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모두의 위기 (3)
퍼더더덕.
하늘을 뒤덮은 흑풍의. 그와 함께 달려드는 일단의 무리들. 그들은 오랜 시간 서로 손발을 맞춰 온 이들이었다.
한 명이 선두에서 공격에 나선 순간, 그 위에서도 합을 맞춰 동시다발적으로 마기를 뻗어냈다.
콰과과과과!
독성을 지닌 것인지 녹광이 서린 기운도 있었고, 검극탄 같은 빠른 기공도 있었다. 절대무학이란 검강을 뿌려대는 이도 있었다.
드드드득!
가지각색의 기류들은 빠르고 시간차를 두어 밀어닥쳤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일행들을 단번에 피 곤죽으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아…….”
사령대장은 물론 비밀무사들도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다르게 변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스스스스스-
사방을 휘감던 기류들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이제 죽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던 이들은 생각했던 폭음도 충격도 몰려들지 않자, 눈을 끔뻑끔뻑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전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아!”
언제 왔는지 모를 사내 하나.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입으로는 뭔가 불평하듯 투덜거리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
그의 존재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쉽게 납득시켜주었다.
“격공섭물…… 거기다…….”
마태룡은 지금 일어난 상황이 어떤지를 파악하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상황이 나빠서? 아니다. 납득이 되지 않아서다.
화르르르-
은영단 주위로 피어오르는 불꽃의 띠.
그런데 그건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다. 새하얗게 백열하는 정염. 저건 분명 극마에 오르고, 극양을 오랫동안 다룬 자만이 펼치는 힘이었다.
파앗!
그런 극강의 양기가 어느 순간 폭발했다.
쉬쉬쉬쉬쉭.
어느새 검 모양으로 하나둘씩 변하던 불꽃들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가며 수십, 수백 개의 검영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이기어검!”
용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기로서 검을 다루는 경지. 검사가 꿈에도 그리는 최종의 단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이기어검조차 아니었다. 불꽃을 검의 모양으로 생성해 내고 그 숫자가 수백 개로 늘린다는 것은.
격공섭물, 이화취정, 거기에 이기어검. 절대반열의 무공을 무려 세 개나 동시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꺼져라!”
파파파팟.
불꽃의 검은 모든 방향으로 쏘아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트는 이. 공중을 밟고 뛰어오른 이. 급히 몸을 떨어뜨린 이.
제각기 화급하게 방어태세를 갖췄으나, 그들 모두 이 공격을 막지 못했다.
“크악!”
“칵!”
퍼퍼퍼퍽!
공중을 박차고 뛰어올랐던 열일곱 중 열네 명의 노인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세 명 중 두 명은 겨우 몸을 지탱했으나, 곧장 내장이 뒤엉켜 고통으로 피를 토해냈다.
오직 한 명만 온몸에 불길을 뒤집어쓰고도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독왕당주 적수양이었다.
화르륵. 화륵.
“크읍. 크으윽.”
적수양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무슨 불길인지, 한번 몸에 닿은 불꽃은 도통 꺼지지 않는다. 두드려도, 굴러도, 여전히 지글거리기만 할 뿐.
결국 전신의 진기를 끌어내어 억누르자, 겨우 몸에 파고드는 것을 멈췄다. 하지만 그게 고작일 뿐.
잠깐만 집중을 잃으면 다시금 불이 살아나며 계속해서 살을 지져대고 있었다.
가히 지옥불. 그 이름에 걸맞은 열양공이었다.
“크흐흐! 아……”
“으아아! 가아아…….”
주변에서 하나둘씩, 더 버텨 내지 못하고 신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기야 독왕당주 자신도 겨우겨우 목숨줄만 붙잡고 있을 정도니, 다른 이들이 상태가 나으리라고 바라는 게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과연 명불허전…….”
저벅. 저벅.
단 한 수로 이런 지옥을 만들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 앞으로 걸어오는 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젊었다.
아니, 그저 젊다기엔, 기이할 정도로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미묘하게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것이. 무언가 예상이 가는 드높은 경지를 보이는 듯했다.
“반로환동인가? 아니면 혹시…….”
“그래. 환골탈태다.”
“허.”
적수양은 탄식했다.
말투로 보아, 고작해야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대체 무슨 천고의 기재이길래, 이렇게 어린 자가 저런 절대적인 무위에 올랐는가?
시기심, 상실감, 자괴감이 몰려들었지만, 그 끝에는 결국 허탈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래. 자네로군. 소문은 들었네. 첨예하던 제자들 간의 쟁투에 껴서, 이 모든 싸움을 다 끝내버린 사내가 있다고 하더니…….”
“그러는 그쪽은? 평범한 신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이딴 진흙탕 싸움에 끼어 왜 손을 더럽히나?”
“…….”
품격이라는 것이 있다.
뭔가 가진 무위와 상관없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그건 주로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보통은 정도문파의 노신선들을 생각하지만, 품격은 딱히 도덕이라든가 군자도라든가 하는 것을 지켜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큰 상관은 없다.
오히려 악인 중에서, 혹은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겪어온 마교의 인물들 중에도, 한둘씩 눈에 띄게 드러나는 이들이 있다.
“말하지 않을 건가?”
“…….”
그건 주로 그의 인생. 한평생을 걸쳐 외길만을 고집하는 순수함과, 그런 자신의 순수함에 못지않게 다른 이들의 노력과 의지도 인정할 줄 아는, 나잇값. 같은 것에 가까웠기에.
설휘는 잠시 기다려 주었다.
“뭐…… 나이가 들면 여러모로 궁해져서 말일세…….”
독왕당주 적수양은 조금 부끄럽다는 얼굴로, 지글지글 타오르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눌렀다.
지이이익.
닿은 순간 살이 익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설마하니 재물이나 권세가 필요해졌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냥…… 의미랄까. 나름 대성을 이루었지만 혼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가는 삶이 너무 덧없어졌다는 게지. 그러다 보니…….”
“그리 심심하면 제자라도 키우지 그랬나. 괜히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 인생 망치려 들지 말고.”
“……평화? 하, 하하! 이거 참. 큭큭, 큭큭큭! 쿨럭쿨럭…….”
적수양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기침까지 여러 번 했다.
치이익. 지이이익!
“…….”
설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살 익는 냄새. 상대는 지금 이 순간, 진기로 몸을 보호하는 것을 아예 그만둬 버렸다.
애초에 살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모습은 대단히 생경하다.
“왜 웃는 거지? 뭐가 그렇게 웃겨서?”
“웃길 수밖에……. 하하. 그토록 어마어마한 무위를 가졌음에도, 결국 이런 건 모르는 모양이니. 끝났어. 이제 끝났다고. 커허허허.”
쿨럭. 쿨럭.
지글지글 그의 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휘가 뻗은 극양의 검은, 결국 그의 심맥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혈맥이란 혈맥을 갈가리 찢은 후에, 내장을 직접 태우고 녹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왕당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기쁘군. 내 목숨을 던져 넣을 가치가 있었어. 혹시나 했는데 이 정도의 월척을 잡을 줄은…….”
“……날 잡으려고 했다는 말인가?”
“무슨 소리. 어찌 당신을 잡을 수 있겠나. 그리고 잡아봐야 뭐 하게?”
쿨럭쿨럭.
독왕당주는 토혈을 한 모금 쏟아낸 뒤, 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그분의 계획은 달성했다는 거다.”
“그분?”
“그래, 그분이…….”
스르륵. 풀썩.
적수양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열 17위의 고수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
설휘는 그의 죽음 앞에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계획은 달성되었다.
그저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협박이나, 단순히 주제 파악 못 하는 허세처럼 들리지 않는다.
뭔가 모르게, 쎄하고 날카로운 불길함이 전신을 흐르며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설휘 님! 은영단주님!”
기습에 당한 휘하들과 부상자를 수습하고, 공습해 온 자들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있을 때.
“곤마께서 위험하십니다!”
울 듯한 얼굴로 호위무사 하나가 날아와 외친 것이다.
***
사박. 사박.
붓이 지나갈 때, 먹이 종이에 자욱을 남기며 묘한 선을 그린다.
휘우듬하게, 어찌 보면 칼날 같고 어찌 보면 풀 같은 검고 담백한 선.
“흐음.”
자신의 그림이 만족했는가, 곤마는 미소 지었다.
그는 집무실에서 오랜만에 난을 치고 있었다.
이미 혈사궁에 전갈은 보내 두었고, 서신을 받은 교주는 충분히 자신의 뜻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 대답이 오길 기다리는 것.
마교의 하늘 천마는,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간단한 수로 꾀어낼 수 있을 만큼 엉덩이가 가볍지 않았고, 그렇다고 일교의 지존이라기엔, 벼락처럼 빠른 행동력을 지녔다.
그러니 곤마로서는, 일종의 수성전.
다른 모든 돌발 상황을 배제할 수 있는, 자신의 집무실과 거처를 싸움터로 삼았다.
사락. 사락.
“음.”
난을 친 종이를 압지를 눌러 잘 말리고 있다가.
스륵.
곤마의 고개가 입구로 훽 돌아갔다.
그쪽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
스으으으- 쾅!
입구의 문이 부서지며, 한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곤마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두 명이 주검이 되어 있었다. 복색으로 보아 단 일격에 목숨을 잃은 듯한 모습.
“……누구냐.”
곤마의 목소리에 분노가 들끓었다.
이제껏 자신이 머무는 집무실에, 이토록 노골적으로 칼을 빼들고 오는 적들이 있었는가.
애초에 그런 가정은 넷째 제자란 직위 덕분에라도 성립하지 않았다.
뚝뚝.
곤마는 채 핏기가 가시지 않는 상대의 검날을 보며 말했다.
“교주가 보냈느냐?”
“…….”
여전히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을 완벽히 가리고 온 걸로 보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모양 같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었다.
“……흑마전주. 자신 있느냐. 나를 상대로?”
“…….”
상대가 계속 말없이 바라보자 곤마는 웃음을 지었다. 그 속내가 보일 듯해서.
“그래, 그랬지. 천살성. 한번 힘을 폭주하기만 시켜놓으면 알아서 죽는 자. 너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
“적당히 위협 아닌 위협을 하면, 알아서 지리멸렬하게 죽어 나갈 거라고. 가벼운 목숨의 위협 정도로도 사제자는 제거될 거라고. 그렇지?”
“……?”
투욱.
곤마의 몸으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복면인의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그제야 그 역시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네놈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너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모르는 부분이 하나 있어. 바로 내 힘의 개방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 적어도 1차 개방만으로도 너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거다.”
“하압!”
그 불길함에 결국 복면인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대응하지 않는 곤마의 자세를 보면서.
그 순간.
차아아아-
그의 눈앞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이 느려졌다.
파지직.
자신이 날린 검 끝에서 서서히 기운이 새어나가는 걸 보았고, 그렇게 곤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촤아아아--
몇 배는 빠른 곤마의 일격이 있었다. 그렇게 영락없이 당했다고 느낀 순간.
쩌어엉!
맞은편에서 장법을 휘갈기며 누군가가 이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흑의를 입은 자였다.
“당황하지 말게. 정신을 제압당한 것일세.”
“아…….”
흑마전주 구대염은 그제야 시간의 느림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러서시게.”
“감사합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곤마의 호위무사를 죽이고, 그의 분노를 자극한 다음 빠져나가는 것.
이제 이 뒤는 이분이 해줄 것이다.
“이 기운을 보니…… 부교주로군.”
“……역시. 눈을 속이기 쉽지 않습니다.”
곤마의 말에 부교주는 쉽게 인정했다.
천살성이라 그런지. 그는 자신이 어떤 내공을 익혔는지까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왜 교주께서 갑자기 모습을 감췄나 했더니……. 네가 직접 나섰다는 건, 교주께서 하명하신 일이라는 거로 받아들이면 되나?”
“그러게, 교주직을 받아들였으면, 쉽게 쉽게 갔을 것 아닙니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곤마의 진지한 표정에 마주 보던 부교주는 이내 시선을 내렸다.
본래 후계자에서 절대 사제자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 총단 내부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도 어찌 보면 예견된 수순이었다.
“안타깝지만, 이미 본교에 발을 들였으면 규율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제거를 할 수밖에 없지요.”
“하하. 알지. 잘 알고 있지.”
담담히 말한 곤마를 향해 부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치 미리 계획한 듯 손짓했다.
콰직!
천장이 부서지며 여섯 인물이 눈부신 속도로 곤마를 덮쳤다.
‘여기서 끝나면 최상이다.’
부교주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뛰어드는 여섯 모두가 극마고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곤마가 천살성의 힘을 개봉하기만 한다면 자신까지 나설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어?’
츠츠츠측.
부교주는 괴인들이 덮치는 가운데, 곤마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을 보았다.
뭔가 특이했다. 거셌다. 마기를 한 단계를 뛰어넘은 그런 것이 있었다.
그 기운이 점차 부풀어 오르더니, 괴인들의 검에서 검강이 뿌려질 때쯤. 그 기운이 스스로 폭발했다.
쩌엉!
부교주는 재빨리 피했음에도, 위력으로 인해 한참이나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콰아아앙!
집무실이 부서졌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건물조차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속에서 부교주는 두 눈으로 목도했다.
곤마를 덮친 이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그럼에도 여전히 곤마의 내기는 그의 주의를 맴돌고 있었다.
이것이 내공인지, 아님 자신이 귀신에 홀렸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네.”
곤마.
이미 눈이 시뻘겋게 변한 그는, 경천동지할 힘을 발휘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천살성의 마지막을. 그리고…….”
“…….”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올렸고.
“찬란한 죽음을.”
다시 내렸을 때쯤, 또다시 폭발이 일었다.
이전보다 열 배, 아니 수십 배가 넘는 파괴력을 동반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