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모두의 위기 (4)
구구구궁!
거대한 화마가 영내를 뒤흔들었다.
엄청난 충격파에 주변의 모든 것들이 깨져 나갔고, 뒤이어 까마득히 솟아오른 거대한 먹구름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다.
구오오오--- 화르르르.
화마가 지나간 곳은 온통 불탄 그을음과 폭발의 흔적뿐이었다.
수목은 순식간에 타올라 재만 남았고, 제법 튼튼하던 건물도 형체만 겨우 남아 있었다.
당연히 부교주와 같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복면인들. 저편에 몸을 은폐하고 있던 그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은 이가 없었다.
화염의 폭발은 그토록 광범위했고 강렬했다.
“그으으으…….”
온몸이 불에 휩싸인 부교주 여비신(余非信)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혈수마공으로 누르려고 했지만, 곤마의 화염은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내력으로 한 차원 높은 정염의 불꽃을 피워냈음에도, 대체 어떤 기운을 쏘아냈는지 사지에 달라붙은 불은 요지부동이었다.
으득.
그럼에도 부교주는 꺾이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역시 이미 극마의 끝에 다다라, 탈마까지 한 발을 앞두고 있던 자.
그는 전신에 들러붙은 잔열을, 내기를 한바탕 크게 흔들어 가라앉혔다.
“과연…….”
잠시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던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교주 여비신.
가장 뜨겁다는 백염(白炎)의 기운을 쏘아냈음에도 그는 끝까지 버텨냈다.
다만 그것은 능력이 되어 버틴 것이라기보다, 안간힘을 쓰며 끌어낸 의지력에 가까웠다.
그게 답답했다. 실력 차는 분명히 제 몸으로 느끼고 있을 터인데.
“계속할 건가?”
“물론입니다.”
여비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글지글.
흐트러트린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피부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몇몇 곳에서는 진물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그저 본연의 호심공으로 내부를 보호했다.
“건방져 보이겠지만…… 이번엔 제가 가겠습니다.”
“언제든지…….”
삼 장 거리.
그 정도를 유지한 상태로 곤마가 자연스럽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부교주의 눈을 바라봤는데.
‘저건…….’
금색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
인간보다는 고양이나 도마뱀에게서 볼 수 있는 눈.
그렇다면 지금 그가 준비하는 무공도, 현세에 존재하는 무공이 아닐 것이다.
‘금주에 해당하는 마공……. 부교주의 신분으로 오히려 율법을 깨트리고 익혔단 말인가. 왜?’
후르르륵.
텁텁하고 끈적한 기운이 여비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곤마의 불꽃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치지지직.
동시에 끈적한 기운에서 시꺼먼 기운이 겹쳐졌고, 마지막에는 핏빛의 진한 기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뭉클뭉클.
썩은 피 냄새. 곤마는 그 악취를 맡고는 어떤 무공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혈시천겁수(血尸千劫手)인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본교에서 금지된 무공.
그중에서도 부작용이 악독한 것으로 손에 꼽히는, 이 무공은 말 그대로 죽은 자들의 무공이었다.
피에 잠긴 시신을 천구를 썩혀, 마기도 주술력도 아닌, 저주에 가까운 위험한 기운을 끌어온다.
더럽고 자칫하면 본인이 먼저 희생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익힐 수 있지만, 연성된 후의 위력에만 기준을 놓고 보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저 위험한 기운은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다. 강하고 약하고에 상관없이, 무조건 상대에게 적중하는 저주에 가깝다.
천구의 시신에서 뽑아낸 죽음의 기운은, 강기보다 오히려 한 차원 높은 시광(屍光)의 힘이었다.
‘탈마에 올라야 펼칠 수 있는 무공인데……. 강제로 내력을 폭주시켰다는 말인가.’
곤마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졌다.
가벼운 상대가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약과 상관없이, 승패를 예감하고도 계속 끈질기게 달라붙는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원래 극마의 한계에 다다라 있던 부교주. 진원지기를 폭주시켜 순간적인 파괴력을 최대로 끌어올렸고, 여기에 금지된 무공까지 쓰고 있다. 이쯤 되면 초기 단계의 탈마급.’
곤마는 차곡차곡 생각을 되짚으며 경계의 정도를 더욱 올렸다.
애초에 방심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젠 정말로 긴장해야 했다. 자칫하면 한순간에 우열의 차이가 뒤집어질 수 있었기에.
사아아아아아---
한편, 곤마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부교주 여비신은 공격 준비를 끝마쳤다.
두 손으로 뿜어낸 검은 기류는, 어어 하는 사이 곤마의 주변을 감쌌다.
얼핏 보면 독무. 그것도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물에 떨어진 먹물처럼 흐름을 타고 한순간에 빠르게 퍼져 주변을 잠식한 것이다.
그렇게 번진 주변의 공기는, 마치 연무를 피워 올린 것처럼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한번 춤을 추겠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주변을 에워싸며 곤마를 덮침과 함께, 순식간에 찢어발겨 버렸다.
카카카캉!
하지만 시광의 힘은 곤마의 몸에 닿지 못했다.
무려 세 개의 호심공. 그중 고작 한 개의 벽을 뚫었을 뿐, 남은 벽은 뚫어버리지 못했다.
그것도 모든 걸 정지시켜버릴 수 있는 절대권능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하압!”
그 모습을 본 부교주는 또다시 뭔가를 외쳤고.
퍼퍼퍼퍽!
시광의 힘을 얻은 수십 개의 칼날이, 고슴도치의 바늘처럼 곤마의 호심공을 뚫고 들어갔다.
츠츠츠츠-
하나, 그 역시 역부족이었다.
두 개의 벽을 뚫었지만, 마지막 벽 앞에선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과연 혈시광장……. 무극호심공(無極護心功)까지 침범해 올 줄이야…….”
“…….”
“그럼 이번엔 이제 내 차례지?”
츠으으으으.
곤마의 말이 떨어짐과 함께, 부교주 주변으로 검은색 기운이 덧칠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핏빛의 기류가 맴돌기 시작했다.
“이건……?!”
여비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힘든 상황.
놀랍게도 곤마가 자신의 혈시천겁수를 똑같이 따라 생성해낸 것이다.
시큰시큰한, 썩은 혈향이 코끝을 찌르는 그때.
“꺼져라.”
곤마의 허락과 함께 마치 촉수처럼 수백, 수천 개의 시광의 칼날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완벽하게 부교주의 몸이 찢어발겨진 것이다.
‘어?’
하나 그를 보던 곤마의 미간이 꿈틀댔다.
수백 개의 칼날이 비치는 사이로, 뭔가가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일순 잘못 보았나 싶었던 곤마는, 곧 부교주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찢긴 살이 처덕처덕 달라붙고, 끊어진 힘줄이 다시 돋아나는, 전설 속의 진짜 강시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이미 인간을 버렸구나.”
부교주는 진원진기를 모두 태웠고, 부작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더는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하나 역설적으로 그랬기에 살 수 있었다. 대체 어떤 회복 마공인지 모르지만, 그는 본래라면 갈기갈기 찢어졌을 몸을 다시금 얻어버린 것이다.
“이제야 사제자님과 조금 비슷해졌습니다. 남지 않은 시간까지도.”
“하.”
곤마는 새삼 실감했다. 죽여도 꺾어도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귀찮은지. 아니, 위협적인지.
천지의 이치를 거스름으로써 잠깐의 영광을 얻은 부교주.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모두 버려가며 곤마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마음가짐 하나는 경이롭군. 굳이 그렇게까지 나와 싸우려 하다니…….”
“목숨을 던져야 겨우 흉내 정도 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 운 좋게 방심이라도 해 주면,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을 테고?”
“그럴 리가요. 곤마 님보다 제가 훨씬 더 빨리 죽을 겁니다. 다만 그 정도만 해도…….”
지글지글. 틱. 틱!
급격한 회복에는 당연히 폭주가 뒤따른다. 안구 하나가 터져 나가고, 귀에서 피를 쏟아내는 부교주는 점점 인간의 형체라고 보기 어려운 몸으로 바뀌어 가며 말을 이었다.
“그분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음.”
곤마는 침음했다.
‘부작용이 극심하다. 저대로 그냥 내버려 두어도 앞으로 반각.’
상대는 척 봐도 스스로 자멸해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공세만 섞으면 그대로 끝날 수준.
문제는 곤마, 그 역시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그는 천살성, 생명을 태우는 본연의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일차적인 신체능력과 내공의 여력, 그리고 생명의 끈을 당기는 1차적인 봉인만으로도 여기까지 싸워왔다.
그리고 딱 여기까지였다.
여기서 더 힘을 쓰기엔, 아무래도 위험했다.
이 이상은 진짜 천살성의 영역이고, 그 경계는 화약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만큼이나 아슬아슬한 것이다.
쩌어엉!
“어?”
그때였다.
어디서 모르게 강렬한 파동이 날아 들어온 건.
그리고 그걸 느낀 곤마의 눈에 조금씩 진한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설마 너희들……?”
“예. 맞습니다.”
씨익.
그 말에 부교주는 웃었다.
숨겨왔던 밑천이 생각보다 빨리 발각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사제자님의 발길을 막는 이유입니다.”
“하…….”
곤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도 상황을 인식했다. 교주가 생각했던 진짜 계획이 무엇이었는지를.
***
한편.
“크악!”
“칵!”
사정없는 칼날에 하나둘씩 쓰러져 가는 무인들이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 잔혹하게 휘둘러지는 칼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죽여라. 시간 끌지 말고…….”
은영단 핵심 병력인 사황대원들은 울분이 가득 서려 있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녀석들이 다짜고짜 덤벼든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능욕하고 있었다.
“낄낄낄. 이 정도 실력으로 거창하게 은영단이라니.”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놈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약해 빠졌군.”
놈들은 기만은 점점 심해졌다.
그럼에도 대원들은 대항하는 이 한 명 없었다.
“커으윽. 컥…….”
제일 먼저 사황대 대장이 나서서 손을 썼으나, 저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난자당하는 모습을 본 후였다.
“천천히 해. 아직 숫자가 반 이상이 남았다고.”
“그나저나 이쯤 돼도 포기하지 않다니……. 구더기처럼 끈질긴 의지만큼은 칭찬해 주마.”
복면인들은 저항할 의지도 보이지 않는 이들을 상대로 노리개처럼 휘둘러댔다.
구타에 칼질. 잔인한 손질을 보건대, 같은 교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쯤 되자 눈이 뒤집혀, 그냥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사이.
뻐억.
빛줄기처럼 내려와 전광석화처럼 복면인 목을 단번에 날려버린 자가 있었다.
소녀처럼 가녀린 몸을 한 자였는데.
“쥐좆만 한 것들. 감히 교내에서 이따위 짓을 벌여? 교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느냐!”
말투는 소녀답기는커녕 시중잡배 같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에 복면인이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의 목숨은 거기까지였다.
콰악!
갑작스레 날아든 노인에게 그대로 목이 잘려버렸다.
“쯧쯧. 대체 누가 시켰길래 이따위 짓을…….”
악비였다.
초아란과 순찰 중에 이 난장판을 발견했던 것이다.
바바박. 퍽! 퍽!
두 사람의 등장은 복면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적의를 드러내자 복면인들은 재빨리 물러섰다.
그런데 그때쯤 복면인들과 좀 다른 복장을 한 삽십 여명이 무인이 나타났다.
“이놈들은 또 뭐야…….”
악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혼 좀 내줬기에 조용히 물러가는 줄 알았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혈마궁 놈들이야.”
초아란이 읊조렸다.
“뭐?”
악비가 잘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혈마궁이라면 교주의 안위를 살핌과 함께 일정을 살피는 곳. 교주를 보위하는 제일선이 바로 혈마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호오. 이거 오랜만입니다.”
두 고수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자가 있었다. 척 보고도 알 수 있는 낯익은 얼굴.
“당신은…….”
“허…….”
초아란과 악비가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눈이 밝은 은영단원들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혈마궁주를 뵙습니다.”
서열 3위. 나칠(羅七).
장로들의 1인자.
영향력이 교주 다음으로 지대하다고 알려져 있고, 웬만해선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엉덩이 무거운 이.
그런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초아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고, 혈마궁주 나칠이 조용히 목례를 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은거고수분들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서 물리거라!”
이번엔 악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연하게도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왜 그래야 하지요?”
“뭐?”
나칠은 턱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왜 그래야 하는지 묻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제가 계획한 일인데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반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