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부탁 (2)
우드득. 우두두둑!
허공을 밟고 둥둥 떠 있던 천월성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새살이 돋아나며, 다친 상처는 거짓말처럼 치유됐다. 골격은 이전보다 두 배나 커지고, 얼굴의 뼈까지 제멋대로 움직이다 맞춰졌다.
환골탈태.
그의 얼굴과 몸에서 일어난 변화는 마치 전설상의 신체 재구성을 연상케 했다.
스으으윽.
뒤이어 호심공으로 보이는 핏빛 기류가 갑옷처럼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마지막, 천천히 눈가에 피어오르는 동공.
핏빛처럼 붉은 홍채는,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눈을 뜨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덤벼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껏 입힌 부상을 모두 회복하는 과정을 보고 천미려가 물었다.
“아니, 이미 늦었습니다.”
설휘는 고개를 저었다.
구우우우.
설휘는 천마의 몸에서 빛무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예상컨대.
‘기 모으기……로군.’
탈마에 올랐음에도 자신과 같은 특수 기술을 사용한다. 그것도 꽤 능숙하다는 점이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후르륵. 휘릭!
곧 천월성의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그저 다른 사람이었다.
좀 전에 보았던 천월성, 백발이 성성하던 노신선 같던 얼굴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는 검어지고 피부의 주름이 사라졌으며, 콧대는 좀 더 고집스럽게, 눈매는 습관적인 웃음이 깃든 듯한 얼굴.
- 역시. 신야자(辛冶子)였나…….
그렇게 바뀐 얼굴을 본 AI가 중얼거렸다.
설휘는 뭔가 떠오른 것이 있어 물었다.
“너도 아는 자야?”
- 모를 수가 없지. 플레이어가 AI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만 해. 전에 내가 말한 적 있었지? 탈마에 오른 자가 총 세 명이라고.
“어. 으음.”
- 신야자는 그중 나와 같은 탈마의 3단계, 초신에 오른 자다. 하, 망할. 하기야 저놈이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쯧쯧…….
“이봐. 혼자만 납득하지 말고 나한테도 설명을 좀 해 줘. 그럼 뭐야? 이제껏 본래의 마교주를…… 죽인 플레이어를 뒤에서 도운 게 저자라는 거?”
- 요약하면 그렇게 되는군. 맞다. 마치 너와 나의 관계처럼. 저놈이 꼬붕을 가르쳐서 탈마까지 오르게 한 모양이야.
설휘는 잠시 침음했다.
사유강의 말이 제멋대로라서 알아먹는 데 잠시 애를 먹었지만, 두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하나는 과거 사유강급의 탈마가 셋이나 있었다고.
그리고 그중 하나의 제자가 이제까지 상대한 ‘가짜 천마’이고, 지금 그놈의 스승격인 존재가 나와서 그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
“허면,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기존의 천월성과 비교해서.”
- 비교가 될까? 경지는 고작 탈마의 2단계 기신에서 3단계 초신으로 오른 것뿐이지만…….
AI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수준 차이는 압도적일 거다. 대략 열 배쯤 강해졌다고 보면 돼.
‘이런 미친!’
설휘는 어이가 없어 욕이 튀어나왔다.
이전에 보인 천월성의 무위도 상식을 벗어난 엄청난 공격들이었다.
심지어 시뮬레이션을 사용해서 공수의 방향을 미리 예측하고 차단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동급이던 자신과 천미려조차 상대하는 데 애를 먹었었다.
그걸 이제야 파훼하고 좀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더 끔찍한 괴물로 거듭났다고?
- 정신 차려. 온다!
“……!”
어질어질한 정신을 퍼뜩 차려보니 눈앞의 천월성, 아니 신야자라 불린 천마의 손에는 이미 녹슨 검이 들려 있었다.
스윽.
그는 그걸 천천히 들어 올렸고, 천미려를 향해 겨눴다.
그리고 꾸득, 가볍게 힘을 준 순간.
빠그드득! 쫘아아아-!
검날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깨지고, 그 파편이 천미려에게 그대로 날아들었다.
“웃!”
수십, 수백 개로 깨진 검의 파편.
다행히도 십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뿌려낸 파검기(破劍氣) 정도로는 천미려의 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한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슈슈슈슉. 바바바밧.
스스로 깨져나가 쏘아진 검의 파편들. 그 하나하나가 죄다 새로운 천마, 신야자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모두 환영이 아닌 실체로.
“뭣……!”
그 기함할 모습에 천미려도, 지켜보던 설휘도 헛숨을 들이켰다.
콰콰쾅!
수백의 천월성이 희미한 빛무리를 동반한 장법을 휘갈겼다.
천미려는 급히 두 팔을 휘둘렀지만, 그녀의 호심공은 너무도 쉽게 깨졌고 체외의 빙막까지도 삽시간에 부서졌다.
퍼억.
“아아악!”
뒤이어 쾌속의 장력 하나가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고, 천미려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땅을 뒹굴었다.
“천 소저!”
파앗! 삭.
설휘가 급히 몸을 날렸지만 그 동선을 새로운 천마, AI 신야자라는 자가 막아섰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말라고. 별 볼 일 없어 보여서 굳이 죽이진 않았으니까. 나는 저년보다 너에게 더 관심이 있다.”
“……이 새끼가!”
- 멈춰, 설휘! 함부로 공격하지 마!
멈칫!
사유강의 경고에 막 달려들려던 설휘가 몸을 굳혔다.
쫘라라라-
그러고는 일어나는 기현상. 모습이 바뀐 천마의 손끝에서, 깨진 검이 천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타라락. 까라라락.
“…….”
하나하나가 모래알처럼 작았던 검편. 그것들이 천마가 손에 쥔 손잡이 위로 몰려들었다.
드드드득.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쇳가루와 검편들이 차곡차곡 이어져 달라붙었고, 그러기를 얼마 가지 않아 다시금 원래의 녹슨 검의 모습이 되었다.
‘……이기어검.’
거기에 허공섭물. 아니 애초에 소유자를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시킬 수 있는 신비한 검.
그리고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는 신야자라는 존재.
하나하나 따져보면 전율이 일어날 만큼, 앞선 천마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한, 새로운 천마다.
- 준비하지 않고 싸우면 바로 죽는다.
“음.”
AI의 경고에 설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에 천미려가 실수한 것을 지적했는데, 자신이 그와 똑같은 짓을 할 뻔한 것이다.
“오호.”
설휘가 흥분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이자, 신야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이거 재미있네. 보아하니 너도 AI가 있나 보군.”
“…….”
“누구지, 너의 AI는? 이름이 뭐야?”
뜬금없는 물음. 괜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의 말투에 설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굳이 왜 말을 해야 하나?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 말해줘. 시간을 끌어야 하니까.
“음…….”
하지만 AI의 긴장된 어투에 설휘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사유강이다.”
“사유강? 오! 정말?! 정말이야?! 말로만 듣던 초대 AI분이 아니시냐!!”
답했더니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이는 신야자.
그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는 모습은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차피 넌 나와 싸움이 안 될 테고…… 그분을 불러봐라. 왕년에 꽤 잘 나갔던 양반하고 한번 붙어보고 싶군.”
“…….”
설휘의 눈살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딴에는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거기엔 자신이 상대도 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안하무인한 태도가 깔려 있었기에.
같은 급으로 두지도 않는다는 단정이 심기를 꽤 거슬리게 했다.
‘이봐. 너를 부르는데?’
- …….
설휘가 분을 참고 말을 걸었지만, 웬일인지 AI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설휘가 갸웃하며 돌아보았을 때.
“왜? 하기 싫대?”
신야자는 의아한 표정을 드러내며 물었다.
설휘는 뜸을 들이다 대꾸했다.
“별다른 대답이 없는데?”
“대답이 없다고?”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야자.
탁.
그는 그러더니 이내 ‘아!’ 하고 혼자 손뼉을 치며 되물었다.
“야, 너 혹시 AI 레벨을 다 올리지 않았어?”
“무슨……?”
“그거구만. 그래서…… 아직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있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됐고. 알겠으니까.”
신야자는 천천히 검을 세웠다. 그러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내가 해결하지. 네 AI가 어쨌든 튀어나올 수밖에 없도록…….”
“…….”
“반쯤 죽여줄게.”
***
솨아아아----
먼저 움직인 것은 설휘였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
구음마경을 발동하여 시간의 멈춤을 일으켰고, 그 범위를 신야자 바로 앞까지 한정을 지었다. 시차(時差)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흔들려는 생각이었다.
피이이이-
순식간에 그의 지척까지 당도한 설휘는 바로 일격을 펼쳤다.
절대극마공.
발동되는 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진 마공. 그리고 그 시작의 알리는 뇌전이 그대로 신야자를 향해 쏘아졌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씨릿!
말 그대로 벼락처럼 쏘아져 나간 공격은, 마지막 순간 방향을 비틀었다. 상대의 얼굴을 아슬하게 비껴나간 것이다.
“공간이……?”
설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특별히 가로막은 기류가 없었는데도 그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어, 조금 비틀었어. 그래서 못 맞춘 거야.”
신야자의 말에 설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공간을 비틀어서 힘을 흘리다니. 이런 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뭐. 너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을걸? 무형지기로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가능해. 물론 수련 과정은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투욱.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한 발짝 내디뎠고,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솨악!
삼 장이나 떨어져 있던 거리가 한 걸음만으로 단번에 좁혀진 것이다.
“……!”
“이건 공간을 왜곡한 거고.”
콱!
신야자는 그대로 설휘의 복부에 검을 쑤셔 박았다.
하나, 그것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오호.”
천천히 설휘의 몸이 사라져갔고, 그와 함께 저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썼군. 천마군림보를 미리 펼쳐 목숨을 보전하다니……. 으흠.”
신야자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휘는 생각했다.
‘한계가 있을 터. 아무리 초신의 경지라도, 무형지기를 광범위하게 장시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효율이 좋은 자연의 기를 바탕으로 펼친다 해도, 한정된 공간 안에 스며있는 기(氣) 또한 한정적일 터.
계속해서 기류를 덮을 순 없다. 그건 분명하다.
“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네.”
설휘가 수세를 갖추자, 신야자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전에 죽는다니까?”
그는 가볍게 좌로 반 보, 앞으로 여섯 보 걸었다.
그 순간.
슈슉!
설휘의 코앞에 나타났고. 준비 동작조차 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윽……!”
사사사삭! 쇄액! 쾅!
설휘는 정신없이 피했다.
하지만 바로 옆. 뒤,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의 검날은 막아내기에도, 피하기에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동안 수많은 상처를 낸 신야자는.
촤아아악! 쩌엉!
긴 선을 그리며 설휘의 어깻죽지부터 허벅지까지 베어냈다.
“크악!”
설휘는 뒤로 날아가며 바닥을 굴렀다.
츠즈즉.
그사이 특수 기술을 이용하여 빠르게 몸을 회복시켰는데, 한번 벌어진 상처는 쉽게 오므라들지 않았다.
아마도 저 검의 능력 중 하나일 듯했다.
“크으으…….”
굴욕적이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분명히 신야자도 같은 탈마의 경지에 고작 단 한계의 벽을 뚫었을 뿐인데, 이건 뭐 극마와 탈마의 사이보다 더 격차가 큰 듯 보였다.
뿐만 아니라.
‘공간이동과 왜곡.’
상대는 아직 가진 능력을 모두 발휘한 것도 아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설휘를 암담하게 했다.
- 설휘.
그때. AI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아.
‘걱정 마. 아직 버틸 수 있으니까. 곤마가 오기까지 버티면…….’
- 곤마는 훨씬 더 늦어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설휘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 저놈이 무형지기를 광범위하게 펼친 건 공격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 자리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더 커. 곤마가 천살성의 힘을 써서 적을 척살한다 해도, 우리가 싸우는 이곳을 탐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젠장…….’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녀석은 보통이 아니었다. 한 수. 한 수가 다음을 내다보고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 후……. 사실 네가 탈마에 오르고 나서, 내가 나서기 위해선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했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야.
‘그건 그렇지…….’
- 하지만 방법은 있어. 신야자도 그걸 알고 저렇게 나오는 거고.
설휘는 AI의 말을 기다렸다.
- 우선 내가 네 정신과 육신을 강제로 제압하는 것. 이럴 경우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뭔데?’
- 하나는 내가 영원히 너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거야. 탈마라는 드높은 경지는 육신에 다시금 주인을 불러들일 터. 쉽게 말해 날 밀어내는 거고, 연결점을 잃은 나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 같은 이유로, 마신. 절대자 플레이어와 싸울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해. 그럼 방법은 하나뿐. 곤마가 모든 힘을 스스로 끌어내어, 그와 싸우는 걸로 유도해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거지.
“…….”
- 그래도 할래? 제한된 시간이 적다고 해도, 저 녀석에겐 지지 않을 거다.
“…….”
설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앞날, 더 큰 적을 위해 남겨둬야 할 수를 여기서 꺼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이년이.”
그때였다.
우드드득!
갑자기 튀어나온 천미려. 그녀가 빙월의 힘을 사용해 신야자의 온몸을 얼려버렸다.
“상공! 어서!”
갑작스런 기습이 통한 것이다. 그 모습에 설휘는 눈이 바빠졌다.
상대가 순간적으로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크크크크.”
신야자가 웃으면서 천미려에게 시선을 돌렸다.
표적이 설휘에게서 그녀에게로 바뀌는 것뿐.
“하겠다.”
설휘는 결정했다. 지금으로선, 아니 자신으로선 저 녀석을 이길 수 없음은 자명하니까. 그렇기에 지금 그는.
“내 눈앞에서 저놈 좀 치워줘.”
아마도 AI에게 건넬 마지막 부탁임을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