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절세무공 (1)
천미려.
마교의 다른 많은 고수들이 그렇듯, 그녀도 한때 무공에만 매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빼앗는 것은 즐기지 않았지만, 밀리고 뒤처지는 일은 피해야 했다.
강하지 않으면 자유든, 권한이든, 생명조차도 빼앗길 수 있는 곳이 마교였으므로.
그렇게 극마에 오른 뒤로 벽에 마주치는 순간이 있었다. 경지에 오르는 것은 더뎌졌고, 나이가 들어가며 근력과 내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은거를 택했고, 온전히 수양과 수련에 집중한 뒤 드디어 극마의 마지막 벽에 다다랐다.
‘나는 여기서 죽겠구나.’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린 것은 좌절이었다.
탈마.
극마에 달한 이들 중 극히 소수만이, 자질은 물론이고 천운이 따라야 넘을 수 있는 벽.
그건 까마득하게 높았고, 천미려는 자신이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 중 하나임을 자인했다.
뱀은 한없이 성장한다고 한다.
종국에는 용으로 변하는 생물이기에. 하나 어느 순간 더는 허물을 벗지 못하게 되면, 결국 죽고 만다.
그걸 인정하게 되자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천천히 노쇠해가며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려고 했다.
“혹여, 아직 더 도전할 생각이 있으신가?”
어느 날, 한 노인이 찾아왔다.
스스로를 한낱 농부라고 소개한 그는, 초로의 모습에도 눈빛만은 형형한 사람이었다.
천미려는 처음에 거절했다. 이미 겨우 마음을 접은 상황에 다시 헛된 희망에 흔들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말하고 돌려보내려고 할 때.
“나도 아네. 자네 같이 무공이 높지 않다는 걸. 그래도 권유하겠네.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경험해 보지 않겠는가?”
“…….”
그 말에 왜 흔들렸는지는 훗날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인연이라고, 혹은 자신에게 미력하게 남은 향상심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볼 뿐.
생각해 보면, 그녀 역시 무인이었다. 살고 싶은 욕구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보고 싶다는 마음이 아마 저변에 깔려 있었으리라.
“천 리, 만 리를 보는 게 꼭 무공만 강해서 되는 게 아니라서 말일세.”
“……해 봅시다. 한 번만.”
그렇게 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노인에게, 그녀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노인의 방식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다듬고, 한없는 고요함으로 자신을 이끄는 방식이었다.
“시간을 흘려보내게. 한없는 얼음으로. 영원히 녹지 않는 빙벽을 스스로의 안에서 만들어 보게.”
활화산처럼,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마교의 내공과는 달랐다.
오히려 정파의 정종내공에 가까운 심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 수양이 마침 천미려에게는 잘 맞았다.
애초에 한없는 냉기, 차갑게 스스로를 다스리는 빙공 계열이었기에 그랬으리라.
그렇게, 한없는 고요. 차가움보다 고요한 정지 상태에 완전히 몰아한 시간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 그녀는 깨어났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어나는 것처럼.
천미려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세찬 소나기가 지나갔는지, 목옥의 처마 밑에서 빗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그 아래, 문지방 대청마루에 앉은 굽은 등의 노인이 논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셨는가.”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초로의 모습에도 눈빛에는 형형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천미려는 그 변함없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그리고 그가 입은 마의가 세월이 꽤 지난 듯 해진 것을 보고 놀랐다.
“사부님…….”
처음으로, 그녀는 그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벽을 넘었음을.
한계에 막혀 있었던 기혈이 청량하게 온몸을 휘감아 돌고, 세상만물에 퍼진 기운이 그녀의 몸을 통해 자연스레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영원히 벗을 수 없을 줄 알았던 허물을 벗고, 이제 죽음의 경계 또한 크게 멀어졌음을.
“일단 다스리시게.”
“……예?”
“알에서 깨어난 새는 스스로를 돌봐야 하네. 자신을 감추지 않으면, 독수리가 물어갈 게야.”
천미려는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그 말에 따랐다. 탈마에 이르렀다는 자부심, 성취감. 그 황홀한 힘의 충만함에서 진정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보시게. 저기 하늘을.”
잠깐의 시간이 밤낮을 바꿨을까.
노인이 가리키는 밤하늘.
영롱하게 빛내는 별자리를 보던 가운데, 천미려는 눈을 크게 떴다.
“……북극성이?”
하늘의 정중앙.
오로지 단 하나여야 할 별이, 자그마치 셋으로 늘어나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다시피 셋이네. 시공이 나누어지는 광경이지.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다가 다시 되돌아갔군.”
“어찌…… 이게 대체 무슨 기이한 일인지요?”
“글쎄. 나름 짐작 가는 게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네. 좀 더 지켜보세나.”
그렇게, 천미려는 노인과 한동안 생활을 함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예를 딱히 익히지 않았다지만, 어지간한 무인보다 훨씬 높은 윗줄에 있는 이였다.
이미 극마의 벽을 넘어 탈마에 이르게 된 그녀조차, 스승의 기척을 때때로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시간이 반복되고 있군. 삶이라는 굴레에 갇히면 운명은 정해지는 것이지. 그렇게 된 줄 알지도 못하고, 흘러갈 뿐.”
스승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천미려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 몇 주를 보내는 중에 식품을, 품삯을 받으러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밤하늘을 보고, 그리고 아무런 이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흘려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다들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날은 하나밖에 없어야 할 북극성이, 자그마치 일곱으로 불어난 날이었다.
눈이 있다면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기이한 현상.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껍데기에 틀어박힌 병아리는 세상을 알지 못하지.”
“그럼 저는…… 어떻게 저게 보이는지요?”
“이미 벗어났지 않은가?”
“네? 벗어……. 아!”
사부가 탈마를 말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파에서는 현경이라고, 혹은 자연경이라고 부르는 경지. 스스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경지.
그건 자신의 내부에서 이미 작은 우주를 만들었기에 가능하다.
자신만의 시공간이 완성되었기에, 세상의 시간 흐름. 그것이 이질적으로 변이할 때, 그걸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천미려는 그런 흐름을 알듯 말 듯했다.
스승의 말은 분명 쉬웠지만, 그 안에 담긴 흐름이 너무도 현학적이고 난해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생각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천마가 죽었군. 마교주가 바뀌었어.”
그런 와중에 밤하늘의 별을 보고 스승이 탄식한 날이 있었다.
“혼란의 시작이다. 절대자. 너무도 강한 존재가 마교의 하늘, 천마를 죽인 뒤 자기 사람을 앉혀 놓았어. 앞으로 그는 시공을 뒤흔들며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농락할 게야.”
“…….”
“하지만 이는 역천. 아무리 절대자라 해도, 하늘의 순리는 거스르지 못하지. 역천자의 놀음 속에서 수많은 반복된 시간이 모여, 결국 그도 분명 예상치 못한 특이한 인물을 보게 될 거다.”
스윽.
노인은 천미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스라한 눈빛으로.
“언제고 너는 세상을 지배하는 인물과 싸워야 한다. 그것이 시간과 운명에 신음하는 만인들을 구하는 일이 될 테니까.”
“제자가…… 가능한 일일까요?”
“너 혼자라면 부족하지. 하나 앞서 말했던, 시간이 모이고 모여 그 스스로의 흐름을 되찾아가려는 움직임. 그게 모인 존재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너를 찾아올 테니.”
말은 명확했다. 뜻도 간단했다. 그렇기에 천미려는 그제야 처음으로 물어보았다.
“사부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책이나 좀 읽은 농부다.”
말 전에 잠시 망설임이 있었지만, 사부는 그저 웃으며 짧게 설명했다.
마교 출신이지만 주역을 읽고서 그에 평생을 바치고, 성실히 마음을 닦은 끝에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천미려는 그 작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최소 신선 정도의 급이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일이 쉽지 않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니구나. 결자해지. 나는 시간에 매인 자가 아니기에, 오히려 풀어낼 자격이 없어.”
가장 많은 고통을 받고 가장 많은 강요를 당한 자만이 매듭을 끊어낼 자격을 갖춘다.
스승의 말은 항상 모호했다. 그래서 천미려는 그렇게 기억해 둘 뿐이었다.
“마교의 하늘마저 바꾸고, 세상의 시간마저 뒤흔드는 존재라면…… 신이나 다름없는 절대자이지 않습니까? 그런 자를 어찌…….”
“태산이 높다 한들, 결국 하늘 아래 뫼이로다.”
스승은 비유를 자주 했다.
그것은 아연하기도 했으나, 때로는 오히려 이해를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당장 이 말 또한.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신처럼 보이겠지. 한없이 높고, 강대한. 하나 그는 결국 신이 아니다. 그가 진정 신이었다면, 나처럼 엿보는 자도 존재하지 못했을 터.”
“……제자가 보기엔 사부님 또한 신이나 다름없습니다만.”
“말하지 않았느냐. 하늘 아래 뫼일 뿐이라고.”
스승은 그렇게 웃었다.
당장 선계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깨우침과 수련만으로 탈마 이상의 힘을 갖춘 자.
평생 무인으로 살았던 천미려를, 부족함을 채워 탈마에 이르도록 끌어올린 자.
누가 신선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이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절대는 없다. 절대자 또한 실제로 절대자는 아니다. 그걸 잊지 말거라.”
그날은 특히 더 겸허했다. 그리고 잔잔했다.
***
“허어. 여유가 만만한 건지, 아니면 정신줄을 놓은 건지 모르겠군.”
“…….”
갑작스런 목소리에 천미려는 현실로 돌아왔다.
살기 가득한 천마의 얼굴.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체를 숨긴 절대자가 꽂아놓은 인물. 본 교주를 죽이고 교주 행세를 하는 꼭두각시를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정말로 믿기지가 않는군. 인과율에서 벗어나 있는 자라. 이런 일이 현세에 존재하는구나.”
“…….”
그리고 복잡한 기분인 것은 천미려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천마 역시 천미려를 보는 얼굴에 대단히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인과율의 밖이라.”
천마의 말에 천미려는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사부의 말이 맞은 것이다. 꼭두각시인 그가 몰랐다면, 그 뒤의 절대자 역시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본래는 인과율의 안에 있었지요.”
“……안에 있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물 밖으로 헤엄칠 수 있게 되는 물고기는 반복되는 시간을 벗어날 수 있죠. 시간, 흐름. 그건 절대적인 통제가 될 수 없으니까.”
“……뭐?!”
천마의 표정에 당황함이 곁들어졌다.
확실히 그는 전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천천히 뭔가 고민하는 듯 보였고.
“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절대자, 시스템을 속였다는 말인가?”
“말이 그렇게 되는군요.”
천미려는 시스템이란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 대답했다.
“허허허. 왜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세상을 혼란? 너 지금, 누굴 말하는 거냐?”
“마교의 하늘을 당신이 죽이도록 허락한 인물. 혹여 당신이 죽고 나면 그제야 나타날 흑막.”
“……!”
일순, 천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뭔가를 지적당한 사람처럼.
“당신들의 목적은 뭐죠? 왜 시간을 마음대로 되돌리는 건가요?”
“…….”
“세상을 온통 제멋대로 주무르고, 타인의 운명을 비틀고. 그러고도 아직 부족한 게 있는 건가요?”
천미려의 물음에 천마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어디까지 이 여자가 알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거 정말 재밌군. 플레이어가 아닌 자가, 이 시스템의 상황을 들여보는 게.”
“…….”
“그래. 그 궁금증으로 평생을 숨어 지냈을 터이니, 그 인내심을 존중하여 친절히 알려주지.”
천마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시작은 나도 모른다. 그 동기와 이유 역시도. 그저 내가 알고 있는 현 절대자분의 유희라고 할까? 이미 모든 것의 끝을 이룬 그분께서는 인간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 하셨지.”
“…….”
“인간은 매번 매시간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지.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게 어떤 것일까? 궁극적인 물음이지.”
천마는 말했다.
“그래서 만드신 거다. 인간의 군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삶을.”
“거짓말이군요. 그건.”
“……?”
“인간의 군상을 알고 싶기 때문? 그럼 탈마에 오른 고수들을, 보기만 하면 씨를 말리려고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는 까닭은 뭔가요?”
그랬다.
시험, 유희라는 말도 사실 거짓말이다.
애초에 그런 반복되는 삶을 주고, 그러다 너무 강해지면 정적을 제거하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네가 그걸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 오오.”
구구구궁.
천마가 뭐라 말을 하려던 중에.
멀리, 꽤 떨어진 곳에서 강한 파공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천마는 씨익 웃었다.
“겨우 계획대로 흘러가는군.”
“당신들. 설마 넷째 제자를……?”
“다 같이 모이면 좀 곤란하지. 그래서 너희들을 떨어트려 놓을 필요가 있었어.”
천마는 조금 여유를 가졌는지, 다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탈마에 오르는 건, 절대자께서 경계하시는 부분이야. 인간의 영역을 보고 싶은 거지. 인간을 넘어서는 능력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니까.”
“설휘 님은…… 당신들의 잣대로 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크크큭. 그럴까? 지금 그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천미려는 눈살을 찌푸렸다.
“…….”
역시나 이들은 설휘도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들의 첫 목표는 자신이었으니까.
“저게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뒤이어 물러나있던 악비와 초아란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슨 얘기인지, 그들로서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 반복이라니. 절대자의 유희라니.
“그래.”
천마는 주변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혈사궁주와 이들은 모두 저편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너와 꽤 재밌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은 많지 않아 유감이군.”
“싸움에 설휘 님이 들이닥치면 못 이길 것 같아서요? 겁을 집어먹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군요.”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다. 이제는.”
촤아악.
천월성이 손을 흔들자, 세상이 정지하듯 천천히 멎었다.
구음마경.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는 시간 통제의 무공이 발현된 것이다.
“지금으로선, 네 목숨을 가져가는 게 내 임무. 현 세계의 균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