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338화 (317/379)

338화. 절대자 (1)

다시 만난 곤마의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머리는 새하얀 백발.

심지어 수염, 눈썹, 피부까지 새하얗게 변해 있어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설휘……. 어떻게 된 것이냐.”

물음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는 곤마.

완전히 폐허로 변한 공터. 날카롭던 기암괴석들도 완만하게 변해 있고, 저편의 지형까지 평탄하게 변했다.

여기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지, 그저 보기만 해도 짐작이 갈 정도.

“모두…… 죽었습니다.”

설휘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멍한 얼굴로 가슴속 시린 아픔을 담담히 읊어나갔다.

“제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습니다.”

“…….”

곤마는 뒤돌아 살짝 눈을 감았다.

예상대로 큰 싸움이 일었고, 피해가 막심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런 책임에서 본인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조금 더 빨리 판단을 내렸으면…….”

“그랬으면 누군가가 더 빨리 죽었겠지요. 본래 낭만을 좇는 삶이란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뭔가 해탈한 듯한 설휘의 말에 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뭘 어찌했든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너무도 가슴에 와닿았기에.

그토록 친인들을 지키려 했던 설휘의 운명.

그리고 곧 죽음을 맞이할 자신의 운명.

투욱.

곤마는 설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폐허로 변한 저편을 보며 물었다.

“교주는 죽었지?”

“예.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애초에 사부님을 시해한 자가 사부보다 약했을 리가 없을 테니.”

“……!”

그 말에 설휘는 조금 놀라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았다고 해야 할까.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서 생각이 많아지더군. 어릴 적 나를 가르치실 때 보았던 모습과 행동. 그런 것이 매우 달랐어.”

곤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사부는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교주.

천만 마교인들의 하늘이었다.

뭔가 사람이 달라졌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당연히 마교의 하늘을 누가 감히…… 그런 선입견 때문에 그냥 성정이 변하셨구나.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사형. 이사형. 삼사저……. 기껏 들인 제자를 서로 죽고 죽이게 하려 들 때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그때에도 사실 알 수 없었을 테니.”

조용히 자책하는 곤마.

아무리 말년에 피 튀기는 싸움으로 얼룩졌다 하더라도, 아주 예전- 기억조차 흐릿한 때에 분명히 그런 추억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너무 잘난 척하다 미끄러지는 대사형.

샐쭉하게 그를 노려보는 이사형.

매번 코웃음만 치지만, 가끔은 간식 덩어리를 던져주던 삼사저까지.

무섭고 어려운 사형제 간이었지만, 그럭저럭 가까운 사람으로 있었던 때가 있었다.

후계자 쟁투가 선언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았을 겁니다. 누구도 곤마 님의 인생을 살지 못하기에, 그 마음을 아는 이도 없을 겁니다.”

“……지금 나를 위로하는 게냐. 내 줏대 없는 판단으로 이 사달을 겪고도.”

“곤마 님이 벌인 사달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지금 제게 남은 사람이라곤…….”

설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곤마 님 하나니까요.”

“……허.”

곤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무슨 욕을 들어 먹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이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이익. 휘리리릭.

바람이 요란하게 흐느끼며 지나갔다.

대지가 통째로 구워지며 일어나는 탄내.

혹은 얼어 터진 빙벽이 녹으며 풍긴 축축한 습기.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를,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툭.

뜬금없이 설휘가 물었다. 곤마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답했다.

“음…… 얼마일까. 한 반 시진?”

“…….”

남은 생명. 앞으로 죽기까지의 시간이다.

사유강이 곤마가 천살성을 개방했다고 했는데, 아니길 바랐건만 결국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더럽게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하, 기어코 힘을 쓸 수밖에 없었지.”

너무 날로 먹으려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부교주였는데.

그렇게 가볍게 한탄하는 곤마.

“…….”

설휘는 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도 아끼는 이들을 잃었지만, 그건 곤마 또한 마찬가지.

그나마 자신은 나은 처지이지 않은가. 곤마는 이제 죽을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피식.

그렇게 애잔하게 보고 있자니 곤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보지 말게나. 지금 나는 꽤나 기분이 좋아. 음. 정말로.”

“……?”

“평생 괴롭힘당하면서 참기만 했던 세월이…… 드디어 끝났으니까. 죽기 전에 자네를 만나서, 마지막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스윽.

곤마의 시선은 하늘 저편에 닿아 있었다.

눈가가 붉어진 그의 얼굴은 웃는 듯, 혹은 우는 듯.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말한다.

“고마웠다. 설휘.”

“…….”

“천살성이라는 운명으로 태어나, 사람이라기보다 병기 취급을 받으며 살았지. 내 마지막 순간은 정해져 있었어. 전신 혈맥이 타오르면서, 눈앞의 적을 죽이고, 나도 소모되는 그런 결말. 그랬는데…….”

곤마의 목소리엔 작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수많은 악몽의 시간. 두려움과 회한의 날들.

나만 왜 이렇게 태어났느냐고 원망도 해보았고, 일부러 주변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도 써 보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씁쓸하고 고독한 인생이 될 터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네는 내 인생을, 짧게나마 사람으로서 살게 해 주었지.”

낭만을 함께하는 사람이.

던져지며 싸우는 게 아닌, 지키는 싸움을 함께할 사람이.

그런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고 행복인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고, 걱정 없이 부탁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이제 곧 죽는다는 걸 아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끔찍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고 그저 후련할 뿐. 고맙다. 이리 마음 편히 살게 해줘서. 너무 고마워.”

“…….”

설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곤마가 마음 편한 인생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세력에 들어, 수많은 역경과 악재에 휘말리던 삶이었다.

하지만 설휘 자신은 얻은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었다.

그중 많은 것을 잃어 한탄하던 그에게.

지금 들어보니 곤마가 바라는 것은 너무도 소박한 것. 그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이다.

그런 그가 고맙다고,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말하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군.”

“예?”

투툭.

설휘가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가운데, 곤마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을 벌인 원흉이 오고 있네.”

“……!”

순간 설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고 있다니.

사유강에게 들은 절대자를 말하는 것일까. 곤마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것일까.

어쩌면…….

“그리 의심스레 쳐다보지 말게. 나도 상황 파악은 잘하는 편이 아니니까. 내가 여기 온 건, 탈마급의 파동이 전해진 것도 있지만…….”

스윽.

곤마가 저편의 한곳을 가리켰다.

가짜 교주 천월성 시체 위에서, 허공이 일렁일렁 일그러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무슨…….”

기이한 현상이다.

척 봐도 이제껏 본 적 없는 다른 기류. 아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운이다.

곤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계의 통로. 이 세상과의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다. 아마도 저기서 나오는 녀석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녀석일 테고.”

“…….”

설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신을 이리로 오게 한, 그리고. 자신이 반드시 이겨야 할 절대자의 존재를.

츠츠츠 콰아아아-!

괴이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키 두 배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그 끝은 회색과 파란색 빛과 타원형을 띠고 있었고, 내부의 검은색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기운이 넘실거렸다.

스윽.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쯤.

인간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

[축하합니다. 이 세계, 절대자와의 조우로 목숨 1000개를 획득하셨습니다.]

“…….”

뭔가 기분이 더러웠다.

갑자기 시스템이 작동하며 그간 자신의 이룬 성과에 대한 평가를 해주었다.

목숨으로 정산 받은 활약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수 있을까.

나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삶이었다. 그런데.

그저 만나기만 해도 일천. 하기에 따라, 한 목숨에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얻는다고?

[축하합니다. AI의 자격 조건을 성립하셨습니다. 죽음 후, 원하시면 언제든 AI의 길로 가실 수 있습니다.]

또다시 뜨는 창.

“…….”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창구다. 절대자와의 조우를 겪으면 원래 이런 길이 생기는 건가.

아니면 기존의 AI가 사라져서 그런 것일까.

어쨌든, 이세계에서 건너온 절대자의 등장은 설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과거 플레이어가 ‘한 명’이라고 했던 건, 바로 가짜 교주 천월성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게, 현세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이렇게 툭 나타날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으니까.

저벅저벅.

경계를 통과하여 걸어오는 이를 보았다.

대략 팔 척의 거구.

설휘가 그에게 눈이 간 건, 그의 얼굴보다 복장이었다.

검, 도, 창. 그리고 비끄러맨 활.

온몸에 장식처럼 치렁치렁 병기들을 걸치고 있었는데, 적어도 병기 중 하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용천검!’

대검이라 하기에는 조금 짧은데, 검자루에 각기 다른 구슬이 박혀있는 검.

금만중에게 구입했던, ‘1백만G’의 신병이기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저것들은…….’

새카맣게 번들거리는 창과, 갈고리처럼 굽어진 괴도.

하얗게 빛을 내는 활과 한 손에 든 섭선까지.

모두 다 특수 능력을 가진 신병이기일 터.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닌 절세의 병기로 무장한 남자가, 자신들을 보며 피식거렸다.

“하, 이게 몇 년 만인가.”

그의 첫 말은 감탄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것은 자문자답.

“아니지. 시간은 큰 의미가 없지? 그래도 제법이구나. 나를 만나는 영광을 누리다니……. 설계를 조금 더 촘촘히 해야 했나.”

‘설계?’

설휘는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투였는데, 묻기가 어렵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닌 탓도 있지만.

‘내공이…….’

상대의 존재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처럼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까마득한 거산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얼마나, 어느 정도로 강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신의 경지란 이런 건가.’

주르륵.

뒤통수로 식은땀이 흐른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한데 안력을 아무리 집중해도 도무지 보이는 것이 없다.

너무도 평범. 오히려 자신보다 약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나 그럴 리가 없으니.

‘예측이…… 그릇이 짐작되지 않는다.’

그건 상대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 그 의미에 설휘가 압도당해 입도 열지 못하고 있었을 때.

“네놈이었나. 이 모든 걸 벌여놓은 자가.”

곤마였다.

스륵.

그는 담담히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상대를 마주 보았다.

“손짓 한 번으로 천지를 뒤집을 만한 힘. 이해가 안 가는군. 보통 그만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세상에 관여하기를 꺼리는데…… 넌 왜 이런 식으로 인간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거지?”

“……!”

설휘는 새삼 느꼈다.

자신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상대의 힘. 하지만 천살성은 그걸 볼 수 있는 것이다.

“오호. 그거참 심오한 질문이군.”

그는 설휘를 일견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곤마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플레이어와 함께 왔으니, 내 친절히 대답해 주지. 다만, 그전에…… 이거 하나는 알고 있나?”

“뭘 말이냐?”

곤마의 반응에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세계에서 너란 자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

“……그게 무슨 말이냐.”

“들으면 알 것이다. 그것도 열여섯에 죽지 않는 특별한 천살성. 이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냐 하면…… 간단해.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씨익.

절대자가 웃으며 오연하게 선언했다.

“네 강함은 내가 허락했기 때문이며.”

“네 생명은 내가 연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적이긴 하나, 너의 전투력은 나와 맞먹을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 부디…….”

철컹.

순간 절대병기라 불리는 장비들이 곤마를 향해 날을 세웠다.

마치 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군사들처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천살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