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신의 개입 (2)
“혹시 천 소저, 아니 천미려의…… 사부 되십니까?”
완전히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서, 설휘가 물었다.
절대자라는 놈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 역시 입술도 달싹거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찌된 것인지 자신의 말은 정확히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전음입밀처럼.
“려아에게 몇 수 다듬어 주긴 했지. 내가 아니더라도 언제고 깨달았을 아이였다만.”
“아!”
역시 예상한 것이 맞았다. 천미려의 사부, 시간의 반복과 비틀리는 운명의 전조를 알아낸 현자.
“혹시 당신은…… 신(神)이십니까?”
조심스레 묻자,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아니다. 아니야. 노부가 말년에 몇 가지 재주를 얻긴 했지만, 그리 대단하고 고아한 존재는 아니지. 이해하기 쉽게 말하려면…… 대충 세간에서 말하는 신선 정도면 될 것 같구나.”
“……신선(神仙).”
“그러니 총명한 아이야. 의심을 풀거라. 시스템을 만든 것은 내가 아니란다.”
“……!”
설휘는 흠칫했다.
의심과 반감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리도 아닌 것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작 몇 시간 만에.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겪기에는, 너무도 많은 일이었다.
“……저에게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
설화나 풍문으로만 듣던 신선? 그런 이가 자신을 왜 찾아왔을까.
어쩌면 천미려의 죽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몸가짐을 조심하고 있는 설휘에게.
“심히 혼란스러운 모양이구나. 그럴 테지. 하나 실은 내가 찾아온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불렀다는 게 더 말이 맞을 것 같구나.”
스윽.
노인이 고개를 조금 비틀며 말했다.
“시간은 공간과 함께 흐르는 법. 그러니 시간의 정지는 자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 세상을 속박하는 창살, 그 일부를 열어버리지. 네가 균열을 만들었기에, 내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속박하는 창살…….”
아마도 시스템을 말하는 모양이다.
거기서 설휘는 절대자, 검을 휘두르다 그대로 굳어버려 볼썽사나워진 마신을 보았다.
“너희가 시스템이라 부르는 것은 신의 이치를 따르는 공능. 그러니 그 공능을 휘두르는 자는 범인의 눈에는 신이나 다름없겠지. 하나 작은 당랑에게는 사람이 다들 거대하고 초월적으로 보이겠으나,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무림인도, 왕후장상도 있는 법이니라.”
“……그렇군요.”
알기 쉬운 비유라 이해가 갔다.
말이야 절대자 운운하며 자신을 높이는 놈도, 결국에는 시공의 제한을 넘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그리고 지금 나타난 노인. 천미려의 사부는, 그런 평범한(?) 인간보다 한층 더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럼 문제는, 그런 높은 존재가 자신 앞에 왜 나타났느냐는 것인데.
“나는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고 한다.”
“선택……입니까?”
설휘가 묻자 신선, 천미려의 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시스템과 완전히 분리해줄 수 있다. 그저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껏 네가 고통받았던 기억들도, 필요하다면 잊고 살 수 있지.”
“음.”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에 잠깐 절대자와 한패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말하는 내용을 보면 또 그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따스한 눈빛이 그 증거였다.
“시스템과 분리라면……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마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 싸움도 분쟁도 겪지 않는 평화로운 일생. 네가 한때 간절히 바랐던 것이 바로 이것 아니더냐?”
“…….”
노인의 말에 설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랐던 것이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아니다. 예전에는 맞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껏 많은 인생을 겪어온 설휘에게, 이는 나쁜…… 아니 최악의 제안이다. 이보다 최악일 수 없을 정도로.
인연.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이제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이제 설휘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친한 이, 가까운 이 모두 시스템에 남아있는 채로, 혼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설휘에게 그건 추방이자 강압적인 격리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권유였다.
“왜…… 저였습니까?”
하지만 거절하기 전, 설휘는 물었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천 소저에게 저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그녀에게 이끄셨습니다. 수천수만의 플레이어라는 존재 중에서 왜 저에게 그런 임무를 주셨습니까.”
궁금증보다 원망이 더 컸다.
한 점의 부족함 없는 절세미녀. 능력도 성품도 뛰어난 그녀를 자신 따위에게 붙여준 눈앞의 노인에게.
자신을 위해 죽은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가엾어서.
“좀 오해가 있구나. 그래,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노인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너를 선택한 건, 네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 시야에 시공의 창살, 시스템이란 것이 보였고, 거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이가 너였던 것뿐.”
“…….”
“그래서 려아를 가르쳐 훗날의 초석으로 삼은 것이다. 시스템이란 게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태어나고 죽는 플레이어에 대해 알기 위해. 네가 그 안에서 각성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부차적인 일이었지.”
“부차적…….”
일순, 설휘의 마음에 허망함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분노가 일었다. 초석이라고? 바둑판의 바둑돌이라는 말인가.
신선이라 불리는 자가 이토록 누군가의 인생을 쉽게 재단하다니. 초월적인 힘을 얻은 자들은 다들 이렇게 냉막하고 무심한 것인가.
“그래서, 이제 대답을 들으마. 네 선택은 무엇이냐?”
다시 이어진 물음에 설휘는 감정을 추슬렀다.
상대는 신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신적인 존재다. 그런 상대에게 감정을 드러낼 만큼 우둔하지는 않았다.
설휘는 신중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물었다.
“그 제안……. 거부한다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흠, 거부라.”
노인이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의아한 듯도 했고, 혹은 마치 설휘가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예상한 것 같이도 보였다.
“왜 거부하려고 하느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할 일이라면?”
“시스템 안에서 해보지 못했던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나약하여 지키지 못했던 것들도 되찾아야 합니다.”
“허어. 고작 그런 이유로 저 고통스런 속박 안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그런 이유가…… 제 모든 것입니다.”
설휘는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고작이라니.
시스템의 안이라 해도, 그 안에서 설휘는 삶을 겪었다. 가까운 사람을 만들고, 그들을 챙기며 함께했다.
죽음과 회귀로 예전의 과거가 덧씌워져 새로 쓰인다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생각하든 설휘 자신의 삶이고 선택이었다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마신이란 존재는 시스템에서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올랐다. 경계에서 태어난 그는 인간과는 시작점부터 다르다. 그런 자를 상대로 평생 싸우겠다고?”
“예. 싸울 겁니다.”
“죽고, 패하고, 짓이겨질 것이다. 결과가 뻔히 정해져 있는 싸움에서, 너는 대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냐?”
“보고 싶은 사람을 보는 것, 그동안 해준 것 없이 도움만 받아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것. 그리고…… 그리고…….”
“려아를 보고 싶은 것이구나.”
“……!”
정곡을 찔린 설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측은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려아는 애초에 경계 바깥의 사람. 시스템이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네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여, 그 아이와 다시 재회한다는 보장이 없어.”
“하지만…… 천 소저는 분명히 시스템 안에 들어왔었고,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스템. 이 시공의 속박은, 조물주-신이 어떤 이유로 만든 것. 인간의 의도적인 개입이 과연 통할지 알 수 없다. 네가 다시 삶을 회귀하여 려아를 만나도, 그 아이는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재회할 확률이 일 푼도 되지 않을 것이니.”
“…….”
일 푼.
시스템의 언어로 1퍼센트 미만이라는 이야기다. 까마득히 낮은 확률에 설휘의 얼굴이 굳어졌다.
“애초에 없었던 존재였기에, 사람으로 태어날지도 알 수 없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한갓 축생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무작위의 영역이지.”
“…….”
“그럼에도 스스로 속박으로 걸어들어가려는 것이냐. 한없이 희박한 확률에, 네 마음이 꺾이고 영혼마저 으스러질 생지옥 같은 곳으로?”
“……예.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걱정해오는 노신선에게, 설휘는 대답했다.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의 괴롭힘이 있다 해도, 그렇다 해도.
“확률이 단 1리(0.1퍼센트)라 해도 충분히 도전할 만합니다. 이미 천 개 이상의 목숨이 있으니까요. 애초에 이러기 위해 얻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공할 확률이 천분의 일이라 하면.
천 번을 도전해서 1로 만들면 되는 일이다.
애초에 그녀 덕에 얻은 목숨을, 그녀를 위해 쓰는 것일 뿐.
“허어…….”
그 무모한 말에, 선택에. 노신선은 탄식을 흘려냈다.
“그렇게까지 해서 려아를 보려는 이유는 무엇이냐? 천 번의 죽음 끝에서 많아야 두세 번, 그런 기회를 얻는 게 말이다.”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그녀가 인간으로 환생하면 저를 기다릴 겁니다. 그러니까 가야 합니다. 천 번에 한 번이 나오든, 두 번이 나오든. 직접 가서.”
설휘가 입을 열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감정이 울렁거려서 갈라져 나온 소리였다.
“고마웠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저는 그 말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허어…….”
노인이 다시 한번 탄식을 했다.
저벅. 저벅.
그는 뒷짐을 쥔 채 한참 주변을 걸었고,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뭔가 떠오른 듯이, 차분하게 혼자 말했다.
“그래……. 어쩌면 이런 불확실성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시스템을 만든 것은 이토록 꺾이지 않는 의지, 삶을 관조해보려 한 것일지도.”
노신선은 알 듯 말 듯한 자신만의 말을 한 후, 설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 끝이 비록 얼마나 참혹하든, 너는 그중에서도 행복을 찾을 것이니.”
“……!”
무언가 소름이 돋는 불길한 예언이었다.
설휘가 헛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잡을 때, 노인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고선 말을 이었다.
“내가 물러나면 너는 바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시스템에 의해 회귀를 시작하겠지. 한없이 무모하고 미력한 자에게, 그 의지를 인정하여 내 한 가지 선물을 주도록 하마.”
“선물……?”
“뭐, 죽는 순간 알게 될 거다. 어쩌면 그것이라면, 너는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거다. 거기에 약간의, 아니 조금 많은 운이 더해진다면…….”
노인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마신을 이기고, 려아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였구나. 그럼…… 시스템에 종속되어 스스로 지옥문을 연 인간이여. 나는 앞으로 멀리서 네 발자취를 지켜보겠다. 부디 무운을 비니…….”
스윽.
노인은 한 손을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잘 지내거라.”
딸깍----- 딸깍.
노인의 사라짐과 함께 설휘는 마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겪었다.
[설휘 님은 죽었습니다. 현재 1,121개의 목숨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다시 한번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
▶ 처음부터 시작한다.
▷ AI로 시작한다.(New)
▷ 계속 이어서 한다.
▷ 저장한 지점을 불러온다.
‘이건?’
그중에는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창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