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절대자 (2)
“그만!”
일촉즉발. 공세를 취하며 달려들려는 둘의 사이를 말린 자는, 다름 아닌 설휘였다.
그는 최대한 이 싸움을 미루고 싶었다.
싸우는 순간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어진다. 그렇기에 지금 말해야 했다.
알아내야 할 것, 알아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설령 여기서 죽더라도 뭐가 어떻게 되어 온 건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번 생을 헛되게 하지 않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호오. 이런, 이런. 귀하신 플레이어님.”
그런 설휘의 저지에 절대자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스윽.
그냥 무시하고 계속 손을 쓰지 않고, 그는 기도를 가라앉히고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몸을 감싸고 있던 절세병기들이 칼날을 빠르게 거두었다.
촤촤촤락!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군?”
“…….”
하고 싶은 말? 당연히 있다.
아니, 너무 많아서 뭣부터 물어봐야 할지 고민이다.
“흠. 뭐, 여기까지 온 노력을 인정해 친절히 설명해 주도록 하지. 나는 관대한 성향이니까 말이야.”
딱. 파밧.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휘황찬란한 의자가 나타났다.
거기에 털썩, 몸을 누이는 남자.
“하……?”
그 모습에 곤마가 울컥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을 할 것 같던 분위기에서, 갑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이건 완전히 안하무인.
자신을 한참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다.
“곤마 님.”
설휘 또한 그걸 알았다. 그래서 눈으로 설득했다.
지금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이제까지 흘린 피를 허망하게 보내지 않게 해달라고.
“……후우.”
그리고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곤마가 괴로운 한숨을 쉬며 한발 물러섰다. 그 역시 지금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니 창조자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은 그렇다 쳐도, 설휘와 자신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이 툭툭 던져내는 말들에서.
저놈이 사부를 살해하고 마교에 이 모든 혼란을 가져온 자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설휘는 정신을 칼같이 바짝 세우며, 첫 번째 물음을 던졌다.
“이 세상에 관여해서, 사람들을 조율한다고 했지.”
“그렇지.”
“그럼 내가 처한 상황들, 죽음들. 내 운명을 계속되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너일 테고.”
“음, 그건 좀 다른 얘긴데?”
사내. 절대자라 불리는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피식 아직 모르는군,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긴 이미 기획되고 만들어진 세상이다. 난 이 세상을, 시스템을 활용하여 내 식대로 조율하고 간섭하는 것뿐. 세상을 창조하는 영역은 오직 신(神)만이 가능하다.”
“하. 그게 사실이라면, 생각처럼 대단하신 분은 아니군. 천 소저, 천미려의 존재는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지 않았나?”
설휘의 비아냥에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좀 진정하지. 설명을 계속 듣고 싶으면…….”
“…….”
잠시 분노가 극에 달했던 설휘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으음. 솔직히 말해 그녀의 등장은 나도 놀라웠다. 이제껏 수많은 우주를 관조해봤지만…… 그런 현상은 처음 겪었거든.”
“처음 겪었다고?”
“그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다. 생명을 창조하거나 세상을 모두 다 관조하진 못해. 아쉽게도 말이지.”
슥.
절대자가 주검이 된 천미려에게 눈길을 줬다. 그러다 곧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시스템도 마찬가지. 시스템이 천미려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세상 안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죽은 자로 분리되었고.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고, 시스템은 인식하지 못했다. 창조된 세상 밖이라서. 그러다 다시 어떤 연유를 통해 이 안으로 들어온 거고.”
“그 말은…….”
“너다, 설휘. 지금으로선 네 존재가 그녀를 이 세상 안으로 불러들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네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고.”
“…….”
으득.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천미려는 자신이 접촉한 일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자신과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 시간조차 얼어붙는 영구동토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시스템에게 감지되는 일도 없이, 천월성과 싸우다 동귀어진하는 일도 없이.
결국, 그녀를 이 세상으로 끌어들인 것은 설휘. 그 자신이었다.
“플레이어 설휘여…….”
자책감에 빠져있는 설휘에게, 절대자는 갑자기 경건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대는 천마육성 시스템에 들어와 굳건한 인내심과 뛰어난 적응력을 보였다. 그것도 가장 밑바닥의 장기짝 같은 존재에서, 자그마치 AI의 영역까지 오르다니. 이는 놀라운 업적이지.”
그러다 처음 보는, 특이한 동작으로 예의를 차리며 말을 이었다.
“……?”
“수많은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나, 그들 중 그 기회를 끝까지 잡아내는 자는 만에 하나뿐. 그대는 누구도 예상 못 한 총기와 인내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 발자취는 이제 천석(天石)에 새겨질 것이며, 앞으로의 행보에 더 큰 기대를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좌가…….”
스윽.
절대자가 손을 내밀자, 절세병기들이 제멋대로 일렬로 서기 시작했다.
“몇 가지 소정의 상품과 충분한 보상을 하려고 한다. 어떠냐,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
‘흐음…….’
설휘가 입을 다물었고, 그사이 곤마는 상황을 지켜보며 절대자의 말을 경청했다. 정확히 어떻게인지는 모르나, 눈앞의 사내는 가히 신에 다다른 존재다.
그가 아마 세상에 커다란 문제를 냈고, 그걸 설휘가 푼 모양이라고 빠르게 정리했다.
거기다 그가 들고 온 저 병기들.
척 봐도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것들로 보였다.
당연히 본인이 사용할 줄 알았더니, 선물이라니?
그렇게 곤마가 재차 설휘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그때.
“좆까. 이 새끼야.”
“……!”
섬찟했다. 설휘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이제 와서 세상의 조율자, 그런 흉내를 내고 있는데. 버러지 같은 새끼. 네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해왔는지 나는 다 알거든.”
“허어. 이런 무례한…….”
“플레이어들이 혹여 현경에 오를까 봐 관련된 서적을 모두 없애고, 마교의 교주까지 바꿔서 탈마에 이르는 이들은 싹부터 다 쓸어냈지?”
“…….”
“향락소 뒷간 같은 새끼. 염병하지 마. 나에겐 이게 끝이 아니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 생에도 도전할 거다.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너에게 도전할 거고…….”
꾸욱.
손을 들어 주먹을 쥐더니 그 손으로 절대자를 가리키며 단언하는 설휘.
“넌, 내 손으로 반드시 죽여버릴 거다.”
정적.
전운을 몰고 오는 싸늘한 분위기가 주변에 몰아쳤다.
“후후후. 흐흐흐흐…….”
설휘의 거친 말에도 절대자란 사내의 표정은 굳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을 수없이 겪은 사람처럼.
오히려 즐거운 듯 웃음을 띠는 절대자.
“이런 패기 있는 말투라니……. 멋지군. 그리고 아쉽군. 이름이…… 사유강이었던가?”
“……뭐?!”
갑자기 튀어버리는 이야기에 설휘가 반응하자, 절대자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무려 수천 번을 환생하고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더군.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야.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어땠지? 그대가 잘 알 텐데.”
“…….”
“결국엔 실패했다.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플레이어에게 빌붙어, 겨우겨우 존재만 유지하는 기생충이 되지 않았나.”
“이…….”
설휘는 이를 악물었다.
아득했다. 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앞날이 까마득하기만 했다.
사유강.
그는 설휘가 본 가운데서 가장 강한 이였다. 능력, 태도, 마음자세까지.
수천수만 번의 삶을 되풀이한, 어찌 보면 설휘가 나아가려 하는 가장 이상적인 강자의 모습. 하지만 그런 그도 끝끝내 절대자를 넘지 못하고, 그보다 낮은 절대자의 수하와 동귀어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이 그 사유강을 넘어서서, 저 사내를 꺾을 수 있을까? 독이 오른 마음과는 별개로,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본능의 영역에서 알 수 있었다.
사람을 깔보고, 실험하고, 고통을 주는.
절대자의 간섭을 실제로 마주한 사유강의 인생은, 그런 고통에 담긴 삶이었으니까.
“크하하. 하하하하! 이제 왜? 막상 내게 덤비려니 겁이 나는가 보구나.”
“…….”
설휘는 그를 노려보며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굴종하라. 내가 내리는 소정의 상품과 보상을 받으면 수많은 인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 아니지. 어쩌면 특정 플레이어들이 그랬듯, 이 안의 비밀 하나를 깨면 무한한 생명도 얻을 수 있다. 즐겁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어찌 사는 것이냐.”
설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거칠게 피어오르던 분노가, 노화순청의 그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람 등쳐먹고 뒤통수치며, 거슬리는 사람 죽여버리고. 맘에 안 드는 사람 제거해 얻은 피 값. 그 피 값으로 사는 게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
“…….”
“나도 한때 쓰레기처럼 산 적은 있었지만, 너 같은 버러지는 아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 것. 그게 사람으로서 사는 삶이다.”
“쯧쯧……. 아직도 물러 터졌구나. 고귀한 영매처럼 말하고 있으니.”
그런 설휘의 말에 절대자는 혀를 찼다.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
“사람도 결국은 짐승인 바. 지금이야 너 역시 물욕도 권력과 속물적 가치를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네가 언제부터 그랬지? 결국은 힘. 그걸 얻고 난 뒤 부릴 수 있게 된 게 자존심 아닌가?”
“…….”
“힘을 잃고 나면 그 자존심도 꺾이겠지. 그리고 같잖은 자존심을 부린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 말처럼 버러지, 내가 버러지라면 그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을 겨우겨우 연명만 하게 될 게야.”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그게 사람의 본능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하는 거야. 지금처럼, 본능이 아니라 이성으로 움직이는 지금 이 순간이.”
설휘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내 진짜 모습이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끼어드는 곤마.
이제껏 침묵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 듯 보였다.
“설휘. 너에게 그간 어떤 정도의 시련이 있었는지, 완전히는 몰라도 이제 대충은 알게 되었다.”
“…….”
“네가 그려갈 미래가 어떤 건지 몰라도, 이건 말할 수 있다. 전력으로 널 도우마. 지금의 너라면 그들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크크큭.”
절대자인 사내가 웃어 보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낭만적이군. 그래. 설복당하지 않으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 그렇다면 결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겠군. 힘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를…….”
쿵.
절대자 사내가 땅을 밟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진동이 곧 잦아들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점점 범위를 확장하더니, 거짓말처럼 땅이 갈라지며 지형이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뭔…….”
설휘는 황당한 표정으로 곤마를 보았다.
본인의 힘으로 수습하기가 쉬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걱정 마라.”
곤마는 안심하라며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외치더니 이내 몸으로 기운이 스며들었는데, 그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아아-----
“크읍!”
강렬하게 뻗어 나오는 힘에 설휘는 느꼈다.
곤마는 초신이 다룰 법한 자연의 기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고. 이것이 아마 3단계……. 그 족쇄를 풀어낸 힘이라는 것일까.
쩌어어엉 쿠와아앙!
그리고 곤마가 땅을 내리찍자 거대한 지반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거대한 힘에 흔들린 땅이, 다시 거대한 힘에 의해 진정된 것이다.
“호오. 역시나 천살성.”
절대자 사내가 놀라워하며 칭찬을 보냈다.
후욱. 후욱.
곤마는 아직 기운을 다스리듯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일순 과도한 힘을 집중시켰던 탓일까.
치렁치렁한 백발이 가닥가닥 끊어졌고, 얼굴도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오히려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듯, 새파랗게 귀기가 일렁거리는 눈.
“얼마나 남은 겁니까.”
설휘는 그를 향해 슬쩍 물어보았다.
아까까지 남은 시간이 반 시진이라 했으니, 한 번 더 힘을 개봉한 지금은 정확히 어느 정도 될지 궁금했다.
“대략 일각 정도.”
“……이런.”
가슴 한구석이 푹하고 내려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한부. 그것도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곤마의 삶과 각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한바탕하고 올 테니.”
“…….”
투욱.
곤마는 몇 발짝 걸어나갔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과 함께.
“좀 쉬고 있어라.”
빛의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나갔는데.
핏----
그 움직임은 설휘가 놓쳐버릴 정도로 빨랐다.
그렇게, 두 절대자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