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모두의 위기 (5)
“그래? 그럼 여기서 뒈져도 상관없단 말이렸다?”
초아란의 앙칼진 목소리가 장내를 수놓았다. 분노가 섞인, 명백한 경고였다.
사사삭.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몸을 긴장했다.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흐름.
“하핫.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군요.”
하지만 나칠은 껄껄 웃을 뿐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째, 더욱 궁금해집니다그려. 좋지요. 한때 교내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두 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참에 한번 확인해 보지요.”
“이런 시건방진!”
악비가 노갈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상대는 작정한 모양이다. 여기 있는 은영단을 어떻게든 적으로 몰고 갈 생각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에게조차 손을 섞는 데 꺼림이 없을 수 있을까.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반드시 일을 벌여야 하는, 임무 같은 것이 있을 터.
“그럼 대화는 이쯤하고…… 이제 극마고수 두 분에 걸맞게.”
스륵.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복면인 셋이 걸어 나왔다.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흠.”
“음…….”
초아란과 악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슥.
기도로 보아 척 봐도 극마고수. 그것도 한 명은 꽤 수준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혈마궁은 마교의 교주를 보필하는 제일궁.
당연히 그곳의 궁주인 혈마궁주는 극마급 고수이고, 그에 버금가는 고수 두셋이 더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하핫. 요새 진짜 개나 소나 다 극마라고 우기고 나서는데…….”
물론, 초아란도 악비도 그에 물러설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을 사납게 빛내며, 싸울 의지를 가득 끌어올렸다.
“이쪽은 너희가 기저귀 차고 옹알거릴 때부터 극마였다고.”
“아주 가루로 만들어주마!”
악비가 말을 받고, 초아란이 뒤를 이었다.
후욱!
선공은 냉혈마녀 초아란. 그녀는 가까이 보이는 복면인에게 곡도를 휘두르며 혈마수를 뿜어냈다.
그 손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려 오 척에 가까운 핏빛 기운이 복면인을 덮치며 일격을 선사했다.
슈슈슉.
하지만 상대 역시 극마에 오른 이.
죽음의 띠로 변한 혈마수를 너무도 손쉽게 피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적의 반격.
두웅.
‘엇?’
초아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뿜어낸 핏빛 기운이 그녀의 혈마수와 제법 흡사했던 것이다.
조금 다르다면 상대는 장심이 아니라 손가락을 이용했고, 줄무늬처럼 그어지는 핏빛 기운이라는 것.
쉭!
상대의 대응은 너무도 절묘했다. 마치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초아란은 정말 아슬하게 피해냈고.
치치이이--
혈광이 스친 바닥이 타 들어가는 걸 보고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색혈마조(索血魔爪)……?’
계통을 따져보면 혈마수에서 파생된 절기다. 위력은 훨씬 못하지만, 대신 발동이 훨씬 빠르고 기운을 적게 요구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니 초아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전문 훈련을 받은 이들…….’
그 움직임에는 체계가 있었고, 손발을 맞추는 연수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키워진 이들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어진다.
지금 자신 쪽에 나선 것은 두 명이지만, 재수 없게도 상대는 삼십여 명.
“제기랄! 결국! 우리도 애초에 경계대상이었냐?!”
최악의 경우, 저 남아 있는 이들 중 극마고수가 더 있을지도 몰랐다.
“헛? 억!”
한편, 악비 역시 꽤나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드드드득!
처음에 그는 장기인 빙월신공을 써서 단숨에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상대가 나빴다.
“뭔…… 유현음기공(幽玄陰氣功)?”
자신과 같은 극음 속성에게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원거리 마공.
빙월의 기운을 약화시키고 역류를 일으키는 계열이다. 자칫하면 생각도 못 했던 자들에게 낭패를 당할 뻔했다.
몇 번을 공수를 주고받으며, 악비는 상대의 무공을 분석했다.
‘나를 파훼하기 위해 만든 무공 같은데? 괜히 시간 끌다가는 더 난처해진다.’
쉬이이익.
상대의 검끝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기류들은 서서히 자신의 기운을 뺏어가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마공 흡수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득!
악비는 기력을 끌어올렸다.
상성이 좋지 않지만 파훼법은 있었다.
저런 음기를 흘리는 것들은 지구력을 기반으로 장기전 싸움을 유도하는 방식. 그렇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 최상이다.
촤라라락.
검끝에 얼음이 내려앉으며 서서히 얼려졌다. 사방의 모든 것을 동결시키는 끔찍한 서리가 주변을 새하얗게 만들며 맴돌았다.
빙월와운(氷月渦雲).
검강의 위력에, 줄기줄기 선형처럼 광범위하게 뻗어나가는 최고의 절초.
악비는 한순간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숨을 죽였고.
파앗.
다시 적이 거리를 좁히려 할 때, 상대가 공중에 뜨는 그 지점을 노려 빙월의 힘을 출수했다.
콰콰콰콱!
“크악!”
“하핫!”
먹혀들었다.
이 정도로 광범위한 공격이 쏟아질 거라 예상치 못한 녀석은 피하지 못하고 막는 걸 택했다. 하지만 이미 거기까지 예상한 바였다.
쩌어엉!
어설프게 막던 놈은 소용돌이에 몸이 휘감기며 빙월의 힘을 그대로 맞았고.
우드득!
“하앗!”
악비는 얼어붙은 놈에게 마지막 일검을 박아 넣기 위해, 그가 추락하는 지점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쿠왕!
“크헉!”
악비의 몸이 치솟아 올랐다.
자력에 의해서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바닥을 뒹굴다 일어난 그의 몸은,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다.
“너, 너…….”
악비는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막 상대를 마무리하려던 그를 저지한 것은, 바로 혈마궁주였다.
“과연. 그간 실력이 녹슬지 않았구려, 악비.”
“너 이 자식……. 끼어들 거면 처음부터 해야지. 일궁의 궁주라는 놈이 비열하게 이게 뭔 짓이야?!”
쿨럭.
악비의 비난에 혈마궁주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뭐, 계획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
“뭐라?”
스륵.
악비가 알아듣든 말든, 그는 천천히 검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상대할 거요. 서서히 죽여서, 스스로 죽여달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도록.”
지지지지직.
그러는 그의 검에는 뇌전의 기운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자줏빛의 기류를 띈 기이한 뇌전이었다.
“자전마공…….”
악비는 신음했다.
과거 일제자를 따르는 궐주 중 하나가 사용한 적이 있는 무공이다. 하지만 같은 무공이라 해도 상대는 혈마궁주.
그는 오로지 자전마공, 그 하나만으로 극마에 올랐을 정도다.
마교 전체에서 뇌기를 다루는 실력 하나는 한 손에 꼽히는 자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어디, 자칭 은거고수라 부르는 이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는 혈마궁주의 입꼬리가 귀까지 걸렸다.
“경험해 볼 기회군요.”
그리고 그가 공중에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
벼락이 비처럼 쏟아졌다.
수많은 자전탄기가 형성되며,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악비에게 쏘아졌다.
처음부터 자전마공의 10성에 이르는 최강의 절초를 꺼내는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어.’
정확히 말하면 피한다고 해도 따라올 것.
자전마공의 벼락은 벼락을 끌어들인다. 조금 전에 맞은 일격. 그로 인해 몸속에 남은 자전에 기운에 이끌릴 것이다.
방법은 둘. 받아치거나, 흘려내거나.
하지만 지금의 악비의 몸으로는 그대로 쓸려나갈 것이 뻔했다.
‘아.’
그렇게 항거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벌리던 때.
사아아아-
기류 하나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고, 기적이 일어났다.
푸스스스.
미약한 기류는 자전마공의 수많은 벼락을 씻은 듯이 소멸시켰다. 그리고.
“괜찮으신가요?”
뒤늦게 허공을 밟고 나타난 고아한 목소리의 여인.
“천미려 님!”
악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
천미려의 등장은 장내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두려움. 고마움. 적아를 가리지 않고 여러 감정이 드는 모습이었지만, 무엇보다 남녀를 떠나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
그것이 그들의 시선을 쏠리게 만들었다.
“……허. 당신이 그 신비녀인가?”
혈마궁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후계자 쟁투에 개입했던 절대자 설휘.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킨다는 절세미녀.
보고나 풍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의 미녀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바였다.
“어때? 괜찮아……?”
한숨 돌린 초아란이 다가와 악비를 일으켰다. 그러자 악비는 이를 악물었다.
“일났다. 함정에 걸렸어…….”
“……함정?”
“저 자식. 좀 전에 모든 게 다 계획이란 투로 말했어. 이 난장판에 우리가 끼어들 것도, 그리고 우리를 작살낼 전력도 다 준비되었다는 식으로. 이거, 어쩌면 천미려 님께서 지금 나타나는 것까지…….”
그 말에 초아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 모든 게 천미려 님을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어. 제대로 함정을 판 거야. 곤마 님께 시간을 준 것도. 그분 휘하의 식솔을 학살하는 것도. 제기랄. 설마 그건가? 우리 쪽 탈마의 고수들을 분리시키려……?”
으드득.
악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간 은영단이 분란을 겪는 중에도, 설휘나 천미려가 가급적 나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탈마의 고수는 분명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무적은 아니다.
자신의 무력을 믿고 따로 행동하다간, 늑대 떼에 휩싸인 호랑이 꼴이 날 수 있다.
그런 불길한 느낌을 받은 순간.
“크하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사자후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그 주인은 금방 나타났다.
육지비행술. 천미려처럼 허공을 비행하며 나타난,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인물.
“교주님을 뵙습니다!”
천마 천월성.
놀랍게도 그가 직접 등장했다. 다른 어떤 이를 부리는 것도 아닌, 마교 교주 본인이.
주변에서 부복한 교단의 모두를 본체만체하며, 오직 천미려에게만 시선을 준 천마.
“드디어…….”
그의 입가에는 환희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이 모두의 귓가로 똑똑히 들렸다.
“만났구나. 홀로 있는 너를.”
***
쩌어엉!
멈칫.
곤마가 있다는 방향으로 달려가던 설휘는 급격히 정지했다.
또다시 강렬한 기의 파동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건. 평범한 기운이 아닌, 마의 극을 뛰어넘은 기운이었다.
“이건……?”
이제껏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정리되고 있었다.
설휘는 상황이 그제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저편에서 풍기는 곤마의 기운.
그리고 완전히 반대편에서 또다시 퍼져 나온 천미려의 기운.
두 명 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 칫. 교주가 아주 작정을 했군, 이거.
“교주가…….”
설휘의 의문에 AI가 답을 했다.
과연, 다른 사람도 아니라 천마 본인의 계획이라면 가능하다.
곤마의 세력에서 탈마의 고수 둘을 차례차례 떨어트리고, 마지막으로 곤마 본인까지 고립시킨 다음 한 명씩 주살할 계획.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곤마까지, 탈마급 고수 세 명을 단번에 제거하는 것.
“어이. 이제껏 이런 경우가…….”
- 없었어. 애초에 천미려는 내 생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을 끝내기도 전에 AI는 칼같이 대답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고.
하기야 마교의 하늘이라는 자가 이런 일을 계획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거 지금…….”
- 판단해라, 설휘. 천미려를 구할지, 아님 곤마를 구할지.
“…….”
설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가지 갈림길. 이제껏 많이도 해온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껏 선택지와는 차원이 다른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어떤 것을 선택하든 모든 책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었다.
- 참고로 천미려는 이번 생이 아니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를 선택한다면…… 자칫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
“기회?”
- 아마 지금은 천마에게 배신당한 곤마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 어쩌면 오직 지금만이 그가 마신에 가까운 잠재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거지.
“……!”
위기는 동시에 기회다.
비록 대가를 감당해야 하지만, AI는 지금 상황이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고 말했다.
- 곤마는 어찌 됐든 이미 목숨을 버리겠다고 각오한 상황이다. 천살성의 능력을 넷으로 구분할 때, 그는 이미 1차 봉인을 풀었다.
“무슨 뜻이야?”
- 이제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는 거야. 곧 두 번째 봉인을 풀겠지. 그리되면 한 시진. 세 번째는 일각이다. 네 번째는…… 나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어.
“…….”
봉인을 푸는 속도가 과거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말일까?
그래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 변화하는 건 어렵다는 말일까?
- 시간이 없다. 선택해, 설휘. 그게 어떤 선택이든……
- 어쩔 수 없는 거다. 우리의 삶은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
“아니. 내 책임이야.”
설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과거엔 그랬다.
이 선택에 대한 책임. 책임 의식이란 게 없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움직였거나, 목숨이 온전했을 때는 오히려 다른 선택지를 회귀하여 확인하는 방식으로 위안을 삼았다.
“과거엔 어땠는지 몰라도……”
“…….”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번이 진짜 내 삶이다.
죽으면 다음 삶도 내 삶이 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곤마도 소령도 천마도 모두 다음 삶에서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내겐 다음 생이 아닌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이 삶의 목숨은 단 하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