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부탁 (3)
우우웅.
설휘는 일시적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는 현상을 겪었다.
쑤욱! 화악!
이후 뭔가 뒤로 밀려 나가고, 다시금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쯤에 깨달았다.
과거의 AI제처럼 자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해 주위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을.
다만, AI 사유강이 설휘 자신의 몸을 대신 움직인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쩌저저적!
때마침 빙월의 얼음벽이 부서졌고, 천미려를 향해 기공을 쏘아내는 신야자의 검을 보았다.
‘거리가…….’
척 봐도 상대를 제지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사유강의 움직임보다, 신야자의 검이 월등히 빨랐으니까.
그때였다.
빠직!
일순, 사유강의 검 끝에서 뇌전의 힘이 쏟아졌다.
사전에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음에도 발현된 절대극마공.
그 힘은 순식간에 뻗어나갔고, 노리는 방향은 바로 신야자 쪽이었다.
‘이토록 빠른 절대극마공이라면!’
정확한 판단이라고 설휘는 생각했다.
어차피 이미 쏘아져 나간 공력을 다른 공력으로 요격하여 상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천미려를 향해 공격을 한 신야자, 그를 먼저 타격하면 죽고 싶지 않은 이상 쏘아낸 힘을 거둬들여 방어로 돌릴 수밖에 없을 터.
절대극마공은 그만큼 피하기에 너무 빨랐고, 막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라 예상했다.
‘어?’
그런데 신야자는 힘을 거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유강이 펼친 절대극마공을 분명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술수를 펼친 것이다.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스스슥.
신야자가 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휘릭 손짓을 하자, 거짓말처럼 허공에 물결치는 아지랑이가 그의 옆으로 툭 하고 튀어나왔다.
‘아!’
설휘는 침음했다.
공간 왜곡. 상대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수였다.
뇌전의 번쩍임은 그에 휘말려 제멋대로 방향을 틀었다.
처억.
그 순간 사유강을 통해 또다시 놀라운 장면을 목도했다.
검을 들지 않은 손을 위로 올리는 사유강.
그 손짓에 따라 뇌전의 힘이 사방으로 갈라졌고, 그중 하나가 신야자가 쏘아낸 기공과 맞닿았다.
쏴아아아--- 쿠와아아앙!
그 순간, 천미려의 앞에서 폭발이 일었다.
그녀의 호심공을 무려 두 단계나 뚫어낸 신야자의 힘을, 사유강 자신이 본연의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격공섭류를 쓴 것 같은데…….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설휘는 처음 보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절대극마공을 내지르고, 나아가 그 기운을 다시 제멋대로 바꾼다?
한번 쏘아낸 화살의 방향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하나 검의 영역에서는 가능한 기예가 있으니, 바로 이기어검.
그것도 특정 무공에 합쳐진 어검술(馭劍術) 때문에, 공격당한 것은 오히려 신야자 쪽이었다.
츠츠측.
“어이구…….”
하지만 역시나 초신에 오른 자라고 할까.
신야자는 대부분의 힘을 공간 왜곡으로 날려버렸다.
물론 완전히 흘려내지는 못했던 것인지. 얼굴에 긴 생채기가 나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그걸 본 그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주르륵.
“확실히…… 최고의 점수로 AI가 된 선배다우십니다.”
할짝.
신야자는 입가로 흐르는 피를, 혀를 내밀어 핥으며 말했다.
탈마에 달한 고수가 두세 가지의 절세무공을 섞어 쓰는 것은, 그럭저럭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 한 무공을 펼친 것을, 자력으로 분산시키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은 그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번 경험으로 자신도 여러 번 시도해 보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개소리 말고. 무슨 의도냐?”
사유강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예?”
“모른 체하지 마. 스스로 이 상황을 만들 정도로 네가 모자란 녀석이 아니란 걸 아니까.”
“…….”
“다시 한번 물으마.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
사유강은 이 싸움이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닌, 의도된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많은 횟수의 AI를 하는 동안에, 이렇게 직접 AI와 대립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상황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 맞았다.
“끌끌끌.”
그 말에 신야자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표정이 굳어졌고, 이내 살기가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보고 싶으셨을 겁니다.”
“……?”
“그분께선 우리가 AI가 된 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개소리 집어치워. 그건 그 녀석이 애초에 설계를 그리한 것이 아니더냐. 놈이 원하는 게 그게 아니냐고!”
“일개 무인에 불과한 제가 그분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뭐 어쨌든, 그분께서는 그런 마음이 드셨나 봅니다. 특히 우리 둘은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으니, 한번 붙여보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가 말이지요.”
빠뜩.
사유강은 이를 갈았다.
절대자 플레이어. 찢어 죽여도 모자란 녀석이다.
사유강은 이제껏…… 정말로 수많은 삶을 갈아 넣으며 도전해왔다.
셀 수 없는 많은 도전 끝에 종국에는 AI가 되어서라도 어떻게든 놈을 이기고 싶었다.
그 와중에 가망이 없는, 재능이 없는 수많은 플레이어를 보며 겪었던 좌절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걸 간신히 뚫고 여기까지 왔는데…… AI끼리 싸움을 붙이겠다니, 그게 재밌겠다니. 고작 그런 이유라고?
츠츠츠.
분노한 사유강 주변으로 기운이 서서히 주위를 맴돈다. 자연의 기를 사용할 때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발밑부터 단전 아래까지 기류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 성격은 뇌기.
뇌전은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이다. 또한 직감적으로 분노와 위엄의 상징이기도 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사유강의 분노가, 자연의 벼락으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싸우면 이길 수는 있을 것 같냐.”
“잊으셨습니까? 통합 점수는 제가 사유강 님보다 더 높다는 걸요.”
“통합 점수……. 흥, 아직까지 시스템이 정해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더냐.”
“그건 사유강 님도 마찬가지지 않으십니까?”
츠츠으--
이번엔 신야자의 몸 주위로도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휘가 보기에 사유강이 일으키는 기류와는 뭔가 달라보였다.
이쪽이 하체를 감쌌다면, 신야자는 가슴 아래 정도에 띠를 형성하는 무언가가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요?”
“…….”
신야자는 비릿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부족한 AI 레벨을 뚫고, 강제적으로 나타나서 그런지…… 그쪽 플레이어의 몸, 아직 초신에 오르지 못한 듯 보이는군요. 그래서야…….”
“……!”
사아아-
신야자가 한 발짝 딛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짓말처럼 그가 사유강 눈앞에 나타났다.
“제 상대가 되겠습니까?”
쿠와아앙!
첫 수는 아주 간단한 권장법. 찌르기였다.
하지만 그 일격에는 폭풍보다 더한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여력만으로도 집 십여 채가 꺼질 정도의 파괴력을 동반했다.
파밧!
신야자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이번 일격에 맞추지 못한 걸 안 것이다.
“오호. 반사 신경만큼은 좋은데요?”
간신히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유강.
그 얼굴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공간의 왜곡이라면, 무형지기를 퍼트린 공간 밖으로 나가면 되는 게 아닌가…….’
설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이 그의 것이라면, 밀어내거나 영향 밖으로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무엇보다, 그런 소동이 일어나야 곤마가 여기 자신들의 위치를 알고 달려올 수 있으니까.
쩌억! 쾅! 쾅!
하지만, 그때부터였을까.
설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가늠하는 게 벅차 오기 시작했다.
흐려지고 부딪치고, 번쩍이며 도망치는 것들이 반복되었다.
상황을 머리로 생각하기에 앞서, 당장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어려웠다.
쾅! 쾅! 쾅!
- 컥!
그러다가 연속으로 삼격.
설휘는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고통으로 인해 상대와 자신의 신체적인 격차를 깨달았다.
이건 압도적이다. 반격은 생각도 할 수 없고, 그저 막고 버티는 것만 해도 힘들다는 걸.
“이거 상대도 되지 않는구만! 그분께서 보면 노하시겠는걸!”
껄껄껄껄.
주르륵.
입가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 역시 흔들리며 흐려진다. 큰 내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현상.
후욱. 훅.
억지로 호흡을 고르며, 간신히 사유강이 중얼거렸다.
“……약점…… 알겠냐?”
사유강의 말에 설휘는 귀를 의심했다.
- 약점이라니?
“멍청한……. 지금 보이지 않느냐…….”
사유강의 시선이 돌아가고, 그에 설휘 역시 겨우 인식한다.
어긋나있는 공간들. 격자무늬로 퍼진 공간에 있는 일부 일그러져 있는 공간들.
저기 무슨 의미가 있고, 어떤 의도로 배치가 되었다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사유강이 쿨럭 기침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의 말대로 네 몸은 아직 초신에 이르지 못했어. 초신에 오르면 자연의 기를 몸에 가둘 수 있게 되거든.”
- ……!
“그리되면 스스로 흡수할 수 있는 힘, 무형지기를 발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즉, 중단전의 소우주(小宇宙)가 완성되는 것이다.”
설휘는 그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유강은 자신에게 뭔가를 알리고 싶어 했다.
중단전의 소우주?
기신에 올랐을 때 자신은 하단전의 소우주화를 이뤘다. 그렇다면 녀석은 중단전의 소우주화까지 이뤘다는 말인가.
“초신에 오르면 이렇게 자연의 기를 원하는 만큼 몸에 담아두는 게 가능해지지. 하여 저런 식으로 무형지기를 발산해 공간을 통제한다.”
-음.
“일견, 무적에 가까운 효과를 보이나, 실은 그것이 가장 우둔한 수다. 왜냐하면 중심이 무너지면…… 일순 몸에 담긴 자연의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되면 공간 왜곡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
- 공간을 완전히 제어해도 빈틈은 존재한다는 거군.
“맞아. 우린 저 녀석이 펼치는 공간을 부술 것이다. 그것이 그의 강점이자 가장 약점이 될 터.”
등껍질이 딱딱한 거북이를, 한도 끝도 없이 때려 그 등갑을 부숴버리게 되면.
등갑은 더 이상 방어의 강점이 되지 않는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약점이 되고 타격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다.
- ……그럼 그 중심을 어떻게 찾지?
“감으로 부딪쳐봐야지. 죽기 전까지.”
- …….
설휘는 사유강의 얘길 듣고 깨달았다.
이 녀석. 쉽게 초신이 된 게 아니다.
도무지 불가능한 것. 절대의 강격도, 완벽한 방어도. 이런 식으로 부딪치면서 깨닫고 나아갔던 것이다.
지금 신체적으로 경지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는데도, 거기에 주눅 들지 않고, 그 점을 파훼하는 방법을 찾아내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 ……좋아. 도중에 죽어도 원망하지 않을게.
설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이 정도까지 싸울 수 있음에 그는 진심으로 사유강에게 감사했다.
이 이상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일.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리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유강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힐끗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이겨. 저따위 녀석에 질 거였으면…….”
타악!
그는 짧은 말을 끝으로 달려나갔다.
“내 마지막 선택을 AI로 정하지 않았어!”
구르르릉.
온몸에 피어오르는 절대극마공에서 뇌성벽력의 격발음이 일어났다.
다시 한번 전면으로 부딪칠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