지…… 간계한 자.”
“……!”
설휘는 그제야 이 사건을 내막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디까지 설계한 건지 의심이 들 만큼, 마후가 만든 이 상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