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296화 (300/379)

296화. 완전히 다른 진행 (2)

탈마.

극마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로, 마를 극복(克復)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벗어던진다는 의미다.

흔히 정파의 현경에 비견되는 곳인데, 살심을 품기만 해도 언제든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이른바 심즉살(心卽殺)이 가능하다는 풍문이 돌 정도다.

그 아래인 극마-화경만 해도 신검합일에 도달하여 강호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다 하니.

그보다 한 차원 높은 현경에 대해서는, 오로지 전설과 추정뿐이었다.

말 그대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신선들이나 마찬가지라는 호사가들의 입에나 담기는 경지.

그런 경지에 대한 단초가 설휘의 눈앞에 나타났다.

“무사님.”

“……!”

설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화가 등 뒤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부르고 있었다.

고작 열두 살의 주술사 소년은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안간힘을 쓰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운기하십시오. 행공하실 때에 제가 이계의 기운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일부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천운을 얻으실 겁니다.”

쿨럭.

한 모금 피를 토해내며 웃음 짓는 송화.

그 하얀 얼굴이, 어린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얼굴이 설휘의 눈에 들어왔다.

쿠쿠궁, 콰콰캉!

가라앉은 표정과는 달리 설휘의 몸속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본시 가졌던 두 기운과 자하공이 충돌하고, 특히 마후에게서 전해져온 이계의 기운은 온몸을 찔러대며 폭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드드득. 드득.

헌데 송화의 인도 덕분인가, 제일 사납게 날뛰던 이계의 기운이 어느 순간부터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설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조율할 틈이 생기자, 그는 바로 기운을 돌려 혈맥을 보호했다.

그그그극.

정공과 마공이 제 역할을 하고, 이계의 기운이 더 출렁거리지 않게 되자, 하나 남은 자하공은 더 힘을 쓰지 못하고 어찌어찌 제압할 수 있었다.

“후우웁.”

안색이 돌아온 설휘가 운기를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쿨럭. 커헉!

송화가 토해내는 피가 점점 많아졌다.

처음에는 한 모금 정도였는데, 지금은 거의 한 사발은 될 만한 양의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부들부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설휘의 등, 명문혈에 올린 손을 떼지 않았다.

“포기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이용만 당하면서 살면, 그러다 도망치면 억울하지 않냐고도 하셨지요.”

그런 송화의 장렬한 의지가, 실은 설휘 자신이 건넨 말 때문임을.

그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제가 그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툭. 툭. 투둑!

소년의 얼굴에, 검은 돌기가 돋아났다.

조금 전 설휘의 몸에 일어났던 증상.

성질이 다른 기운들의 충돌을, 오롯이 소년이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그만해라. 송화! 이러다가 네가 죽는다!”

“이것이 제 선택입니다. 저는 이미 영핵이 깨어져 어차피 죽을 몸! 여기서 빠져나가도, 평생을 식물인간처럼 요양만 하며 살아야 합니다!”

“……!”

“그렇게 죽을 때까지 고통받느니…… 여기서 깨끗이 죽겠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남은 기운들을 모두 다스려주십시오.”

“소, 송화야…….”

“그리고 저 대신 한 대 먹여주십시오. 쉽지 않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제 마지막 주먹에 힘을 실어 주십시오.”

으득.

설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늦은 것인가. 송화의 운명이 그렇다면, 이젠 어쩔 수 없다.

설휘는 다른 생각을 모두 날려 보내고, 전신의 혈맥에 신경을 쏟았다.

스르르륵.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제껏 몸 안에서 멋대로 충돌하던 네 기운이, 출렁거리면서도 천천히 균형이 잡히기 시작했다.

화경 [ON] 극마 [ON]

그리고 눈앞에서 색이 진해지는 글귀.

탈마 [OFF]

드드드득.

‘……!’

설휘가 내부의 이변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일시적이지만 4개나 되는 기운들이, 하나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계의 기운…….’

가장 이질적이고 다루기 까다로웠던 기운이,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실혼마인의 힘은 주술사들이 조율하던 것이다.

무인인 설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송화는 주술에 한해 천재라 불리던 몸이다.

‘아직…… 아직 모자란다.’

설휘는 생각했다. 이 찰나의 시간 동안 기운들의 통제권을 쥐어야 한다고.

송화가 자신을 돕는 지금이야 이계의 기운도 잠잠하지만, 네 기운은 아직 완전히 융합된 것은 아니다.

서로서로 덩어리진 기운들은 마치 별개의 생명처럼 언제든 날뛸 틈을 노릴 터.

하지만 이 거대한 격류, 몸속에서 일어나는 태풍을 대체 무슨 수로 완전히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 자연의 조화를 보는 눈을 가지셔야 해요. 탈마, 현경에 해당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자연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해요.

거기서 문득 천미려의 말이 생각났다.

먼저 자연의 조화를 보는 눈을.

다음으로 순응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자연의 조화를 자신이 부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게 가능한 건가?’

한낱 인간이 자연의 조화를 부리다니, 터무니없다.

그때, 번뜩하고 천일관에서 읽었던 도가에 관한 책 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의 삼라만상은, 결국은 조화를 따르는 법. 우주를 눈에 담아 목도하고, 그 이치에 마음을 담는다.]

이치, 그리고 도리.

생각해 보면 과거 AI가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사대극마공의 지수화풍을 모두 얻으면, 그때는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다고.

‘지수화풍은……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먼저 물의 성질을 가진 수, 이놈은 스스로 깨지거나 일그러짐 없는 방향을 선호한다. 그리고 화는 말 그대로 불, 태우거나 녹여서 주위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또한 불은 바람이 없으면 피어나지 않으며, 물질 역시 공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 중 한 가지만 부족해도, 천지의 조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자문한 설휘는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공간.

네 개의 기운이 서로 상충되고 통제 불가능한 이면에는, 그것들을 담아둘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 그저 가정이지만, 한없이 드넓은 공간이 주어져 이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있다면, 통제할 수는 없어도 조화롭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화가 되고 나면 다음은 변화.

순응을 체득한 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경지.

싸아아아--

방향을 알게 된 설휘의 눈빛이 변했다.

이계의 기운이 뛰어넘을 수 있는 공간은 결국 상단전. 우주와 소통할 수 있는 대주천을 제대로 운기하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그것을 관조하며 지켜보는 무아지경의 눈이었다.

‘아! 이것이.’

새로운 길을 발견한 설휘의 눈이 찢어질 커졌다.

그리고 그 기쁨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는데.

“송화……야?”

투툭. 투두둑.

송화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 있었다.

그의 눈, 코,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음에도, 칠공으로 피를 쏟는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내셨……. 쿠엑.”

마지막 토혈과 함께 이번엔 송화가 무너졌다.

설휘는 급히 그를 받들었지만.

“송화. 송화야! 눈을 떠봐라!”

“…….”

송화는 이미 말을 하지 않았다.

설휘의 내기를 바로잡아주는, 오로지 그것에 전심전력을 사용한 끝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힘겹게 뻗은, 고사리 같은 송화의 주먹이 더욱 또렷하게 설휘에게 비치고 있었다.

“너는 왜 항상…….”

또다시 보게 된다.

송화의 죽음. 그 죽음이 설휘, 그 자신과 대비되고 있었다.

시스템 덕에 수많은 삶을 보장받은 자신.

그에 반해 단 하나의 목숨만으로 값지게 살다간 송화.

어느 삶이 더 가치 있냐고 물어본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너는! 매번 도움만 주다가 가느냐…….”

설휘는 송화를 붙들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언젠가 죽는다면 또 송화를 볼 수 있겠지만.

그때의 송화는 지금의 송화와 다를 것이다. 설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슬펐다.

목숨을 던지면서도 초연하게 죽어가던, 소년의 담대한 마음이.

고사리 같은 주먹에서 보이던 그 마지막 울분이.

“그래, 이제 소년과 사내의 눈물겨운 대화는 끝이로군?”

송화를 붙잡으며 오열하고 있던 설휘에게, 때마침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이지, 남을 위하는 마음이 커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줬다. 이쯤 되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냐?”

“…….”

천천히 돌아보는 설휘.

얄미운 말투는 당연히 마후였다. 그 옆에 착잡한 얼굴로 서 있는 유패도 보였다.

“하? 뭘 그리 보냐? 그리 눈을 치켜뜨면, 네가 뭐라도 할 수 있는 줄 아냐.”

찌지지직. 쿠쿵!

마후가 내력을 끌어올림과 함께, 검은 기류가 사방으로 표류하듯 치솟아 올랐다.

대체 저 이계의 힘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할 정도로, 그는 가히 무한에 가까운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 따위가 어떤 경로로 흡성대법을 익혔는지. 내 샅샅이 알아볼 것인즉!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병신으로 만들어 주마!”

마후는 제가 마치 심판자라도 된 듯, 호기롭게 상대를 꾸짖고 있었다.

“…….”

하지만 설휘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죽어있는 송화를 붙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쯧.”

마후는 그 모습에 설휘가 전의를 잃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자신의 몸속 기류를 쏘아냈고.

츠츠측.

검은 기류 한 가닥이 설휘를 노리고 뻗어 나갔다.

그 가벼운 공격에.

스윽.

설휘는 고개를 슬쩍 돌아보는 것. 그 외엔 어떠한 동작도, 수단도 없었다.

분명 그렇게 보였는데…….

츠으으으으!

기류가 거짓말처럼 흩어져 버렸다.

뭔가 충돌하거나, 혹은 대항하는 힘겨루기의 과정조차 없이, 그저 허공에서 소멸되었다.

“어?”

마후는 일순간 당황을 드러냈다.

하나, 곧 진지한 얼굴이 되어 다시금 기류를 쏘아냈다. 아직 힘에 익숙지 못해, 자신이 뭔가 잘못 펼쳐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솨아아아아-

하지만 검은 기류는 이번에도 공중에서 흩어져 내렸다.

거짓말처럼.

“허…….”

“제가 맡겠습니다.”

마후가 당황해서 유패를 바라보자, 그는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며 설휘를 향해 검강을 뿌렸다.

절대기공이라는 응축된 검강.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 기운이 설휘에게로 쏘아졌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설휘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솨아아아아-

“……!”

또다시 흩어져 내렸다.

유패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검강이 충돌도 없이 소멸한다니?

“안 돼. 너희들로는.”

설휘가 입을 열었다.

한없이 실의에 빠지고, 절망이 담긴 눈이었음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마후와 유패가 들을 수밖에 없는, 섬찟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자리에 누가 오더라도 결과는 같다.”

스윽.

설휘는 천천히 송화를 바닥에 내렸다.

그리고 슬쩍. 어느새 화마에 휩쓸려, 뼈만 앙상히 남은 동령의 시신을 일별한 뒤 말을 이었다.

“악연은 여기서, 이곳에서 끝난다.”

광오하다고 할 수 있는 설휘의 말.

“무슨 개소리를!”

“이 새끼가!”

당연히 마후와 유패는 발칵했지만, 그들의 노기와는 달리, 주변의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 어어?”

특히 마후의 몸에서 뻗어 나오던 검은 기류는, 빛 아래의 그림자처럼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이, 이게 어찌 된…….”

마후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다시 이계의 기운을 끌어올리려 할 때.

“이쯤 되면 모르겠느냐.”

저벅.

자리에서 일어선 설휘가 말을 걸었다.

“이 공간은 내 것이다. 그 안에서는 사람 또한 예외가 아니지.”

“……?”

솨아아아.

묘한 말을 하는 설휘에게서, 거대한 기류가 일어났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분명히 지하인 공간에서, 난데없이 먹구름과 돌풍이 제멋대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휘는 그제야 슬쩍 보았다.

바람이 불에 취해, 사방으로 비를 뿌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디딘 발 안에 있음을.

탈마 [ON]

성공했다.

전설로나 불리던 경지에 올랐는데, 아무런 문구가 나타나지 않은 게 이상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영역(領域).

이 공간 안에서, 어떠한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츠츠츠측.

“어어! 어어어!”

돌개바람 수십 개가 생겨나고, 그 바람에 휘말려 실혼인, 그리고 마후의 수하들이 딸려 올라갔다.

이 맹렬한 폭풍 속에서, 극마의 고수 유패는 버티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체 너…… 넌…… 누구냐.”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마후.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그저 말을 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

설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끄덕였다.

대답 정도는 하는 것도 좋을 것이리라.

마후가 아니라 설휘 자신을 위해서.

앞으로 있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천마를 죽여야 하는 사람.”

츠츠측.

돌풍이 극한으로 증폭되었다. 사방에서 칼날 같은 바람이 정신없이 몰아치던 가운데.

“갈(喝)!”

설휘의 노호(怒號)에.

우르르릉!

지하 뇌옥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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