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그리움 (1)
“헉, 헉.”
한 사내가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싸움이 벌써 반나절째.
요 며칠 느꼈던 불안감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위협해 다가오리라는 것을 생각 못 한 것이 불찰이었다.
“제기랄, 물건을 받지 말았어야 했나…….”
사내의 이름은 유옥하.
직책은 하오문주.
얼마 전까지 사천의 성도 지역을 담당하는 분타주였다가, 근래 12개주의 통합 분타주로 올라서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처음 일 년은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벼락승진한 그를 시기하던 분타주 한 명이 사달을 냈다. 직접 살수를 고용하여, 암살을 사주한 것이다.
사실 유옥하 역시 그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하오문의 밑바닥에서 자라난 그는, 문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뿌려 불만을 무마했다.
하지만 금액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한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일이 터졌다.
상대측에서 고용한 살수가, 자신의 호위무사들 셋을 단번에 죽여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천살문(千殺門)이라니…….”
으득.
사파에서 가장 질이 안 좋은 살수집단.
그 규모는 크지 않으나, 임무 수행 능력이 출중해서 재력가나 직책 높은 관리들이 찾는 자들이었다.
특히 살행 이후 시신 처리까지 확실하게 해주니, 요즘은 웃돈을 줘도 청부가 쉽지 않다는 곳.
설마하니 그런 이들을 고용했을 줄이야.
미리 낌새를 채고 도망을 쳤음에도 쉽게 따돌릴 수 없었다. 바로 그들의 추적술 때문이었다.
“잡아!”
“저쪽이다!”
숲으로 도망친 유옥하의 등 뒤로 매섭게 들리는 목소리.
잠시 몸을 숨겼던 그는,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계속해서 더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간 그는 희미하게 예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이 묶일 것이라고.
그가 알기로 이 길의 끝에는 가파른 절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붙잡히는 건 최악이다. 하오문이면 몰라도, 살수들의 고문은 아무리 뛰어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버틸 수가 없다.
아무리 자신이 원치 않아도, 육체의 고통에 굴복해서 끝끝내 숨겨왔던 비밀까지 누설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절벽에 몸을 던질까? 아냐. 아래에 물이 있어서, 괜히 어설프게 살아나게 될지도 몰라.’
스윽.
잠시 갈등했던 그는, 적당히 가려진 암벽에 등을 기대고 품속에서 한 뼘보다 작은 독비도(毒飛刀)를 꺼내 들었다.
한 번에 끝내야 했다.
괜히 어설프게 찔렀다가, 죽음이 두려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면 안 되니까.
“후우, 후우.”
유옥하는 깊게 숨을 골랐다. 이제 운명의 시간이었다.
이제껏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겨왔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끝. 인생의 마감이었다.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힘껏, 자신의 목을 찌르려고 독비도를 들어 올린 순간.
“저기, 말씀 좀 묻겠습니다.”
“……헉?!”
놀라서 자칫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허깨비처럼 나타난 사내 때문이었다.
“너, 너……!”
유옥하는 눈앞의 중년 사내가 살수라고 생각하여, 다시금 독비도를 쥐었다. 그런데.
사부작, 사부작.
뭔가 조금 이상했다. 중년인은 품에서 접어둔 종이를 꺼내, 자신 앞에 조심스레 내밀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여인을 본 적 있습니까?”
“…….”
용모파기.
하늘의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다. 그걸 내미는 남자의 눈에는…… 살기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유옥하는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곧 눈을 반개하며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귀하는…… 천살문의 살수가 아니시오?”
“천살문? 거긴 뭐하는 곳입니까? 아…….”
외려 되묻던 사내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앞에서 진치고 있던 놈들 말하는 것입니까?”
“진을 쳐? 혹 부딪히셨소?”
“예. 괜히 사람 앞길을 막기에 죄다 죽여버리고 왔습니다만.”
“……예?”
또다시 황당한 표정이 되어버린 유옥하.
천살문의 암살자들은 한 명 한 명이 일류고수이며, 몇 명은 절정고수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을 죄다 죽이다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주변에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갑자기 사내가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럴 확률은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다시 한번 봐주시지요. 이 사천에 분타주님만큼 사람을 잘 아는 이가 없다고 해서 각별히 찾아왔으니. 자, 이 여인. 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한번 물어오는 사내의 말.
‘……은거고수.’
그렇게 생각한 유옥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허나 잠시 종이에 그려진 용모파기를 보더니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기억에 없는 얼굴이오.”
“……정말입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엔 뭣하지만,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않는 몸이오. 그리고 그림대로라면 가히 절세의 미인인데, 이런 여인을 보았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테지. 그러니 처음 보는 것이 확실하오.”
“음……. 그러시군요.”
중년인의 표정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어깨까지 축 처진 것이, 심한 좌절에 든 모양이었다.
사람이 천천히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사내가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 이번 삶도 틀린 건가. 또 죽어야 하나.”
“……예?”
이어진 사내의 혼잣말도 당황스러웠다. 죽다니? 무슨…….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일이니.”
그러고는 말과 함께 가볍게 손을 들어.
휙. 퍽!
자기 머리를 후려치는 중년 사내.
“어…… 억……?”
풀썩.
뒤이어 널브러지는 그를 보고 유옥하는 잠시 머리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으……으악?! 으아아아아악!”
놀람은 뒤늦게 터져 나왔다.
뜬금없이 찾아왔던 중년 사내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천령개를 박살내어 자결해 버린 것이다.
유옥하는 그에 상황조차 잊고 꽥꽥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리고.
“뜨허어억?!!”
풀썩. 풀썩.
웬 나무 그루터기에,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기겁을 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기대어져 있었고, 하나는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려 부딪혔다.
그리고 둘 다 죽어 있었다.
“…….”
대략 일 각 정도.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던 유옥하는, 조심조심 사체들을 살피고,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복면을 벗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천면살수? 허, 이…… 뭔…….”
망연자실했다. 천살문을 대표하는 최고급 살수.
천 명을 죽이는 가운데 매번 얼굴이 바뀐다고 하여 붙은 별호.
일각에서 절정을 뛰어넘는 고수라 알려진 그가, 여기에 이렇게 죽어 있었다. 상흔은 깔끔하게 미간에 한칼. 그게 다였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부들부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오줌까지 지렸다.
안전해졌다. 이제 죽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이미 혼백이 쏘옥 빠져버린 유옥하.
이 모든 것이 좀 전에 자결한, 생면부지의 중년인이 벌인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 이후로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
[설휘 님은 815개의 목숨이 남았습니다.]
“흠. 이번에도 빈손인가.”
한편, 유옥하가 뭘 어쩌건, 설휘는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마신. 그리고 신선과의 조우 이후, 설휘는 세상을 주유하고 있었다.
천미려의 존재를 찾기 위해, 손발이 닿는 어디든지 갔다. 그렇게 세상을 돌아본 후, 그녀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을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차피 설휘에겐 목숨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 한 번만.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남은 목숨을 모두 써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신선이 줬던 선물은 정말로 특별했다.
[귀하의 존재는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본래였다면 중원 어디를 가든 3년을 넘기지 않고 절대자, 혹은 그의 하수인이 자신의 존재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을 맞는 것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 아마 천미려의 사부로 유추되는 이는 설휘에게 세상 밖을 볼 수 있는 ‘신의 눈’을 주었다.
그 덕분에, 원한다면 생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시스템의 시야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이다.
물론 시작은 한 번 죽은 후의 시스템 안에서였다.
[어느 기록을 불러들이시겠습니까?]
■ 천력 96년. 권력 재편의 날!
□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
□ 천력 98년, 본 스토리_운명의 날.
<‘천력 98년, 7월 마지막 날.’의 기록을 불러들입니까?>
‘또 이거군.’
대개 두 번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월별 일정을 한 달 남기고 마무리되던 때.
당시 상황은 마태룡의 연락두절. 그리고 그 보고를 받은 곤마가, 자신에게 칠사자 중 하나인 마태룡을 찾으라는 임무를 내리려 한다.
제반 상황상, 중원으로 이탈하는 데는 이 시기가 가장 적절했다.
물론, 과거처럼 곤마가 그를 찾으라는 임무를 내리지 못한다.
<천력 98년 8월 일정을 정해주세요. (36/36)>
▷ 조장들과 임무 수행[곤마의 임무 받기]
▷ 수하들의 일정 정하기
▷ 임무 받기
▶ 무사 수행
여기서 설휘의 선택은 무사 수행이었다.
<수행지역을 어디로 결정하시겠습니까?>
▷ 청해
▷ 감숙
▶ 사천
수하들을 놓아두고 사천으로 이동했고, 여기서 신의 눈을 썼다.
[귀하의 존재는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시스템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음, 그럼 이번에는…….’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하던 설휘는, 천미려를 찾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정했다.
첫 번째는 시스템 안을 돌아보는 방법.
두 번째는 시스템 밖을 돌아보는 방법.
마지막 세 번째로 지도상에 없는 세외를 뒤지는 방법.
하지만 어떤 방법이든, 이제껏 그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에 만났던 고산의 협곡을 몇 번이고 찾아갔는지 모른다. 거기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반가운 얼굴은 있었다. 한때 자신을 가르쳤던 초아란과 악비를 볼 수 있었으니까.
“…….”
하지만,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자신과 엮이면 불행해질 것이 분명하기에.
그저 은거고수에 대한 예의만 차리고는 발길을 돌렸다.
‘혹시 시뮬레이션의 능력을 향상시키면, 천미려의 존재를 좀 더 찾기 쉽지 않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노력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해 본 바, 시뮬레이션 역시 시스템 안의 능력.
죽고, 새 삶을 얻고 난 이후, 그녀가 어디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신도 알 수 없다고 했던 그녀의 존재를 시뮬레이션 따위가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매번 기대를 품고, 매번 천지사방을 뛰어다니고, 그러다가 좌절하여 죽거나 하기를 수백 번.
“불가능한 게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설휘는 천미려를 찾는 와중에 다른 삶에 충실히 지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때로는 사채업자로, 때로는 땅꾼으로, 때로는 귀한집의 데릴사위로 살아보기도 했다.
충실히 시간을 지내다 보면, 그때의 애달팠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어떤 삶은 아주 잔인한 살수도 되어보았고, 어떤 삶은 사람들을 구하는 협객으로도 살아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기억은 또렷해졌다.
그녀가…… 그녀가 보고 싶었다.
[설휘 님은 584개의 목숨이 남았습니다.]
“…….”
그렇게, 남은 목숨이 육백 아래로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설휘는 문득, 주변에 있는 이들을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백 번의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다지 챙겨주지 못했던, 수하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특히 과거에 마음을 주었던 소령에게 더더욱.
그래서 이번 삶의 목표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그들을 데리고 마교에서 빠져나오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