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벽사항마 (4)
[타임 어택 : 900초를 견뎌라.]
[중원의 시간으로 일각을 버티며 생존하십시오.]
[성공 보상 : 임무 완수]
‘이건…….’
900…… 899……
눈앞에 뜨는 숫자가 떠오른 뒤 줄어들고 있었다.
임무 조건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 시간을 그저 버티기만 해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그그그극.
유패는 이미 싸울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장검. 그 끝에 녹광이 삼척이나 맺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멸화의 기운이 담긴 화온마공의 극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리를 둬야 한다.’
괜히 다가섰다가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
상대는 극마 중에서도 이미 최고 단계. 혹은 그 바로 아래까지 도달한 고수. 그럼 무위로는 설휘 자신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경험에서는 자신을 아득히 앞서는 상대.
‘이왕 이리 된 거라면.’
부글부글 가슴에서 호승심이 끓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제대로 한번 싸워보고 싶어졌다.
설휘는 태세를 확실하게 정했다.
극마 [ON]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은 유패였다.
그는 이미 적당한 거리를 잡고 있었기에, 자리를 박차거나 하지 않고 그저 손으로 공력을 뿌렸다.
촤아아--악.
“……!”
헌데, 그 동작이 너무나 간결하고 빨랐다.
느슨하게 아래로 잡고 있던 검이 전광석화처럼 쳐 올라왔고. 녹광이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콰아아---카칵!
그에 설휘의 몸은 반으로 쪼개졌다.
“흠……!”
허나, 그건 착시였다. 설휘는 이미 신법을 펼쳤고, 유패가 쏘아낸 기운은 헛되게 벽을 파고들었다.
스스스스슥.
천마군림보.
이제껏 설휘에게 매번 승리를 안겨 주었던 무공.
다만 이제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설휘가 만들어 낸 신형이 고작 여섯밖에 없었다는 것.
사사사삭!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각각 다른 방향을 선점한 여섯 신형이, 유패를 향해 검기도 아닌 강기를 뿌려댔다.
“……!”
유패는 그에 잠시 당황했다.
갑자기 강기 같은 절대의 기공이 여럿 쏟아진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지금 설휘에게서 날아오는 기공(氣功)의 형태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휘르르륵!
그도 그럴 것이, 설휘가 쓰는 병기는 일반적인 검이 아닌 휘우듬하게 휘어진 곡도(曲刀).
그리고 기공은 본래 병기의 성향을 따르는 법이다.
설휘는 가뜩이나 휘어진 검을, 내력을 잔뜩 넣어 쓰는 방식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강기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며 요동쳤고, 날아드는 방향도 서로 달랐다.
퇴로를 원천부터 차단하는 공격.
파팟.
결국, 유패는 막아내기보다 피하는 걸 택했다.
일반적인 직선의 강기도 맞상대하기 쉽지 않은데, 저렇게 변화막측한 강기를 막아낼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요동치는 강기는 유패의 퇴로까지 노리고 있었기에. 그는 진력을 쏘아내 설휘의 강기를 후려쳤다.
지지이이잉.
멸화공. 이계에서 끌어왔다는 불꽃이 타오르며 주변 공기를 격렬하게 달구었다.
그러자 강기의 방향이 절로 휘어져 유패를 피해 나갔다. 극도로 강력한 힘의 집중이, 공간을 왜곡시킨 것이다.
“흡!”
강기들이 방향을 잃은 틈을 타서, 유패가 빠르게 움직여 설휘의 공격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한숨 돌린 유패는 다시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막 몸을 빼낸 그를, 분신 넷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잡았다.”
애초부터 설휘는, 가용한 열 개의 분신 중 여섯만 공격에 사용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어 네 개의 분신을 더 소환해 두었다.
바로 지금처럼.
급히 빠져나온 유패의 허점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서.
“멸화공.”
“……뭐?”
심지어, 분신들이 두 손을 모으며 읊조린 말에 유패는 경악했다. 멸화공은 화온마공의 극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마공 중의 마공이다. 그런데.
화르르륵!
분신 상태로 그걸 사용하다니. 네 명의 설휘가 손에서 자주색 불꽃을 뿜어냈고.
“흐압!”
얼굴이 창백해진 유패는, 들고 있던 검조차 내던지며 적수공권으로 그 기운을 맞상대했다.
쿠와아아앙! 콰아앙!
마후가 말했듯이, 같은 성질의 마공끼리 부딪힐 때면 폭발이나 폭음이 일어난다.
보통 한쪽이 깨지면 그 부분을 붓으로 삭제해버리듯 없애는 강기와 달리, 멸화공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쿠드등! 콰가가각!
두 무인의 가공할 내력은 사방의 벽을 무너뜨리고, 천장과 바닥까지 퍽퍽 퍼먹듯 광범위한 폭심지를 만들어냈다.
자칫 저 안에 있었다간 어찌 되었을까? 그리 생각하며 모골이 송연해졌을 때.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것도 한번 막아보시지요!”
먼지가 자욱한 너머로, 유패에게 조심하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멸천분공을 사용합니다.]
사대극마공 화.
그중 최상승의 무공.
화염무공의 정점답게, 이 공격을 당하면 전신에 불이 번지는데, 심지어 그 불은 물로는 꺼지지 않는다.
상대보다 내공이 높아야 겨우 밀어낼 수 있는, 그리고 일정 범위 안의 모든 것을 죄다 재로 만들어 버리는 초인적인 힘.
설휘는 사전에 천마군림보를 펼쳐 상대의 시선을 속인 다음, 미리 준비한 이 수법으로 단번에 유패를 없애려고 했다.
“……!”
유패도 알아챘다.
한없이, 지극히, 위험하고 불길한.
무인의 예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저걸 맞으면 확실히 죽는다고.
“너…… 설마.”
유패는 급하게 고개를 위로 쳐들었고.
치치치-- 콰아아아아콰콰쾅!
거대한 화염의 고리가 완성되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
화아아아아-
“세상에…….”
일장 범위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재로 변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폭발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은 자줏빛 불꽃.
인간이 이런 무공을 쓴다는 것도 기함할 일이지만, 그걸 맞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사대극마공…….”
마후는 경악한 표정이었다.
저건 분명 대사형 살마의 무공이다.
오로지 그만이 펼칠 수 있는 사대극마공의 화. 대멸천분공.
헌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 설휘라는 사내가 완벽하게 펼쳐 보인 것이다.
보면 볼수록 놀람을 안겨다 주는 자다. 이전의 집체교육도 그렇고, 조금 전 벽사항마의 무공도 그렇고.
대체 어떤 무인이, 정파의 내공과 마교의 절세무공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유패, 괜찮으냐?”
시커먼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마후는 유패를 찾았다. 이런 폭발 속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크으으으…….”
다행히 유패는 살아 있었다.
대멸천분공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절대적인 힘이지만, 천만다행으로 유패 역시 멸화공을 익히고 있었고, 그 덕에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 역시 절대적인 기운. 멸화공을 익히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주군…….”
온몸에 화상을 입은 유패는, 한쪽 팔이 완전히 불타버려 뼈만 남아 있었다.
“아니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운이다.”
마후는 유패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같은 화 속성이라 어떻게든 목숨만은 건져 냈지만, 무인이 팔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급격한 전력의 손실을 의미한다.
“대멸천분공은 대사형의 절세비기. 그걸 맞고도 목숨을 건졌다는 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
웬만해선 하지 않는 격려 한마디와 함께, 마후는 설휘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한 팔을 올렸다.
촤라라락.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는 날카로운 검.
자검이었다. 아령에게 빼앗은,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신병이기.
“자, 이제 나랑 한번 해볼까. 신비의 무인?”
척. 척. 척. 척. 척.
마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이가 다섯 자로 늘어난 자검.
그 끝에는 검은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자신이 나설 때가 왔다고 반기는 듯이.
“후우.”
설휘는 고개를 올려 시간을 보았다.
721…… 720……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전력으로 싸움에만 몰두하면 모를까,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더더욱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후우.”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마후와는 결판을 보아야 할 터.
화경 [ON]
설휘는 일단 자신의 무공을 마공에서 정공으로 바꾸었다.
“이제자 마후 님.”
우뚝.
그리고 말을 걸자, 막 팔을 휘두르려던 마후가 멈췄다.
“뭐냐? 갑자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예상 못 한 말에 마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에서 무슨 물음?
“내가 대답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거야 마후 님의 마음이시지요. 다만, 유패가 제게 영입 제안을 해왔을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
마후는 그에 슬쩍 유패를 바라보았다.
한 팔을 잃기는 했지만, 그가 풍기는 전의는 명백했다. 마후가 말만 하면 언제든지 연수 합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 말해 봐라.”
마후의 허락에 설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방금 최대의 전력을 끌어냈기에 몸이 완전히 지쳐 있었다.
여기서 단 몇 초라도 시간을 끌었으면 했는데, 상대의 여유가 그걸 허용해 준 것이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입니다만, 예전에…… 한 일 년 전쯤.”
설휘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일부러 먼 곳, 예전의 과거를 떠올리는 표정을 지으며.
“천마님의 제자분들이 잠시나마 사이가 좋았을 때. 제가 마후 님께 지금의 이 방안, 실혼마인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더라면…….”
“…….”
설휘는 여기서 또 몇 번 호흡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마후 님께서는 저를 어찌 대하셨을 것 같습니까?”
“……허.”
마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설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비쳤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 넷째가 강해지기 전에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줬다면…… 당연히 널 등용했을 것이다. 극상의 예로.”
“…….”
설휘는 그 말에 널브러진 송화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 감이 온다.
현재 같은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어떤 생각이었을지.
곤마는 부하를 그저 아낀다. 그런 만큼 비인도적이고 죽을 위험이 높은 임무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다.
반면 마후는 철저한 성과주의다.
실적을 올리면 그만큼 대우해 주겠지만, 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쳐내고 버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후, 그가 제시하는 삶으로 이어갈 터.
‘그리되면 송화도, 동령도…….’
죽게 된다.
마후의 손속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 여기서 확신했다.
자신의 길을 돕는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은 해 준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여차하면 감당할 수 없는 임무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명령도 어렵지 않게 여긴다.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명목으로.
본래 이런 인성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변해간 것일까.
확실한 건, 지금의 그는 이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저 자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에 답이 되었나?”
마후의 말에 설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을 마음은?”
“없다.”
존대를 내던지고 평대로 대꾸하는 설휘.
처억.
그는 마후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그저 확신이 드는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버려야 한다는.”
“재미 한 번 없는 놈이군.”
마후는 씨익 웃었다.
촤아아악.
천천히, 검은 기류가 사방을 덮었다.
실혼마인이었던 아령이 뿜어낸 기운도 매서웠는데, 지금 퍼져 나오는 기운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크극…… 그그극.”
기운에 닿은 실혼인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그저 머리를 숙였다.
저항할 의지도 뭣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했다.
슈르르륵.
‘온다.’
착실하게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보며. 설휘는 우선 태극심법을 운용했다.
상대가 검은 기운 쏘아내면, 벽사항마의 기운으로 곧장 되받아치기 위해서였다.
쩌정.
한 일격이 교합이 펼쳐졌다. 흡사 파도처럼 몰아치는 방대한 검은 기운에 설휘가 물러섰고.
“크읍.”
한 걸음 떨어져서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리려 했다.
헌데 그 순간.
피슈슈슉.
갑자기 땅에서 치솟은 얼음 기둥이 자신을 감싸버렸다.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설휘는 경악했다.
‘이건…… 소신수마공?’
극한의 냉기를 품은 얼음이, 창살처럼 설휘를 에워쌌다. 그에 전신이 얼음 동상이 된 듯 굳어 버렸다.
“흐흐. 몰랐나?”
사대극마공 수(水).
왜 잊고 있었을까. 마후 역시 천마의 제자 중 하나고, 그 역시 절대마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걸.
“그럼 죽어야지.”
푸화악!
검은 기류와 함께 완벽하게 설휘의 눈에 마후의 검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