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완전히 다른 진행 (1)
‘타개책을 떠올려야 한다.’
설휘는 생각했다.
마후와 유패가 펼치는 공세를 힘겹게 막으며, 이대로는 결코 안 된다고.
절대의 반열에 올라선 두 명의 합공이다. 하나는 극마. 또 하나는 극마보다 더 골치 아픈 이계의 기운을 다루는 녀석이다.
단순히 벽사항마의 속성만으로 밀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검기가 아니라 강기까지 삼켜버리는, 저 괴이한 기운에 대항하는 방법은 오직 둘뿐.
‘더 상위의 무공으로 파괴하거나, 같은 기운으로 찍어 누르거나…….’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설휘의 머릿속을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삼제자 아령,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마후의 비장의 수단.
‘흡성대법!’
실혼인들이 사용하는 힘. 그걸 자신이 다를 수 있을 거라고는 이제껏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 보면, 마후도 아령도 해낸 일인데, 왜 자신은 못 할까 하는 반문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체득만 한다면…… 나도 가능해.’
물론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자고로 대법이란 이름이 붙는 건, 단순히 무공뿐 아니라 주술적 사고라는 복합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기운을 다루는 방법도 다르고, 그걸 이용해서 상대에게 주는 타격을 주는 방식도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
역발상. 배울 수 없는 복합적인 학문이라면, 상대가 대법을 시전하게 만들어, 스스로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다.
흡성대법이란 놈은,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타인의 내력이나 진기를 빨아들이는 술법이자 무공일 터.
만약, 몸을 통한 고통도 체득이라고 할 수 있다면, 천하를 굽어보는 ‘시스템’이란 녀석은 반드시 그 과정과 이유를 추산해서 결과를 내놓을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추정에 더 가까운, 어찌 보면 도박수.
그럼에도 지금 당장은 이보다 나은 타개책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마후에게 틈을 보였다. 적당히 손을 붙들려 주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법을 시전했다.
***
“흡성대법.”
끄드드득!
‘으윽!’
그리고 설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고통을 느꼈다.
흡성대법은 그저 단전에 있는 기운만 얌전히 빨아먹는 놈이 아니었다.
붙잡은 팔을 통해 몸속 단전까지, 진기가 유통되는 기맥을 다 흐트러트리고, 혈자리를 부술 듯이 찢어발겼다.
이는 단순히 내기만이 아니라, 기혈을 뒤흔들고. 그로 인해 상대의 정수를 빨아먹는 흡성대법 특유의 성질이었다.
‘조금만…….’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설휘의 눈을 번뜩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도박에 가깝게 자신의 몸을 던진 덕분에, 시스템이란 녀석은 그만한 보상을 가져다주었다.
[흡성대법의 구조에 대해 이해했습니다.]
[흡성대법을 익혔습니다.]
“흡성대법.”
이후, 곧장 설휘의 반격이 이어졌다.
우드드득!
마후의 복부를 향해 손을 뻗자, 빨려나갔던 온몸의 생기가 즉각 돌아왔다.
헌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완전히 이질적인 새로운 기운이 손을 통해 자신의 단전까지 들이닥쳤다.
‘윽!’
이건 예상 못 한 일이다.
설휘가 기대한 것은 자신의 내공이 더 빨려나가지 않는 것과, 여차하면 마후 본인의 정순한 내공을 끌어들이는 것.
하지만 마후의 몸이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 기운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우드득!
거기에 설상가상, 녀석의 흡기공으로 온몸의 기혈이 죄다 흐트러진 여파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상대를 밀어낸 자는 마후가 아닌 설휘였다.
퍼억!
“어. 어. 어떻게…….”
마후의 눈에 당혹이, 그리고 자신을 손을 보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 그려졌다.
빨아들인 내기의 성질이 자신이 생각과 달랐기 때문일까. 원래라면 한 대 먹일 수 있는 기회였지만.
“크으읍.”
하필이면 설휘 역시 극심한 고통에 움직이지 못했다.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한 기운이 전신 혈맥을 길길이 날뛰며 헤집고 다녔다.
안 그래도 초반에 뒤틀린 기혈과 혈맥들은, 이계의 기운을 통제해야 하는 물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물길이 다 같이 범람해버리니,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렸다.
이제 상황은 단순한 체득만이 아니라, 눈에 띄는 부작용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극마 [OFF] [ON] [OFF] [ON]
‘이런…….’
따로 조절도 하지 않았는데 제멋대로 움직이는 경지의 변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계의 기운은 설휘가 품고 있던 내공의 성질까지 영역을 뻗치고 있었다.
화경 극마 화경 극마 화경
경지 유형도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제멋대로 바뀌고 있었다. 몸 상태가 극심하게 안 좋아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것처럼.
그러다 종국엔.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 나왔다.
극마 [?] 화경 [?]
‘이 무슨…….’
이전에도 한번 봤던 저 ‘?’ 표시.
시스템이란 녀석이 정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상태는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한편, 마후가 반쯤 정신 나간 표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자, 유패가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으. 으윽! 이 말도 안 되는 내공은 뭐야!”
마후가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설휘의 내공.
그건 보통의 진기가 아니었다.
설휘처럼 극심한 부작용을 겪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쉽게 극복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불가능하다!’
음과 양, 정과 마, 빛과 어둠.
만물을 구성하는 세상의 이치에는, 서로 섞일 수 없이 상반되는 개념이 있다.
가벼우면서 동시에 무거울 수는 없는 법.
마공처럼 강맹한 힘은, 시내처럼 고고하게 흐르는 정순한 기운과 융화되지 않는다.
헌데 이 녀석의 기운은 대체 뭔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기류가 큰 틀에 잡혀 있고, 그 안에서 마공과 정순한 기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흐름을 가진 내공을 통제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두 기운을 각각 구분하여 흡수하거나, 아니면 일부를 내치고 중화하는 것.
하지만 마후 본인의 무학적인 역량으로는, 도저히 둘 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 토해내십쇼. 통제가 불가능한 진기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상황을 들은 유패가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마후는 잔뜩 찡그리고 있다가 그의 말에 수긍했다.
참으로 탐나는 힘이었지만, 제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급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
버려야 한다. 결국 그는 설휘에게 빼앗은 기운을 다시금 밀어내기 시작했다.
‘대체 저놈은 누구이기에…….’
마후는 기껏 흡수한 내공을 토해내면서 설휘에 대해 또 한 번 경악했다.
저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제자들만이 전수받는 무공인 사대극마공에, 교주 본인만 아는 천마군림보는 그렇다 치자.
흡성대법? 이건 본교를 통틀어도 익힌 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마후 자신이 가진 최후의 절학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설마 그것까지 익히고 있을 줄이야.
“그으으으…….”
풀썩.
반면, 설휘는 무너지고 있었다.
겁도 없이 받아들인 이종의 기운은, 그가 흡수하거나 통제하지 못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울툭. 불툭.
혈맥이 눈에 띄게 부풀거나 튀어 오르는 등, 창백하게 변한 설휘의 얼굴에는 주화입마의 전조 현상까지 보였다.
“크크……. 이거 굳이 손을 쓸 필요는 없겠는데?”
겨우 정신을 차린 마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도 좀 전에는 나름 위급했지만, 그래도 유패라는 극마의 고수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덕분에 마후는 흡성대법으로 받아들인 내기를 천천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도움을 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 다시 공방을 주고받지 않아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큽. 크으읍.”
실제로 마후의 예상대로, 설휘의 몸 상태는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통제 불능의 검은 기운은, 혈맥이라는 강 전체를 넘어, 설휘의 온몸을 덮치고 있었다.
‘뭐라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설휘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것이었다.
[마령혈수를 사용했습니다.]
영약으로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는 것.
다행히 몸이 조금 회복되자 날뛰던 검은 기운이 주춤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컥!”
놈은 회복된 설휘의 혈맥을 다시금 질주하며, 마구 후드려 패기 시작하는 것이다.
설휘는 다시 마지막 남은 영약에 눈을 돌렸고.
[자하미란을 사용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사용했는데.
“아, 이건…….”
잘못된 판단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하의 기운. 화산파의 자하신공의 근간인 이 기운은 자신의 내공에 융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라면 겉돌았을 자하의 기운은, 지금 폭주하는 설휘의 몸에 들어가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마공, 정공, 자하공, 그리고 이공(異功).
도합 네 개의 기운이 제멋대로, 서로 설휘의 몸을 점령하려고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악.”
이것만큼은 설휘도 견딜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최악에 최악이 더해진 형국이 아닌가.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과 환각 증세가 동시에 일어났고. 그로 인해 명백한 주화입마가 진행되고 있었다.
‘저, 정신을 잃으면 죽어!’
설휘는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지가 꺾이든, 정신을 잃든, 뭔가에 홀리든.
어느 쪽이든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허나, 점점 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죽음이 발소리를 내며 찾아오는 것처럼.
그런데.
‘어?’
8…… 7……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던 제한이 풀리고 있었다.
시간이.
5…… 4……
이제껏 설휘를 묶고 있었던 제약이 끝나고 있었던 것이다.
3…… 2…… 1
[타임 어택이 끝났습니다.]
[900초를 견뎌라. 임무에 성공하셨습니다.]
어떻게든 버티고 싶었지만,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숫자가 사라지는 순간 설휘는 까무룩, 정신을 잃으려 했고.
때마침 그와는 별개로 눈앞에 활자가 이어지고 있었다.
[난이도에 대한 보상으로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지금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 몸속에 있는 나쁜 기운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 현 상황을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
“……!”
지문을 보면서 설휘는 직감했다.
세 가지 보상.
그중 첫 번째는 안전하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라면, 두 번째는 다시 한 번 작정하고 적들과 싸울 수 있는 것.
다만 세 번째, 계속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지금 이 생지옥의 연장이라고?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첫 번째 선택만큼, 즉 안전히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대단한 가치가 있을 거라는 것.
<‘현 상황을 계속 진행할 수 있습니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
그래서 설휘는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다.
이 끝의 마지막을 보겠다고.
함정의 지문에 대한 의심보다는, 현실의 삶을 피하지 않는 자신이 되고 싶었다.
이제껏 그가 겪은 수많은 선택지. 그 속에서 얻은 교훈들은.
결국 큰 보상을 바라지 않은 일반적인 선택이 후에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계속 진행을 선택하셨습니다.>
“무사님.”
정신이 듦과 함께 눈앞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소년. 송화였다.
그는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어딘가 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수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입니다.”
“……?”
“……물론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길을 제시할 뿐. 결국 모든 건 본인이 직접 해내셔야 합니다.”
설휘는 이해하지 못했다.
송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설마 통제 불능의 이 기운을 그가 해주겠다는 건가?
그때 눈에 들어온 것.
대체 어찌했는지, 네 개의 기운들이 충돌을 자제하고 있었고, 제멋대로 움직이던 경지 설정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화경 [ON] 극마 [ON]
그렇게 다시 송화를 보았을 때.
“이계의 기운은 제가 다스리겠습니다. 만약 이 네 개의 기운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쿨럭.
한 모금 피를 토해내며 송화는 웃음 지었다.
“그 누구도 당신을 거스르지 못할 겁니다.”
그랬다.
이계의 기운을 다스릴 줄 아는 송화의 개입.
그것을 통제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또 다른 경지로 올라가는 디딤돌이 될 터였다.
바로.
화경 [ON] 극마 [ON]
이것 위에, 언제 생성되었는지 모를 글귀.
현경 [OFF] 탈마 [OFF]
지금보다 더 높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무학이 이를 수 있는 최후의 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