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모두의 위기 (2)
“독왕당주 적수양이라니…….”
독왕당주면 총단의 당주급 인사다.
그가 여기에 나섰다는 건, 이번 참에 교내의 모든 고수가 소집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흐음.”
적수양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형한 눈빛과 긴 백발. 그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이목구비.
이는 그가 이미 반로환동에 접어든 고수 중의 고수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저벅저벅.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한쪽에 서 있는 은거고수들을 지나, 자신을 알아본 마태룡 앞까지 다가갔다.
“윽…….”
“크…….”
그저 다가올 뿐인데도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
사령조장 몇몇은 버티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낯이 익군. 우리가 안면이 있었던가……?”
마태룡 지척에서 멈춘 적수양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혼잣말인지 물음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곤마께서 총단 회의에 참석하실 때 두어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지? 그래,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군. 예의가 바르고 영민한 젊은이였지.”
마태룡의 대답에 적수양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후, 하고 잠깐 옛날 생각을 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된 만남도 운명이니 그건 어쩔 수 없군. 그래도 한때 서로 좋았던 기억이 있었으니…… 내 자네에게 기회를 한번 줄까 하는데.”
“…….”
마태룡은 말없이 기다렸다.
다음에 나올 말은 어차피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여주겠다.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오라를 받아라, 같은 말일 테니.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떠나거라. 그럼 너 혼자는 살 것이다.”
“…….”
하지만 독왕당주의 제안은 생각보다 더 부드러웠다. 당황하는 마태룡을 보며 적수양이 말을 이었다.
“내 독단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야. 어차피 자네도 이미 알고는 있을 테지?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
“어찌하겠느냐?”
적수양의 거듭된 물음에, 마태룡은 조용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는?”
“……배신자로 사는 것보다 죽음이 더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독왕당주가 말한 떠나라는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더 벌어지건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군인 곤마의 안위도, 죽든 살든 관여하지 말라는 것.
심지가 곧은 마태룡에게, 그건 배신을 권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교내에도 이런 멋진 젊은이들이 필요한데 말이지.”
적수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강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뒤돌아서서 천천히 걸었고, 그들의 일행 쪽으로 돌아왔을 때, 차분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깝지만, 할 수 없지. 시작해라.”
처형. 잠시 미뤄졌던 일의 집행을.
파파팟.
먼저 세 명의 노인이 피풍의를 휘날리며 앞에 섰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마태룡과 사령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에 마태룡은 잠깐 당황했다.
‘뭐지?’
상대측은 수로나 질로나 자신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그러니 단번에 쓸어버릴 줄 알았는데, 손을 걷어붙이고 나선 무인은 고작 세 명.
특히 뒤쪽에서 더 거물 냄새를 풍기는 두 은거고수들은 아예 나서려는 기색도 없었다.
파앗.
하지만 어쨌든, 마태룡 또한 이런저런 대국을 파악할 여유는 많지 않았다.
그를 향해 달려든 노인이 검을 휘두르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주먹만 한 검탄(劍炭) 여섯이 일렬로 쏘아졌다.
“칫.”
마태룡은 혀를 차며 재빨리 물러섰다.
응축된 검기라는 검탄. 상대는 초마에 올라서야 쓸 수 있는 기예를 보이고 있었다.
최소 자신과 동수거나, 어쩌면 그보다 더 위의 고수일 수 있었다.
파바밧!
그리고 세 노인 중 두 명은 용진과 적송, 그리고 요림과 소령을 향해 달려나갔다.
차아아악 가가가각!
검기와 도기가 뿌려지며 동선을 견제했지만, 두 노인은 능숙하게 피해냈다.
물러서긴커녕 오히려 더 빨리 쇄도해오자, 선두에 있던 용진이 위험해졌다.
“어딜!”
적송이 빠르게 알아채고 연거푸 검기를 뿌렸다.
그가 쏘아낸 흐물거리는 녹기는, 검기보다는 느렸지만 광범위하게 퍼지는 효과가 있었다.
“호오.”
노인 역시 그걸 감지했는지, 이번에는 횡으로 피해낸 뒤 다시금 달려들었다.
콰앙! 꽈드득!
그리고 이번엔 용진의 도신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며 힘 대결을 이어갔다.
슈슈슉.
한편, 소령은 또 한 명의 노인에게 십여 발의 암기를 쏘아붙였다. 속도와 방향이 서로 제각기인, 전후좌우 어디로도 피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허허. 같잖은 수를.”
펑. 퍼드드등. 후르르륵.
그러나 노인은 신형을 위로 날리더니, 연거푸 공중제비를 몇 번이나 넘어 수월하게 그 공격을 피해냈다. 그러고는.
쌔액! 챙!
“허허. 보기보다 요망한 것이로구나.”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허공에서 내려오는 순간은 무방비할 거라는 부분을 노린 노림수.
착지점에서 날아든 요림의 일격에 조금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요림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공격하지도 않았다. 가볍게 거리를 벌렸을 뿐.
쌔앵! 팡! 팡!
병기와 소매가 부딪히는 곳인데, 쇠끼리 부딪치는 듯한 충격음이 일었다.
일 합. 그리고 또 일 합이 겨뤄질 때쯤, 노인이 끌끌 혀를 차며 물러섰다.
“거 참, 맹랑한 계집이로고.”
쐐액!
요림이 상대하는 사이, 소령이 계속해서 거리를 두고 암기를 날려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실력 차가 있다고 한들, 등 뒤를 내놓고 앞을 상대하긴 번거로운 법.
그는 소령과 요림 두 사람을 상대하며 약간 버거운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채채채챙!
그렇게 사방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가장 화끈하고 아슬아슬한 공방은 마태룡과 싸우는 노인 쪽이었다.
검끼리 부딪치거나, 번쩍이는 기공 발현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러다가 보법을 통해 몇 배는 빨라지기도 했다가, 때론 근접 공격으로 전환될 때도 있었다.
카카카카캉!
숨 한 번 쉴 때 무려 대여섯 번의 공방이 일어났고, 공중으로 같이 도약해서도 서로 맞대응을 하곤 했다.
검기뿐만 아니라 검탄, 거기에 검환 같은 속임수를 쓴 기공 활용이 가히 수준이 높은 비무 장면을 연상케 했다.
노인도 노인이지만 마태룡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를 이미 굳혔고, 생사를 도외시하는 연격에 노인이 한 발 한 발 물러서기 시작했다.
***
꿈틀.
새파란 젊은것들이 날뛰는 게 보기 거북했을까. 흑풍의를 입은 한 노인이 어깨를 들어 올렸다.
척.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하지만 적 장로…….”
적수양이 곧바로 지적하자, 노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읊조렸다.
처음의 압도적이던 공세가 점차 비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두 노인의 무력은 충분했지만, 마태룡에 붙은 이는 달랐다.
그는 애초에 초임 장로였고, 무력 수준도 고작 초마 초입 수준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곤마의 핵심무사인 마태룡에게 당할 수 있었다.
“애먼 곳에서 괜히 죽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 정도 피해는 각오해야지. 그래야 확실히 그물에 걸릴 게 아닌가.”
적수양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주변을 보았다.
그는 싸움터 전반을 모두 살피고 있었다.
특히, 격돌로 일어나는 굉음을 향해, 조용히 멀리서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그들이 참다못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챙! 퍼엉!
“크헉!”
마태룡과 싸우던 초임 장로는, 기어코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기묘하게 방향이 바뀐 장법을 제대로 후려 맞은 것이다.
“당……신은?”
그리고 그건 마태룡 또한 놀랐다. 노인도 예상 못 한 고명한 일격은, 자신이 내지른 것이 아니니까.
“컥!”
이후 용진, 적송과 싸우던 노인 하나도 팔 하나가 날아가며 뒤로 물러섰다.
소령과 싸우던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소에 암기를 맞고 경공술을 통해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큭.”
탁. 타닥!
거기서 바람과 함께 나타나 마태룡 일행들을 도우며 일격을 쏟아낸 그림자들.
무려 셋이었다.
“그쪽은…….”
“늦지 않았나 보오. 다행이오.”
“그림자 무사!”
마태룡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이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곤마 휘하 직속의 비밀무사. 그들이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들 괜찮나?”
물어보는 또 다른 복면인에, 용진과 적송은 크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소령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이게…….’
싸움을 걸어온 장로급 인사는 고작 세 명.
독왕당주는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비등해 보이는 노고수 둘도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비밀무사들의 합류로 세 명이 격퇴당하는 모습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설마.’
그에 머리를 스쳐가는 한 가지의 가정.
소령은 가늘게 신음했다. 하지만 장내의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또렷한 목소리였다.
“타초경사와 삭초제근!”
“……?”
“……?”
그녀는 싸움으로 인해 정신이 아직 확실히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 다시 말했다.
“함정이에요.”
타초경사.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는 말.
보통은 일을 잘못 진행해서 적을 불러들였다는 말로 쓰이지만 그 원래 뜻은 다르다.
몰이. 주변의 풀을 두드려서 놀란 뱀이 스스로 뛰쳐나오게 만든다는, 사냥의 방식을 말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었어요. 은영단을 위급하게 해서 싸움을 벌이고 그러면서 시간을 끌어 마태룡 님을 불러들였지요. 거기다…….”
소령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비밀무사 세 분도 더해졌군요. 의도적으로 곳곳에 분산된 곤마 님의 심복들을 모두 모으려는 거예요.”
그리고 타초경사에 이은 삭초제근.
풀을 베고 뿌리까지 뽑아낸다는 말로, 쉽게 말해 소란을 피워 귀찮은 적의 잔당을 모두 끌어낸 다음 일망타진하겠다는 의도란 것이었다.
“우리가 목적이라고? 왜?”
비밀무사 하나가 의아한 목소리를 띠자.
“사로잡으려고요.”
소령은 확신에 찬 듯 목소리를 높였다.
“곤마 님의 어진 성품을 이용해서 협박하려는 것이지요. 우리를 죽이거나 인질로 삼아서 그분을 조종하려는 거예요.”
“이런.”
“윽…….”
모두가 소령의 말에 반응했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지금껏 움직이지 않았던 흑풍의 노인들. 독왕당주를 비롯한 나머지 고수들 전부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늦었어…….”
소령은 절망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 터.
그러니 자신들을 미끼로 곤마의 남은 전력, 핵심무사와 비밀무사들을 끌어들이려는 수였다.
죽음보다 더한 굴욕. 그리고 주군으로 모셔왔던 곤마에게 끼칠 폐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 운명을 이제 알았나 보군.”
천천히 다가오는 적수양의 목소리.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붉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진바 모든 내기를 끌어올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단번에 너희들을 죽이고…… 본교의 기강을 바로잡겠다!”
파밧!
그의 외침에 노인들이 저마다 흑풍의를 휘날리며 달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은거고수라 불리는 두 명의 노인도 싸움에 가담했다.
“끝이야…….”
하늘을 뒤덮은 십수 명의 장로급 고수들을 보며 소령은 몸을 휘청였다.
싸울 수도 대항할 수도 없는 고수들과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턱.
그렇게 바닥에 쓰러지려는 자신을 누군가 부축했다.
“죄송…….”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죽는 순간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미리부터 좌절하지 마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
소령은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한,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낚시질이라, 좋은 생각이군. 미끼를 넣고 물을 흔들면 물고기가 몰리기 마련이지. 거기에 그물까지 준비한 모양이지만…….”
“다, 단주님……?”
후르르륵.
흑풍의가 사방에서 펄럭이는 가운데, 노한 안색을 한 이가 담담하고 차갑게 웃었다.
“그 그물에 고래가 뛰어들면 어떻게 들어 올릴 생각일지.”
설휘.
마교의 오랜 권력 쟁투를 끝내버린, 이제껏 전승의 기록을 쌓아 올린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와 있던 것이었다.
“지켜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