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부탁 (4)
촤아아아.
달려간 사유강의 첫 선택은 역시 천마군림보였다.
상대가 통제하는 공간의 범위는 백 장 정도.
무슨 힘을 어떻게 쓰는지 파악하기 위해 최고 수준의 경신법을 펼쳐 보인 것이다.
“흥!”
당연하게도 신야자는 그걸 지켜만 보지 않았다.
무형지기로 통제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자신의 절대영역.
안으로 들어온 자에겐 당연히 그 죗값을 받아내야 했다.
츠으으으.
지옥불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라면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불이, 격자 모양으로 퍼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주변 공간을 점유하며 사유강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중심이 어딘지를 찾아야 해.’
사유강이 집중해서 찾는 것은 단 하나.
신야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목표였다.
당장 저 앞에서 재수 없는 웃음을 띠고 있지만, 저게 허상인지 실체인지 눈으로는 절대 파악할 수 없다.
이미 시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결계가 쳐져 있을 테니.
그렇다고 기류의 흐름으로도 파악하기 어렵다.
지금 저놈은 공간을 지배한다고 할까.
어설프게 기류를 연결하는 수준이 아닌, 공간과 공간이 이어지며 신야자의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체득하는 수밖에.’
결국 일일이 접촉해서 깨닫기 전까지는, 이 공간 영역을 완벽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빠르게, 최대한 많은 공간을 점해서 이 공간의 왜곡 구조를 파악해야 했다.
촤아악.
공간을 찔러 들어오는 신야자의 칼날에, 사유강의 환영이 하나둘씩 지워졌다.
퍽! 화르륵!
일부는 그가 불러낸 지옥불에 맞아 소멸하는 환영도 있었다.
“요행은 결국, 화를 부를 뿐.”
환영을 차례차례 하나씩 지워간 신야자는, 마지막 남은 이에게는 직접 다가가 그대로 베었다.
투각. 데구륵.
그에 사유강의 목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다시 흐릿하게 변하고, 신야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건 또 뭐야?”
스스스스슥.
아까보다 더 많은, 수백의 환영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설마 이건…… 환환미종보(幻環迷踪步)?
설휘가 사유강이 펼친 신법이 무언지 읽어냈다.
본래 환환미종보는 청성파의 보법이다.
수십 개의 환영을 그리며 표홀하게 산 위를 수놓는, 청성의 기상이 담긴 보법.
본래 환의 경향이 강한 환환미종보를 천마군림보라는 절세의 무학에 담자, 이처럼 수백의 환영을 보이는 일대 장관을 연출한 것이다.
- 이거 어째, 나만 그랬던 게 아닌 것 같은데?
마공의 대표적인 절기인 천마군림보에다, 정파의 절예 중 하나인 환환미종보.
설휘는 정공과 마공을 자유롭게 펼쳐 낼 수 있는 몸이지만, 이 둘을 섞어서 동시에 펼쳐내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사유강은 그런 것을 펼쳐냈다.
이게 단순히 오래 쌓인 경험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 닿지 못한 탈마의 초신에서 휘두를 수 있는 무위일까.
아니, 후자는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경지 문제라면, 사유강 외에 다른 탈마급 고수들에게서도 유사한 능력이 보일 수 있어야 할 터.
그렇다면 이건 그냥 사유강.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질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뜻인데.
“잠깐이나마,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사유강은 그렇게 수백의 환영을 만들어 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환영의 숫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츠으으윽.
신야자가 잠식한 공간에 머문 지옥불이, 사유강이 생성한 환영에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화아아악--
초열지옥.
불가의 8대 지옥 중 하나로, 사람을 살라 먹으며 끝없이 계속 타오른다는 저승의 불지옥.
흡사 그걸 구현해 내기라도 한 듯, 지옥의 불은 계속해서 공간을 점하고 있었다.
반면에 사유강이 생성한 환영은 마치 그 불의 땔감이 되듯, 오히려 불길의 기세는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치잇.”
그럼에도 사유강은 신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체감. 무형지기가 펼쳐진 지점을 직접 본인이 밟아보지 않으면, 신야자가 어떤 원리로 공간을 왜곡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 스스로 죽으려는 건가.”
스윽.
한편, 검을 천천히 내려놓은 신야자.
그의 입가엔 비웃음이 걸렸다. 이 싸움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아니면 멍청한 건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내가 힘을 쓰기 시작한 이상.”
스윽. 꽉.
그는 서공에 손을 내밀어,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 공간에서 나는 무적이다. 아무리 당신이 상대라 해도 말이야.”
- 큭…… 으으…….
설휘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지독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천마군림보와 환환미종보가 동시에 연계되면서 일순간에 수십수백의 환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 낸 환영이 지워질 때마다 고통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천마군림보. 환영이면서 동시에 실체를 지니는 무공의 특성 때문인 모양인데, 어쨌든 그렇게 반쯤 실체인 환영들은 지옥불에 타 들어갔다.
휘륵. 푸와악!
그리고 환영이 하나하나 불타 죽을 때마다, 설휘는 자신이 화형을 당하는 죽을 맛을 보았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이건 버틸 수 없는 종류다.
작열통.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지독한 고통이 산 채로 불에 타죽는 것이라던가.
- 너…… 괜찮아……?
때문에 오히려 놀라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겪는 고통만큼 사유강 역시 고통스러울 터. 아니,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그인 만큼, 직접적인 고통은 그가 더 심할 것이다.
그런데도 버텨내고 있다.
이 공간의 중심을 찾아내기 위해.
“안 괜찮지. 당연히.”
- 크윽. 큭.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 때문에 몸에 화상 자국은 더 늘어났고, 고통은 더 커졌다.
종국에는 정말 정신이 흐려질 정도로 괴로웠다. 그런데도 녀석은 움직였다.
어느 순간 설휘는, 대체 이 고통을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 더, 더는…….
“설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게 뭔 줄 아냐?”
그때쯤 그가 물어왔다.
사유강의 목소리엔 억누르고 있는 고통과 왠지 모를 비장함이 맺혀 있었다.
“바로 이용당하는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내 소중한 사람들이, 소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놈들에게 능욕당하는 거.”
- ……?
“그걸 계속 견디다 보면 감정이 무뎌지고, 어느 순간 내가 인간이라는 걸 잊게 되더군. 그러니 설휘, 너만은 물러서지 마라. 내가 사라져도, 놈들에게 이용당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 ……!
설휘는 사유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때문에 거의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으니까.
후우욱!
그리고 몇 번의 도약을 더 했을 때, 눈앞에 신야자가 보였다.
“스스로 이렇게 죽음을 원했다니. 그분께서 보면 정말 실망인걸.”
“……실망스러운 싸움. 그게 내가 원하는 바야.”
사유강이 냉소했다.
“그래? 그럼 이번에 그분께서도 확실히 알게 되시겠구만.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파파앗.
불길에 붙잡힌 사유강. 하지만 온몸에 세차게 회전시키며, 다시금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신야자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흥.”
팟. 팟. 팟.
몇 번의 공간 이동 후. 단숨에 거리를 좁혔고. 기어코 상대의 머리를 잡아챘다.
“이봐. 더는 네놈의 장단에 맞춰주지 못하겠어.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걸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크큭.”
사유강은 잇몸까지 드러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꺼지지 않은 지옥불을 끼얹으면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 이미 반쯤 송장이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뭘 그리 좋아해? 곧 뒈질 녀석이.”
“하여간…… 넌 돌대가리가 맞았어. 내 예상대로.”
“뭐?”
이미 몰골이 말이 아닌 사유강. 하지만 그는 빛을 잃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답했다.
“네놈이 만든 공간의 중심. 네 덕택에 겨우 찾을 수 있었으니까.”
“뭔 말이야?”
“네가 처음 무형지기로 공간을 형성했을 때는, 나도 찾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이 몸이 아직 초신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씨익.
온통 시커먼 얼굴로 사유강은 웃으며 말했다.
“넌 나를 잡으려고 공간을 또다시 왜곡시켰어. 공간을 재설정하면, 그 중심이 드러나는 걸 몰랐나?”
“……!”
신야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껏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당황한 기색이었다.
“너…….”
“이봐. 우린 어차피 이곳의 사람들이 아냐. 여기에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들이라고.”
사유강은 그런 그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러니 깔끔하게 퇴장하자? 너와의 싸움이야 이미 결말은 끝난 거 같으니.”
“이 새끼가!”
신야자가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척.
하지만 이번엔 사유강이 빨랐다. 그리고 눈앞의 사유강이 아닌, 전혀 엉뚱한 허공에 절대극마공을 끌어내어 쏘아냈다.
쩌어엉!
솨아아아---
그러자, 순간 기의 역류가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신야자가 몸을 비틀거렸고. 그걸 본 사유강이 이번엔 그의 머리채를 잡아채곤 말했다.
“혈교의 의식 중에서, 영육분리라는 게 있지? 본래는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악귀를 강제로 끊어내는 구마술. 그걸로 이 몸에서 너 같은 악령을 떼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너, 이 녀석……!”
신야자는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갑자기 휘떡! 눈이 뒤집히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휘. 후세에 다시 한번 만날 기회가 있으면 좋겠구나.”
사유강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사유강.
“솔직히 그 절대자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어떤 삶을 살더라도 후회 없이 살도록 해. 나처럼…… 인간성이 마모되어 구천을 떠돌지 말고. 잘 지내라.”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들어도 알 수 없는 것을 뭐라고 읊었고, 이내 신야자를 향해 외쳤다.
“갈(喝)!”
***
천지를 뒤흔드는 호통. 그 외침에 뭔가 쑥 하고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또다시 느꼈다.
시야가 앞으로 당겨졌다가, 뒤로 쭉 밀리는 현상이 몇 번 일어났을 때쯤.
설휘는 눈앞에 상이 맺히는 걸 보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물을 인지할 때쯤 옆에 앉아 있던 천미려의 존재도 알 수 있었다.
“상공…….”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죽지 않았다는 실감이 났다.
“어떻게…… 제가 살아 있는 겁니까?”
“운이 좋았어요.”
차분한 대답과 달리 설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공간 왜곡 같은, 생전 처음 당해보는 무위.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도움을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스윽.
설휘는 고개를 내려,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이 정도로도 죽지 않는구나.’
설휘는 오히려 목숨이 붙어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지옥불이 꺼지긴 했지만, 거의 온몸이 불에 탔기에 시꺼먼 자국이 선명했다.
당연히 벌겋게 오른 화상 자국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리 살아있는 걸 보면. 그리고 고통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사람인지, 신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AI의 존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설휘가 몸을 좀 일으키려 할 때였다.
‘어?’
갑자기 생성된 글귀. AI의 존재가 더는 없다는 내용이 떴다.
그리고 저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거야!”
신야자. 아니, 이제는 가짜 교주인 천월성이었다.
그 역시 설휘처럼 AI가 사라지고 본래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런, 큰일이다.’
그를 본 설휘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일단 살아는 있지만, 지금 곧장 힘을 쓸 수 없는 몸 상태. 적어도 일각 이상의 운기조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녀석의 기운은 여전히 팔팔해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AI의 조력으로 녀석의 신체적 능력은 이미 초신까지 다다르지 않았는가.
“괜찮아요, 상공. 제가 있잖아요.”
때마침 천미려가 말을 걸어왔다.
설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소저로서는 역부족일 것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보십시오. 운이 좋다면…….”
“믿어보세요. 저 녀석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요.”
“……소저?”
설휘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전에도 그와 거의 대등하게 잘 싸웠으니, 이번에도 잘 버텨주길 바랄 수밖에.
그렇게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투툭---
설휘의 몸이 휘청거렸다.
갑작스런 점혈을 당한 것이다.
“……!”
보통이라면 절대로 통하지 않는 수법.
하지만 지금 설휘는 그 보통 상태가 아니었다.
“왜…….”
바닥에 주저앉은 설휘가 다급히 물었다.
“괜히 나서다가, 둘이 당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네.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어느새 그녀는 담담하게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구슬퍼 보이기도 했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