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부탁 (1)
무인이 내공을 쌓는 법.
그 첫 시작은 양생기공이었다.
체질에 맞는 심법을 구해, 꾸준한 운기행공과 명상을 하는 것.
몸에 기를 쌓은 일반인들은 먼저 건강을 얻어 병을 물리치고, 노화를 예방하여 장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한편, 충만한 기로 타고난 신력 이상을 발휘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니, 무인들은 이에 주목했다.
특별한 내공 심법을 통한, 더욱 농밀한 기.
보통 하루하루 꾸준한 수련을 했다는 가정하에, 60년 정도 지속하면 흔히 말하는 일 갑자(一甲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몇 가지 방식을 통해 더 빠르게 기를 축적할 수 있다.
검리를 깨우치거나, 무학의 오의를 깨닫거나.
또는 특정한 혈자리를 뚫어 기의 순환을 더 원활히 한다거나.
이런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고, 거기에 타고난 재능까지 있게 되면, 불과 20년이 되기 전에도 일 갑자의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된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내공의 최대치는 몇 갑자일까?
동방삭이라는 인물이 자그마치 삼천 갑자를 쌓았다 하나, 이는 너무 허황된 전설로 그칠 뿐.
그나마 유사 이래 교차 검증이 가능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4갑자까지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원영신(元孀身).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을 모두 타통하여 원신을 완성한 경지(境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탈마는 대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것일까?
탈마의 3단계. 초신에 오르면 인간이 채울 수 있는 64갑자가 아닌, 자연의 무한한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정파의 자연경이라 부르는 지고한 경지와 같으며, 과거 AI가 올랐던 경지임과 동시에 지금 천월성이 도달한 경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천마군림보로 숨어봤자…….”
사방으로 뻗어나간 수많은 환영. 탈마에 오른 채로 펼쳐진 천마군림보는, 열세 개의 환영을 실체나 다름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에 천월성이 대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솨아아아---
천마가 내민 손에서 뻗어나간 기류는, 순식간에 핏빛의 잔영으로 변했다.
마치 불가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천수관음처럼, 수도 없이 많이 형성된 손 그림자들이 설휘를 향해 핏빛의 해일을 만들며 덮어버린 것이다.
쉭. 쉬이익. 쉭.
천마군림보를 통해 생성된 환영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핏빛의 손 그림자가 지나가고 남은 것은,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살아남은 환영 넷이 전부인 형국이었다.
“……어?”
그들도 단숨에 지워버리려고 어검술을 펼치려다 천월성이 약간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이유는 바로 기운.
자신의 주변을 흐르며 지나가는 자연의 기류가 거짓말처럼 희박해지며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대체…….’
그는 그 원인을 곧 알 수 있었다.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손바닥을 펼친 설휘가, 천월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자연의 기가 희박하게 줄어버렸고, 천월성이 생성한 핏빛의 잔영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 그따위 잡스런 방법이 통할 것 같냐?!”
가장 효율적이고 무한한 내공을 담보하던, 자연의 기를 쓰는 수법이 막혔다.
하지만 천마 역시 탈마의 무위를 마작판에서 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간 육신에 쌓아둔 내공을 증폭시켜 일제히 끌어내었다.
콰아아악!
그렇게 광대하게 퍼지는 기운. 하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설휘가 손을 흔들었다.
“건곤대나이!”
“……?!”
화우우웅!
천마가 끌어모았던 본신의 강대한 힘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방향을 잃고 분산된 진기는, 주변에 흩어진 자연지기와 맞부딪혀 상쇄되었고.
콰쾅! 따다다다당!
뇌성과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수없이 일어남과 동시에, 설휘의 내가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압!”
“이익!”
꽈---드등!
절대극마공이었다.
천월성의 내가진기는 사방으로 흩어진 데 반해, 설휘의 것은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뇌전이 천월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따당! 땅! 땅!
뇌명이 서너 번, 동시에 터져 나왔다. 간신히 막아 내느라 손발이 어지러워진 천월성. 그런 그의 틈을 노려서.
콰악!
다시 달려든 설휘. 그는 천월성의 당혹스런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
“붙잡았다. 겨우.”
“……!”
“어디,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
구우우웅!
설휘의 온몸에서 진공의 폭풍이 일었다.
흡성대법.
마교 최악 최강의 내공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이걸로 대결하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누구일지 끝장을 보자는 투였다.
***
“…….”
천미려의 눈빛은 아련하게 변해 있었다.
그르륵. 그륵.
뭐라고 말하려는 두 노인. 그들의 목은 제멋대로 꺾여 있었으며,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미 죽은 자가 움직이는 기괴한 모습은 천미려에겐 그저 구슬픔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오랜 시간만큼이나.
“죽어어어!”
“…….”
차분하게 서있던 그녀를 노린 건, 죽은 악비였다.
뒤쪽에서 조심히 접근하던 그는, 일순간 거의 인간의 속도를 뛰어넘은 움직임으로 천미려의 목을 쥐었다.
“키킥!”
그 일격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앙상하게 마른 손마디가 그녀의 목을 졸랐으니까.
“크아아!”
다음으로 그 모습을 본 초아란이 덤벼들어 목을 졸랐다.
콰직 콱.
앞뒤에서 정확히 목을 조르는 두 명의 괴인.
그들은 죽음에서 살려낸 천월성의 보조를 받아, 이전보다 더 월등한 힘을 얻은 상태로 폭주하고 있었다.
“끅.”
그렇게 둘은 천미려의 목을 조르며, 죽음을 앞에 둔 창백한 여인을 보며 웃고 있었다.
솨아아.
그때쯤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천미려의 하얀 손이 슬쩍 쓸듯 지나가고.
흐릿한 안개 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희미한 형체가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편히 죽고 싶어요.]
[저희들을 빨리 보내주십시오.]
마교의 마공은 단순히 무공만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정파에서는 사도라 불리며 배척받은 무공.
그중 혈교, 사교, 배화교 등 영혼과 술법을 다루는 무공이, 같은 교단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경우가 많았다.
그중 색혼탈백신공(色魂奪魄神功).
이는 본디 동물이나 죽은 지 오래된, 자아가 약한 혼백을 지배하는 주술에 가까운 무공이었으되, 마안을 통해 혼과 접촉하여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도르륵.
무공이라기보다 섭혼술에 가까운 공능. 그것으로 죽은 두 사람의 마음을 읽은 천미려의 뺨에는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한빙기공의 전승자들.
오랜 시간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무공의 계열이 비슷하다고 함께해 준 이들.
처음에는 도움을 베풀었다.
이미 경계를 넘어선 천미려로서는, 겨우 극마에 달한 어린 은거고수들이 우습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서푼짜리 측은지심으로 내준 도움을 그들은 평생에 걸쳐 은혜로 생각하고, 천미려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나섰다.
과분한 보답이었다.
실은 영구빙벽이라는 외로운 음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천미려로서도, 그들의 따스한 온기에 큰 도움을 받았으므로.
사람인 이상,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그저 외로움을 달래고, 고독함을 나누는, 그 정도만으로도 천미려는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죽어서 보내는 간청에, 그녀는 짧게 응답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스륵.
대답과 함께 손바닥을 한 번 더 쓸어 보냈다.
더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지금 빨리 끝내지 않으면, 이 연약한 혼백들은 천월성에게 이용되어 나중에 더 큰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나마 설휘와 드잡이하느라, 천월성의 간섭이 약해지고, 이들과 먼저 대면할 수 있게 된 걸 감사하게 여겼다.
쏴아아아아--
“……!”
“……!”
천미려의 휘두르는 손이 한 번 더 움직이자, 그녀의 목을 조르던 초아란과 악비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로 천미려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들 머리 위에 미세한 선으로 이어진 공령(空靈)의 선이.
천미려 위에도 생긴 것이다.
그랬다.
천미려는 공령의 선을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이었고, 그로 인해 적아의 구분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다행히…….’
그에 또 다른 선 하나가 연결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설휘와 함께 있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나, 그와 함께 부둥켜 있었다.
“편히 잠들길…….”
그리고 그때, 그녀의 손에서 신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마안섭혼공(魔眼攝魂功).
이 또한 무공이라기보다, 본래는 강한 최면을 통하여 혼백을 조정하는 사술에 가까웠다.
그녀는 두 노인, 초아란과 악비에게 최면을 건 뒤 그대로 강제적으로 혼을 격발시켰다.
그 순간.
퍽! 퍽! 퍽!
그들에게 연결된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미 죽음을 맞았던 두 노인은 그대로 끈이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벌러덩 뒤로 자지러졌다.
“……아.”
천천히 초아란의 몸을 받아든 천미려.
그 무게는 너무 가벼웠다.
마치 모든 것을 버리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언제고 또 만나자꾸나.”
쾅!
손바닥으로 구덩이를 판 천미려.
그녀는 초아란을 천천히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악비 역시 옆에 놓아두었다.
이제 혼백을 결박했으니 더는 누군가의 조작으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강시든 실혼인이든.
콱! 쩌어엉! 쩌어어엉!
다시금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치열하게 싸우는 현장이 있었다.
“만능의 능력을 가진 교주. 하지만 그를 없애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아.”
천미려는 싸움 중에 있는 설휘를 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이제, 작별을 고해야겠구나.”
***
“씨발. 진짜 형편없네!”
설휘의 집요한 공세를 뿌리친, 천월성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흡성대법 같은 지저분한 무공으로 달려드는 게 짜증 난 것이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상대의 능력은 이미 시뮬레이션으로 면밀히 파악했으니까.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잠깐 시간을 끈 뒤, 다시 회수하려던 극마고수의 실혼인. 공령지체의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년부터 죽여야 해.’
분명 시뮬레이션으로도 몇 번이고 돌렸음에도 파악하지 못했던 변숫값.
설마하니 탈마에 오른 빙공의 고수가, 거의 사장된 고전적인 술법과 실전된 지도 한참된 사술을 사용해 이 공령의 연결을 없앨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애초에 시스템조차 그녀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걸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이 싸움에서 제일 까다로운 존재였다.
“후우, 후우. 어?”
설휘는 전력을 다한 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기척을 느껴 뒤돌아보니, 천미려가 와 있었다.
“소저…… 어찌 됐습니까?”
“편안한 곳으로 갔어요.”
설휘의 물음에, 천미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설휘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천미려의 구슬퍼 보이는 눈빛, 그건 이제껏 저들 간의 유대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함께 힘을 합치면…… 이 사달의 원흉인 저자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럼요.”
천미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태도를 진지하게 바꾸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해괴한 짓거리는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크큭.”
천월성이 웃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 웃음이 평소의 비웃음과는 달랐다.
“크하하하하!”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울분이 느껴질 정도의 웃음 속엔 왠지 모를 선뜩함이 들어 있었다.
“할 수 없구나. 될 수 있으면 이건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렇게 웃던 천월성은 고개를 천천히 내리고는, 충혈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 나로서는 벅찬 상대들이니.”
“설마…….”
그 말을 듣던 순간, 설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 맞아. 그놈을 부르는 거야.
AI가 동조해왔다.
설휘가 떠올린 게 무엇인지 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AI의 말은 설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 놈도 AI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