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절세무공 (3)
천미려의 상태를 보고 설휘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늦지 않았다.
저 천마를 상대로 싸워 어느 정도 피해를 보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다.
“천 소저. 왜 이런 무모하…….”
“죄송해요.”
질책을 예상이라도 하듯 그녀는 곧장 사과했다.
설휘는 분명히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천미려 또한 그에 동의했다.
설휘가 없는 동안, 주변에서 난리가 나는 가운데서도 나서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초아란과 악비 두 사람이 자칫 명을 달리할 수 있는 상황이 닥치자, 더는 참지 못하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그것이 전략적인 실책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그간 정이 쌓였다 해도, 초아란과 악비는 극마고수.
두 사람을 잃는 것은 팔이나 다리를 잃는 것이다. 분명히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천미려와 설휘는 각각 심장과 머리다.
팔다리의 손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계를 완성하기 위한 핵심자원이었다.
그 책임감에 그녀가 고개를 깊이 숙이자, 설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좀 어땠습니까?”
“네……?”
“교주랑 싸워본 소감은.”
“…….”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천마와 부딪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이미 부딪힌 이상 더 따져봐야 의미 없다.
그러니 설휘는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확인했다.
운이 따랐건 어쨌건,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었기에 천미려의 생사도 확보했다.
그러니 이제는 천마와 직접 손을 섞어본, 그녀의 경험이 중요한 상황이다.
“음. 예측했던 대로 강했지만, 못 이길 상대도 아니었어요. 다만 한 가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능력이라면 어떤……?”
“교주 저자, 싸움의 과정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듯해요.”
“……?!”
설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져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천마.
그런데 조금 어색하다.
단 한 번에 불과하지만, 일전에 마주했던 그때 천마가 보였던 위세와 위압감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똑같은 이목구비, 똑같은 사람이건만.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설휘가 눈을 찌푸릴 때.
- 칫. 저 녀석, 플레이어다.
“뭐?”
AI의 말에 설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플레이어라니? 여기서 그 절대자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 아니. 그놈 말하는 게 아냐. 다른 놈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절대자급 플레이어가 데리고 온, 새로운 플레이어지. 너와 비견할 만한.
“어떻게 그런……?”
- 글쎄다. 천미려의 개입으로 인해, 인과가 한 번 더 틀어진 게 아닐까. 기존의 교주를 죽이고, 더 강력한 자를 그 자리에 앉힌 거다. 너와 천미려의 합공을 막아내기 위해.
“미친…….”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플레이어라는 놈은, 마교의 하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겨우겨우 탈출구를 찾은 이번 삶에, 갑자기 튀어나온 존재가 교주직을 차지하다니.
“가만, 그렇다면…….”
설휘는 플레이어라는 말에 떠올렸다.
조금 전 천미려가 언급한, 싸움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라는 건?
- 네 생각이 맞아. 아마도 시뮬레이션. 그것도 레벨 3단계까지 올렸을 터.
“……!”
설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뮬레이션. 세상 만물의 변환을 사전에 감지할 수 있는, 싸움에 한해서는 거의 절대라는 말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은 엄청난 공능이다.
그것도 자그마치 레벨 3단계라면…….
- 너처럼 몇 수 뒤가 아닌 수십, 어쩌면 백에 달하는 경우의 수를 다 짚어볼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 백이지, 실제로는 무한한 경우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거기에 시도할 횟수도 무한.
‘……돌겠군.’
설휘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흘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히 같은 탈마급. 경지상으로는 동급의 전력인 천미려를, 저 천마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몰아붙인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이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설휘는 바짝 긴장했다.
시뮬레이션의 공능이 어떤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바로 그였다.
당장 본인이 초절정인 상태에서 극마고수를 쓰러뜨린 적도 있었으니까.
하물며 상대는 이미 탈마.
본인 능력에 따라 세상의 대지만물의 흐름까지 바꿔버릴 수 있는 존재다.
말 그대로 호랑이의 등에 날개를 단 격.
저런 자가 시뮬레이션의 능력을 발휘할 때, 그걸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항상 그래왔다. 시스템 안에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면, 결국 예상된 일로 균형을 맞추는 거지. 천미려의 개입이 결코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조율. 그건 어느 때나 있어 왔다.
AI 사유강은, 자신의 때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때 그가 손을 잡은 인물은 천미려처럼 고강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게 차이.
그렇다 보니 그의 미래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지금 와서야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라는 식으로 하고 있지만, 내심 가장 크게 탄식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AI 자신이었다.
저벅저벅.
긴장하며 궁리를 하는 동안, 갑자기 천마가 허공을 밟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플레이어와 인과율 밖에 있던 인물이라……. 좀 놀랍긴 하나, 대충 너희들의 파악은 끝났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만만함이 담겨 있었고, 설휘는 그 자신감의 근거를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상대를 파악할 시간은 자신과 천미려만 가진 것이 아니다.
저 플레이어. 천마의 탈을 쓴 인물은, 자신들이 대화하는 동안 이미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을 터.
“쉽게 말하는군. 그래, 그럼…….”
하지만 설휘는 그런 걸로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
상대가 예상 못 한 수를 들고 나왔지만, 자신에게도 상대가 예상 못 할 만한 수는 몇 개나 있다.
“후우…….”
그중 하나. 천미려가 급하게 운기조식을 끝내고 몸을 추슬렀고, 설휘는 다가오는 천마를 보며 말했다.
“어디 네 뜻대로 될 것인지. 보여봐.”
***
사아아아아-
벌의 고정된 날갯짓과 꽃가루를 밀어내는 나비의 휘우듬한 움직임.
사물의 정지는 주역(周易)에서는 멈춤, 머무름의 도라 말하며 이를 중산간괘(重山艮卦)에 비유하고 있다.
멈출 때 멈추고 움직일 때 움직이는 것을 아는 것.
주역의 궁극적인 목표인 피흉취길(避凶就吉). 흉을 피하고 길을 취하는 것은 무학도 다르지 않다.
즈으윽.
사물의 정지 속에서 설휘는 백발마공을 함께 사용했다.
이 무공은 본래 단순히 신체능력의 향상을 가져오지만, 구음마경과 함께 사용할 경우, 시간가속 능력을 훨씬 더 증폭시킬 수 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단순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기둥으로 다리를 지탱하는 것처럼.
찌이이익!
몸에 걸리는 부하. 모든 사물이 정지한 상황에서 홀로 움직이는 설휘의 몸에서 끔찍한 기음이 일었다.
하나 그는 버텨내고 천마를 향해 움직였다.
스르륵.
반응이 있다.
상대 역시 밀도 높은 시간의 정지를 극복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흐름보다는 반 박자 느렸고.
설휘는 그걸 이용했다.
- 지금!
상대가 급히 퇴각하는 지점을 포착.
주먹을 휘둘렀다.
쩡! 꽈르릉!
선택한 것은 뇌전의 힘.
시간이 정지된 흐름 속에서도 뇌전의 속도는 기대를 충족시켰다. 굉음과 더불어 수십 줄기의 뇌전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나갔다.
따당! 땅! 땅!
“크윽!”
그리고 그 벼락에 교주가 맞자마자, 시간의 흐름이 풀렸고. 동시에.
콰우우우우!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의 폭풍이 교주를 단숨에 쓸어버렸다.
쿠아아아아----앙!
상대는 피하지 못했다. 천월성은 설휘의 일격을 받고 저편으로 사라지다시피 했다.
핑그르르.
품에 소지하고 있었던 녹슨 검 하나만 설휘 옆으로 떨어졌다.
“좋아. 끝내버려야…… 어?”
그 모습에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려고 달려나가려던 설휘. 그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확!
낡고 녹슨 검. 그냥저냥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검이 환하게 빛을 발하더니, 갑자기 천월성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절대극마공의 힘 때문인지, 몸통을 기준으로 오른쪽 사분지 일이 잘려나간 채로.
“이 무슨……?”
“하압!”
교주의 머리 위로 순식간에 생성된 수십의 핏빛 잔영.
이기어검과 잔살혈영공을 또다시 동시에 펼친 것이다. 천미려를 향해.
“흥!”
패액!
천미려 역시 이전과 같은 대응을 했다.
현경비공에다 빙공의 검을 더해 상대하려 한 것이다.
따다다당!
역시나 둘의 검은 공중에서 서로를 상쇄했고. 그사이 달려든 천월성의 일격 역시.
“빙백월(氷白月).”
제대로 받아쳤다. 아니, 그랬다고 믿었다.
휘익!
“……핫?”
천미려는 손끝에 허전함을 느꼈다.
상대의 일격은 자신에게 뿌려진 것이 아니었다.
천미려의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면서 교주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였다.
“……!”
“……!”
그리고 그녀를 스쳐가 두 노인 앞에 선 천마. 천월성.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이들이었다.
“시뮬레이션이 그러더군. 여기서는…….”
“……?”
“인간의 감정을 뒤흔들라고.”
쇅!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검을 휘둘렀고, 그리고 두 노인의 목이 뚝 하고 떨어졌다.
초아란. 악비.
두 사람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다.
“저게 무슨…….”
그 모습에 설휘는 당황해했다.
분명 일격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천마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뿐만 아니라, 방금 떨어진 녹슨 검. 그게 본인으로 변신하는 기괴한 모습까지 보였다.
- 조심해. 저 녀석. 이제 보니 그냥 플레이어가 아니다.
갑작스레 경고하는 AI에게 설휘는 반문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 방금 저 검은, 권능을 가진 환영입인검(幻影入人劍)이야. 적어도 수백 번의 환생을 경험한 플레이어다.
AI는 여기서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설휘가 곤마의 휘하에서 얻었던 여러 아이템처럼.
저 검 또한 특별한 공능을 발휘하는 신병이기라고.
손에 넣는 방법은 극악하다.
설휘가 여러 번 거절한 일제자의 휘하로 들어가, 여러 가지 난도 높은 임무를 달성하고 난 다음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다만 그렇게 손에 넣기 어려운 검인만큼, 그 능력은 절대적.
“그러니까…… 환영입인검. 저 검이 놓인 곳으로 한순간에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거야?”
- 그래. 그리고 또 하나…….
듣고 보니 이형환위나, 천마군림보를 또 한 번 시전할 수 있는 규격 외급 신병이기라는 것이다.
설휘가 바라보는 시선에 이미 죽어버린 두 노인. 그들을 보며 AI는 말을 이었다.
- 그의 몸 자체도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아마도 금강불괴보다 더 강한 육신. 그리고 내공을 가지기 위해 기기아대의 실혼인 관련 주술을 익힌 듯해.
“인간의 것이 아니라니……. 이런 개 같은!”
설휘의 눈빛에 어느새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초아란과 악비.
이 둘은 단순히 전력상의 극마고수가 아니다.
한때 자신의 사부라 할 수 있는 연을 맺은 이들이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 분노는 일을 망친다. 마음은 알겠지만 감정을 추슬러야 해…….
“알고 있어.”
으드득!
설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탈마에 오른 고수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것을. 그런데 이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무학이 아닌, 쓸데없는. 어쩌면 수많은 무학을 배움을 넘어.
상상 이상의 보검을 가지고.
거기다 시뮬레이션이라는 능력까지 사용하는.
확실히 까다로우면서도 쉽지 않은 상대임을 인정해야 했다.
- 야. 막아! 얼른 막아!
그렇게 피나도록 이를 악무는 설휘였지만, 한 여인은 그렇지 못했다.
그우우웅!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두 노인의 죽음을 보고, 천미려가 모든 내력을 개방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러다가 괜히 둘 다 휘말려 죽어!!!
AI의 염려대로였다.
천미려의 눈빛은 완전히 분노로 뒤집혀 있었다. 전신의 잠력까지 단번에 끌어낸 천미려는.
“죽어---!”
은빛 화살이 되어, 천월성에게 쇄도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