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육성 시물레이션-344화 (323/379)

344화. 그리움 (2)

8월의 일정인 무사수행을 명목으로 마교를 벗어나기 전날 밤.

설휘는 백혼 장로를 만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그의 행방은 바로 음무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 저희 사부님은…….”

이제는 아련히 그립게까지 여겨지는 기억.

한때 그와는 죽을 맞춰가며 꽤 오래 강호 활동을 했던 설휘다.

이 시기의 음무기는 사부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물론 그건 그만의 생각일 뿐.

백혼 장로는 음무기를 잘 이끌어 달라며, 설휘에게 크게 지원을 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앞에서는 엄한 얼굴을 하지만, 뒤에서는 항상 따스하게 보살피고, 여러 가지 신경을 쓰는 사람.

그것이 음무기의 사부였던 장로. 사마백혼이었다.

“어? 네가 웬일이냐? 이 늦은 시간에.”

총단 지부의 한 건물에서, 사마백혼은 설휘를 보고 알은체했다.

설휘는 그를 보자마자 납죽 엎드려 극공경의 예를 취했다.

이 세계에서의 백혼은 무려 마교 서열 31위.

현 신분에서 설휘가 아는, 곤마를 제외하고 최고의 인맥이다.

“귀하신 몸을 뵙습니다. 그간 잘 계셨습니까?”

“나야 늘 좋지. 오히려 일이 줄어 적적한 게 탈이다. 그래. 비무 대회 때 당한 상처는 좀 나았느냐?”

“…….”

설휘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간 너무 많은 삶을 겪다 보니 아스라한 까닭이었다.

개중에는 한 번 엎었다가 다시 되살린 일도 많았고.

‘곤마가 주최한 비무 대회……였던가.’

기억을 꼼꼼히 점검해 보자, 이 시기쯤 공식 비무대회에서 칠사자의 한 명인 서무귀를 쓰러트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 이후, 그간 의심하던 곤마의 주변 인사들. 그들이 자신을 보는 눈들이 크게 달라졌음은 물론이었다.

“며칠 요양을 하니 괜찮아졌습니다.”

설휘가 가볍게 읍을 하며 인사를 받자, 백혼은 바닥에 있던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따딱!

꺼지던 불씨가 다시금 살아났고, 잠시 가만히 불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말했다.

“그래서, 뭔가? 굳이 이 시간에 날 보러 왔다면…… 따로 할 말이 있을 테지?”

“……예. 그것이.”

설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백혼 장로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달에 수하들과 함께 사천 지방에 갈 예정입니다.”

“그렇군. 한데?”

“아무래도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기에 미리 말씀드리고자 왔습니다.”

“……긴 여행?”

백혼 장로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파견 근무를 나가는 신분으로, 긴 여행을 입에 담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것이다.

힐끗.

그가 슬쩍 주변에 이목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이어지고, 얼마 후 그가 한숨과 함께 말을 걸었다.

“언제 그런 마음을 먹었는가?”

“조금…… 오래되었습니다.”

“그래, 자네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네.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없다곤 말 못 하니까.”

스윽.

백혼장로는 자세를 고쳐잡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 어떤 이는 그 마음을 달리 볼 수도 있어. 사제자 곤마 님의 휘하에서 도움을 받고 성장한 자가, 이제부터 중차대한 상황이 벌어질 것인데, 그걸 알고 미리 꽁지를 내뺀 배신자라고 말일세.”

“그런 말씀이야말로 오히려 제게는 과분합니다. 고작해야 저 정도의 무력으로, 어떻게 전세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장 일제자, 이제자 진영은 고사하고, 곤마 님 휘하에서만 해도, 저보다 뛰어난 이는 두 손으로 꼽고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흠…… 가능성이라는 게 있지 않나.”

설휘가 겸연하게 자신을 낮추며 지적을 피하자, 백혼의 눈매가 조금 더 깊어졌다.

“자네의 당장의 무력이야 좀 모자라도, 이제껏 자네 나이에 그 정도의 성장을 거둔 이는 많지 않거든. 잠재 능력을 보는 거지. 앞으로를.”

“그런 잠재력이라면…… 저보다 음무기 녀석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허? 허허! 그래? 그렇게 보았는가.”

갑작스런 제자 칭찬에 백혼 장로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되었군. 노부는 빚을 지고 사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지라, 이번에 갚을 기회가 생겼군.”

“감사합니다. 어르신의 넓은 아량을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정확한 이유가 뭔지 들어봐도 되겠나?”

백혼 장로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음색도 변했다.

“내 눈으로 보기엔, 자네가 단순히 일신의 자유만을 좇을 정도로 책임 없고 방종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안 그런가?”

“…….”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테니, 조금만 얘기해 주시게. 혹시 또 아나? 내가 도울 것이 있을지도.”

흔들림 없이, 그대로 자신을 응시하는 백혼 장로의 시선.

설휘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그냥 경박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는 것도 방편일 터였다.

그러면 백혼은 조금 실망하겠지만, 어차피 이번 생에서 다시 그와 마주칠 일은 없을 터.

그렇게 잠시 앞으로의 정황을 생각해 보다가, 설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삶이 각박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각박해져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설휘는 조금 예를 차리며 말했다.

“비참하게 죽을 삶을 조금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비참하게 죽을 삶이라?”

“예. 아시다시피, 어차피 일제자가 짜놓은 판은 본교를 넘어 중원을 끌어들인 상황이고, 이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삼제자의 능력을 흡수할 것입니다. 그 사이, 곤마께서는 무엇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천살성이기도 하니까.”

“맞습니다. 분명 사제자께서는 좋은 분이지만, 그렇다고 싸움의 전황을 바꿀 능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따딱. 따딱.

잠깐 침묵이 돌았다.

어두운 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이라 그런지 모닥불 지펴지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그걸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서 다른 진영에 붙어도 되지 않는가?”

“저 혼자라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제겐 생사를 책임져야 할 수하들이 있습니다.”

“혼자서 과한 짐을 지려고 하는군. 어차피 모두를 다 지킬 수는 없는 법일세.”

백혼이 가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설휘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도 결국에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노인은 그에 수긍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잠시 먼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볼 뿐.

그러기를 한참. 정적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겠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게 있어.”

“하명하십시오.”

“용모파기가 자네들과 비슷한 이들을 알아두려면 이제부터 시간이 좀 걸려. 또한 사천 땅에서 객사당했다는 보고를 올린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뒤네.”

스륵.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착잡한 얼굴을 하는 백혼.

“도망자의 삶. 앞으로 자네들은 평생 본인의 얼굴을 써선 안 되네. 그건 길고 고단한 삶이 될 게야.”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제가 역용술에 재주가 있으니, 미리 전수해서 걱정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겁니다.”

“알겠네. 못난 제자 놈을 잘 부탁함세.”

투욱.

백혼은 작은 탁자에 올려진 술잔을 들어 보였다.

“술 한잔하시겠나?”

“좋습니다.”

설휘는 그렇게 백혼 장로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그의 적극적인 도움 아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마교라는 제한된 자리를 벗어나.

사천이라는 새로운 땅을 향하는 길을 준비했다.

***

[귀하의 존재는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설휘는 먼저 수하들의 죽음을 위장했다.

백혼장로의 도움 아래 적당한 시신을 찾아, 화산파와 다툰 끝에 죽음을 맞은 것으로 위장, 시신은 거기서 화장하고 목격자이자 증인을 본교로 보냈다.

여기에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혹여나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증인은 백혼 장로의 사람이 아니어야 했고, 진심으로 설휘 일행이 죽었다고 믿어야 했으니까.

그걸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꽤 애를 먹었지만, 결과만 놓고 말하자면 순탄하게 잘 풀렸다.

이걸로 조장들 모두가 자유롭게 되자, 설휘는 좀 더 아래 지방인 귀주(貴州)로 이동했다.

귀주는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도 춥지 않아 정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방이었다.

일단 터를 잡은 이후, 모두 모여 첫 사업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을 했다.

몇 가지 괜찮은 종목이 나왔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다들 돈벌이에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가장 가진 돈으로 가장 안전하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렇게 선택한 일이 고리대업.

즉, 사채업이었다.

[전문염왕채(專門閻王債)]

잘 차려진 건물 위 현판에는 대놓고 고리대업의 냄새를 풍기는 간판이 쓰여 있었다.

다만, 다른 업장과 다른 것이라면 바로 이것이었다.

* 양민들에겐 빌려주지 않습니다.

* 고위급 직책. 신분 숨기기 가능합니다.

* 왈패, 파락호, 녹림 등 환영합니다.

우리는 괜히 양민들과 엮이지 않겠다고, 전문가이니 전문가를 상대한다고.

그리고 확실히 거물급들만 상대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글귀였다.

업장의 장주는 음무기가, 건물지기는 용진이, 행동대장은 적송. 특수 임무는 요림. 장부 관리는 소령이 맡았다.

“흐음.”

이른 아침.

음무기는 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파락파락 턱.

한참 종이를 넘기던 중 갑자기 멈추더니. 손으로 한 장을 짚고는 물었다.

“황소철(黃小鐵) 이 양반. 돈값을 날이 지났는데 아직도 안 갚았네?”

스윽. 슥.

옆에서 압수한 장신구를 닦던 소령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따로 표시해 뒀어.”

“직책이 뭔데? 뭘 믿고 이리 까부는 거야?”

“진무(鎭撫). 종 6품 관리인 모양이야.”

“허…….”

음무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무. 군법과 형옥에 관련된 일을 하는 자.

백호를 대신하여 사무 일도 하는, 나름 높은 직위다. 척 봐도 까다로운 상대긴 했다.

“오늘까지 안 갚으면, 요림보고 처리하라고 해.”

“알겠어.”

“그럼, 이놈은 이렇게 처리하고…….”

파라락.

다시 떼인 돈 없나 싶어 살펴보던 때였다.

“어여.”

쿵쿵.

건물 문턱을 걷어차며 처음 보는 쌍판들이 걸어왔다.

숫자는 다섯. 근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험상궂은 얼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이 들고 있는 병기가 본격적이었다.

칼과 도에 창까지.

“이봐.”

매부리코에 장신. 중년 하나가 허리춤에 칼을 찬 채로 걸어와 눈을 부라렸다.

음무기가 이건 또 뭐 하는 놈들인가,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오늘부터 이곳은 우리가 접수한다.”

“……?”

“가진 돈 다 내놓고, 얌전히 빠지도록. 그럼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서 보내 주기로 하지.”

“....”

음무기는 눈을 껌뻑였다.

이건 대체 무슨 신종 경극인가. 아직까지 상황이 파악이 안 된 듯, 옆에 있던 소령을 바라보았다.

절레절레.

그녀는 물건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당신들 누구야?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이시길래?”

툭 하고 내뱉는 말에, 단신에 민머리의 사내가 나서 팔짱을 꼈다.

“소개가 늦었군. 우린 사천에서 명성을 떨쳤던 사합회(事合會)라고 한다. 딸린 식구들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고.”

“사합회? 거긴 뭐 하는 곳이야?”

소령이 고개를 돌려 묻자, 음무기가 대신 대답했다.

“있어. 딱히 갈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왈패 놈들.”

“와. 왈패...?”

콱. 스릉.

음무기의 말에 화가 난 것일까.

장신의 중년인이 허리춤의 검을 반쯤 뽑은 상태로 으르렁거렸다.

“어이. 기어코 피를 보고 싶은 거야? 칼부림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거 뽑으면 죽는다.”

턱. 스륵.

순간 뒤쪽에서 걸어 나오는 한 사내.

“……?”

얼굴이 사납기로는 그들보다 한 수 더한 인물, 적송이었다.

“안 뽑아도 죽는다. 가만있어도 죽고, 말을 걸어도 죽어.”

“…….”

왈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고.

결론적으로 그냥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이 시건방진…….”

장신의 사내가 발칵 했다. 그는 다 날려버릴 기세로 검을 뽑았다.

촤아아아---

“……?”

하지만 거기서, 갑자기 주변이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목이 날아간 상황이었다.

적송이 그의 목을 베고는 담담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합회?”

피식.

슬쩍 묻는 말에 음무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됐군.”

한마디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주춤주춤.

정말로 죽일 줄은 생각 못 한 걸까. 몇몇은 겁을 집어먹고 물러섰다.

“제법 실력자가 있었군.”

하지만 한 명은 달랐다.

느릿한 걸음. 모습은 평범하게 생겼는데, 눈빛은 뭔가 달랐다.

음무기는 그 모습을 보고 곧장 눈치챘다.

“오? 잡스런 사파 무리에 웬 마인 하나가 껴 있어?”

“……!”

“……!”

“……!”

그 말에 사파들의 눈이 커졌다.

설마하니 마공을 쓰는 자가, 들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재밌군. 그건 천천히 알아보면 되지.”

걸어 들어오는 설휘.

그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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